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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 오순환 | |
"당신은 누구십니까?"
"할머니, 저 민수예요."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
"할머니 손자 민수를 모른다고요?"
얼른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할머니를 보고 민수 총각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누구보다 민수 총각을 아끼고 사랑하는 분입니다. 하지만 서른이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늘 안타까워했습니다.
오늘도 민수 총각은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아가씨와 선을 보고 왔습니다. 하지만 굳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남들이 한다고 덩달아 결혼을 해서 구속받기 싫었습니다.
한 숨을 쉰 민수 총각은 어머니의 생신 선물로 사온 케이크를 식탁 위에 놓았습니다.
"따르르릉, 따르릉!"
거실 가운데 놓여있는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저 민수입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끊어버렸습니다.
민수 총각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현관문 여는 소리가 났습니다.
"어머니, 어디 다녀오세요?"
어머니는 말도 없이 한 발 물러나며 눈을 깜빡거렸습니다.
"우리 집 맞지?"
"그럼요, 어머니!"
"넌 내 아들 민수고, 그렇지?"
어머니는 웃옷을 벗으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부엌 수돗물을 힘껏 틀고는 두 손으로 거푸 낯을 씻은 어머니는 소매 끝으로 얼굴을 쓱쓱 닦았습니다.
"이게 뭐더라?"
식탁 위에 있는 케이크를 가만히 들여다 본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생일 케이크잖아요. 어머니 생신이라 제가 사왔습니다."
어머니는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서 다시 민수 총각을 바라보았습니다.
"장난 그만 해요, 재미없다고요."
그러나 어머니는 웃지 않았습니다. 멍하니 민수 총각을 보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화가 난 민수 총각은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리모컨을 꾹 눌렀습니다.
화면에는 회색 바바리코트를 입은 남자 앵커가 아주 빠른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전염병이 번지고 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먼저 시작된 이 병은 차츰 차츰 여러 사람에게 퍼지면서 가까운 가족도 몰라보고 흔히 보는 물건의 이름까지도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입맛을 쩍 다신 앵커는 원고에 쓰인 글자를 잊어버린 듯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민수 총각은 왼 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린 후, 허벅지도 꼬집어보았습니다. 아팠습니다.
"딩동!"
벌떡 일어난 민수 총각이 현관문을 열자, 아버지가 살며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아버지도 안경 너머로 민수 총각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거실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손에는 장미꽃 다발이 들려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무척 좋아하시겠어요."
"그래? 꽃을 샀긴 샀는데 왜 샀는지 모르겠어."
"참 아버지도,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잖아요."
"생신이라, 생신이 뭐더라."
화장실로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민수 총각은 자기 방으로 올라와 버렸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 심지어 아버지까지도 모든 것을 잊은 듯 이상한 행동만 했습니다. 민수 총각은 화가 나서 침대에 털썩 몸을 던지고 팔베개를 만들었습니다.
"저게 뭐지?"
천장 위에 붙여둔 별자리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불을 끄면 반짝 반짝 빛을 내는 별자리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벌떡 일어난 민수 총각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습니다
방금 들었던 뉴스 속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건망증이 전염되고 있다? 그럼,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까지도…….'
방 안에 있는 물건을 둘러보면서 하나하나 이름을 대보았습니다.
"저건 책상, 걸상, 컴퓨터, 또 책, 그리고 달력……."
그런데 천장 위에서 환하게 비추고 있는 것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으음 형……, 광……등……."
얼른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와서 잊기 전에 모조리 써두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문입니다.' '이것은 옷입니다' '이것은 가방입니다'. 이렇게 붙여놓고는 빨리 거실로 나왔습니다.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글로 써서 붙였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를 데리고 나와서 물건 이름을 천천히 읽도록 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내려 갔지만 할머니는 자꾸 자꾸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민수 총각은 빨리 '나는 민수입니다. 할머니 손자입니다'라고 써 가슴 앞에 올려 보였습니다.
하지만 금방 이야기를 해주어도 할머니는 물론 아버지도, 어머니도 잊어버리고 다시 눈만 끔뻑거리며 민수를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민수 총각은 그만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만 두어버리면 민수 총각도 괴상한 건망증이 전염될 것 같아 정신을 차리고 자꾸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이것은 텔레비전입니다. 리모컨을 누르면 화면이 나옵니다."
리모컨을 눌려 텔레비전을 켜니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전염성 건망증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나타났습니다. 정말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화가 단단히 났나 봅니다. 앞으로 이 현상이 언제까지 진행될 것 같습니까?"
마이크를 옆에 있는 사람에게 돌리자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난 일이라고 하는데 이상한 것은 임산부가 있는 집이나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앵커 옆에는 은백색 머리의 사회학자가 손녀의 손을 꼭 잡고 말을 이었습니다.
"아직도 교육비나 육아문제로 출산을 미루고 있는 부부들은 오늘부터라도 사랑을 나누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염성 건망증이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민수 총각은 가슴이 답답해 왔습니다.
할머니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나는 집이야.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 무엇인지 아니? 그건 아기를 바라보는 부모의 미소 띤 얼굴이란다."
비로소 민수 총각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 오늘 선본 아가씨와 결혼하겠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민수 총각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동화작가 손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