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스크랩] 마누라 팔아먹기: 여성에 대한 실용적 관념

tlsdkssk 2006. 3. 22. 07:24
마누라 팔아먹기: 여성에 대한 실용적 관념

   바가지 심한 마누라와 함께 살다 지쳐버린

 착한 남편들이여,

 말 안 듣고, 성질 못된 마누라는

 목에 밧줄을 걸어 시장으로 데리고 나가라. 


1696 년경에 유행했던 이 노래는 부인 매매를 통한 이혼 관습을 말해 해준다. 부인을 팔아서 이혼하던 이런 관습이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적어도 8세기 무렵 영국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다. 아마 시골 하층민들 사이에서 먼저 시작됐을 것이다. 


분명히 이 관습은 세 가지 기본적인 고정관념에서 비롯되었다. 첫째는 여자란 본질적으로 남편의 소유물이란 생각이다. 지금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생각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 참정권 운동이 서서히 득세하기 시작한 20세기 초반까지 다양한 형태로 꾸준히 존재해 왔다. 사실 서구 사회에서 여성들이 자유와 독립을 쟁취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전에는 여성이 막대한 유산의 재산 행사권을 갖고 있거나, 자신이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만만한 남편을 만나거나, 아니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노예의 인생보다 별로 나을 게 없었다. 


두 번째 고정관념은, 대개 결혼이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이유 때문에 행해지는 계약이란 생각이다. 낭만적인 사랑을 위해 결혼한다는 생각이 중세 시대에 생겨나기도 했지만 이런 식의 낭만적인 사랑법은 19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나타나 널리 퍼지게 된다. 이때까지 결혼이란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하는 게 상례였으며, 남편들은 낭만적인 사람을 정부로부터 찾았다. 아주 드문 경우, 특히 유럽의 상류층 사이에서는 부인들이 바람을 피기도 했다. 사랑 없는 이런 결혼생활에서 성생활은 순전히 재산 상속이나 노후에 자신들을 돌봐줄 2세 생산을 위한 목적으로 행해졌다. 대신 남자들은 쾌락을 위한 성생활은 종종 매춘부에게서 찾았다. 


세 번째 고정관념은 관습법에 규정돼 있는 결혼관이다. 일단 남녀가 같이 살면 종교적, 혹은 공적 결혼 의식을 거행했건 안했건 간에 이들을 법적으로 결혼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 특히 하층계급 사람들이 이런 관습법적인 결혼을 했다. 그러나 이런 결혼생활에서 만약 둘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면, 여자측에서 집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대개 이런 여자들은 교육을 못 받은 경우가 많았고, 자신을 부양할 일자리도 얻기 어려웠다. 따라서 여자가 싫어진, 불만에 찬 남편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를 데려갈 능력이 있는 다른 남자들을 찾는 것이었다.

이런 모든 요인들이 합쳐져서 아내를 팔아먹는 개탄스러운 못된 관습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런 관습이 얼마나 폭넓게 퍼져 있었는지는 사실 확실치 않다. 그러나 많은 사례들이 문서에 잘 기록되어 있다. 부인 매매는 노예나 소 경매와 매우 흡사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남편이 부인의 목에 밧줄을 걸고 시장으로 끌고 나와 가축 전시장에 매어 놓는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에게 그녀의 가치를 칭찬하며 경매에 붙인다. 만약 단 한 사람만 관심을 보이면 우선 되는 대로 명목상의 값을 불렀다. 대개 5실링과 맥주 한 병이 적정가격이었다. 가격 흥정이 끝나면 판매증서를 작성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나 존 오스본은 내 마누라 메리 오스본을 1 파운드를 받고 윌리암 서전에게 판매하는 데 동의한다. 앞으로 마누라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며 이에 대한 증표로 여기 서명하는 바이다. 1815 년 1월 3일 메이드스톤에서 존 오스본" 입찰자는 새로 구입한 부인의 밧줄을 풀어준 뒤, 집으로 데려가기 전에 시장을 돌며 끌고 다녔다. 


브리스톨에서 발행된 1823 년 5월 29일자의 한 신문에는 그런 매매 행위에 대한 생생한 목격담이 실려 있다.


요즈음 우리 고향의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주 보기 싫은 장면이 세인트 토마스 시장에서 또 한번 연출되었다. 로즈메리에 사는 존 내쉬라는 한 가축상(이름값도 못하는)이 자기 마누라를 밧줄에 묶어 끌고 시장에 나타났다. 뒤에는 구경꾼들이 줄지어 따라왔다. 벨야드 맞은편까지 오자 그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자신의 부인을 경매에 붙이겠다고 선언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그 부인이 현재의 남편 손에 있는 게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한 한 젊은이가 나와 6 페니라는 후한 값을 불렀다! 판매인 남편은 또 다른 입찰자를 기다렸지만 헛수고였다. 아내의 가치를 칭찬하고 착한 성품을 자랑해도 1 페니도 더 맣은 액수를 내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남편은, 마누라를 다시 데려가느니 그 젊은이에게 팔 수밖에 없었다. 부인은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었지만 젊은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곧 거래를 후회하며 이 부인을 다시 경매에 붙였는데, 9 페니에 사겠다는 사람이 있자 즉시 이를 받아들이고 부인을 넘겨버렸다. 부인은 이 두번째 거래가 마음에 안 들었던지 도망을 치고 말았으나 결국 구입자가 다시 붙잡아와서 자신의 재산임을 주장하였다. 부인은 이 거래가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치안판사의 명령으로 기각되었다. 원래 남편 내쉬는 분노한 군중들은 피해 급히 도망쳤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매매 행위를 금지시키려고 애를 썼다. 경찰이나 판사들도 이런 관습을 못마땅해 해서 중지시키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818 년 애쉬번의 한 치안박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판매 현장에 경찰관을 보낸 진짜 목적은 물론 그런 창피한 거래를 중단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표면적인 목적은 시장의 평화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런 거래가 벌어지면 사람들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며 질서를 파괴할 가능성이 높았다. 거래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내가 거래를 중지시키거나 방해할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 있어왔던 관습이기 때문에 이를 법으로 막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할지도 몰랐다." 결국 부인 매매 행위는 계속되었다.

 

또 다른 목격담 하나가 "스테이트맨"지 1814 년 2월 26일자에 실렸다. 여기서는 이런 매매 행위가 비정상적인 행위로 간주되지 않고 있는 듯하다.

 

부인매매

노팅검에 사는 링커라는 한 용감한 군신의 아들은 이미 오십 줄에 들어섰지만 아직도, 비록 요조숙녀는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여성들을 사로잡을 힘이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툰이라는 한 민병대원의 아내가 그가 정복한 여성들 명단에 추가되었다. 마침 휴가를 받아 노팅검에 와 있던 툰은 마누라의 부정을 의심하게 되어 그녀를 경매를 통해 처분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기왕이면 이를 통해 가능한 한 많은 이익을 얻고 싶었다. 남편에게 짐만 되었던 부인은 토요일 저녁 돼지 시장에서 판매됐으며 처음 경매 가격은 3 펜스 였다. 그러나 아무런 응찰자도 없자 고귀한 군신의 아들 링커가 기꺼이 값을 6 펜스로 후하게 올려 불렀으며 결국 부인은 목에 밧줄이 걸린 채 그에게 인도되었다. 수많은 구경꾼들은 이 사랑스러운 전리품이 그녀를 사랑하는 구입자의 손 안으로 념겨지는 것을 아무런 질투의 감정 없이 지켜보았다.

 

간혹 불만을 품은 남편이 부인을 판매하다는 광고를 지역신문에 내기도 했다. 다음은 1796 년에 있었던 그런 광고의 한 예이다.

 

나의 부인 제인 헤블런드를 5실링에 판매합니다. 튼튼한 체격에 신체도 매우 건강합니다. 씨도 잘 뿌리고 수확도 잘하며, 쟁기도 잘 잡고 소도 잘 몹니다. 건장한 사내 몇 명의 몫은 할 것입니다. 고집이 좀 세지만 적절히 잘 다루기만 하면 토끼처럼 순하게 부릴 수 있습니다. 가끔 잘 지켜보지 않으면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현재의 남편이 감당하기가 다소 힘들기에 팔려고 내놓은 것입니다. 관심 있는 사람은 광고제작업자에게 문의하십시오

특기사항: 그녀의 옷가지 전부를 함께 제공합니다.

 

("이른바 남자라는 자들은 여자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자가 아니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서 온 존재인가? 하나님과 여자로부터 태어나지 않았는가? 사실 남자야말로 그리스도와 전혀 관계가 없는 존재다.". 이사벨라 폰 바그너, 1851) 


마치 가축처럼 무게를 달아 여자들을 파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예는 1696 년 옥스포드셔 테임에서 있었던 종교재판 기록에 나온다.

 

토마스 히스는 조지 풀러 부인을 파운드당 2 펜스에 구입해서 테임의 여인숙으로 데리고 왔음을 증명합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이틀 밤낮을 묵었으며 그 동안 그는 하루에 한 시간 이상 그녀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는 그녀를 벤슨에 있는 화이트 하우스로 데려왔으며 그녀의 침대 옆에 앉아 있곤 했습니다. 그러나 맹세코 그녀의 육체에 음욕을 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 태임의 존 프리켓은 거래가 이루어지는 현장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맹세합니다. 그러나 조지 풀러의 아내의 체중이 계측되고 그에 해당하는 29실링의 가격이 지불되는 것은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파운드당 2 펜스고 1실링은 12 펜스이므로 부인의 몸무게는 174 파운드라는 얘기가 된다. 이 사건에서 히스라는 사람은 결국 유죄판결을 받았고 군중들 앞에서 속죄를 해야 했다.

 

가난한 빈민들만이 부인을 매매했던 것은 아니다. 런던 출신의 한 부유한 가축 상인은 자신의 부인을 50기니의 현금과 구매자가 타고 있던 말을 받고 팔아버렸다. 어떤 경우는 교회에서 이런 관습을 옹호하기도 했다. 스웨들린코트라는 교구의 위원회에서는 남편이 도망간 부인을 금화 1 플로린을 받고 시장에 내다 팔도록 허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런 부인 매매 관습은 영국에서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베트남 같은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도 이런 관습이 있었다. 에드워드 브라운이란 이름의 한 영국 선원은 1857 년 베트남 해적들을 피해 달아나서 코친차이나(현재의 배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지역)에 혼자 남게 된 적이 있다. 결국 그는 몇 달 만에 영국 관리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 동안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부러 감옥에 갇혔다. 이때의 경험을 기록한 "코친차이나에서의 경험"(1861)이란 책 속에서 그는 자신의 전 가족을 팔아먹는 한 죄수 이야기를 했다. 


이즈음 감옥 안에 아주 우울한 일이 벌어졌다. 마누라를 팔아먹은 어떤 남편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4 년 전 쌀 한 푸대를 훔친 죄로 송치됐던 사람인데, 늘 그렇듯 판결 내용은 특별한 명령이 있을 때까지 감옥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열두 달쯤 지나자 그는 모범적인 감옥생활 덕택에 부인과 아이들과 함께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그에게는 두 살에서 여섯 살에 이르는 세 명의 자식이 있었다. 두 명은 딸이고 한 명은 아들이었다.

그러나 가족을 다시 만난 지 여섯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여섯 살 난 자신의 큰딸을 현금 5 만원, 즉 약 13 달러를 받고 팔아버렸다. 다시 여섯 달이 지나자 이번에는 아직 세 살밖에 안 된 어린 막내딸을 현금 2 만원, 즉 약 5 달러를 받고 다시 팔아버렸다. 일 년이 지난 후 마지막 남은 아들은 현금 17,000원, 즉 4 달러 조금 넘는 헐값에 팔았다. 이제는 부인마저 팔아치울 요량이었다. 그녀는 외모가 출중한 27세 가량의 코친차이나 여자였다. 남편이 10 년 전에 코친차이나의 관례를 따라 돈을 주고 사서 결혼한 여자였다.

그녀가 팔려 나가는 날 나는 그 현장에 있었다. 그녀는 비통하게 울고 있었으며 남편이 말을 붙이자 혐오하듯 외면해 버렸다. 나는 그녀가 너무 불쌍했다. 현재의 처지보다도, 그전에 자녀들과 헤어질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제 그녀 자신이 팔리는 날이 온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팔려야만 했던 걸까? 남편이란 작자의 부족한 생필품을 사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나았다. 이 작자는 아편을 사려는 사악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아내를 팔아먹었던 것이다.

자 이제 이야기를 끝맺자. 이 불쌍한 여인은 아주 험상궃어 보이는 남자 세 명에게 인도되었다. 그중 한 명이 남편이 서명한 서류와 판매증서를 받았다. 그들은 여자의 옷가지 꾸러미도 인수했다. 끝으로 판매 대금을 치룬 뒤 그들은 여자를 데리고 가버렸다. 그녀의 몸값은 현금 8 만원, 즉 20 달러 정도였다. 


부인을 팔아치움으로써 이혼을 하는 관습은 영국인들에 의해 미국에도 도입되었다. 1645 년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의 '특별재판' 기록에는 "자신의 아내를 젊은 남자에게 판 바게트 이글스턴이란 남자에게 벌금 20실링을 부과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1736 년 3월 15일 "보스턴 이브닝 포스트"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보스턴: 지난 주 초 우리 시에서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사이에 아주 기이하고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다. 남자들이 각각 이 여자를 자신의 부인이라고 우겼던 것이다. 사실 두 남자 중 한 남자가 15실링을 받고 자신의 부인에 대한 권리를 다른 남자에게 팔기로 약속했었는데, 구매자인 남자가 10실링만 지불하고 나머지 5실링은 지불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자를 포기하고 차라리 선금을 날려버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마침 옆에서 이 거래를 지켜보던 두 사람의 친구인 두 신사가 화해를 시키기 위해 구매한 남자에게 돈을 꿔주어 무사히 셈을 치를 수 있게 해주었다. 채권자인 남자는 기꺼이 돈을 받고 전 부인에게 성의 없는 작별인사를 한 뒤 그녀를 구매자에게 넘겼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부인 매매 관습이 미국에서는 크게 번지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19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1887 년 7월 13일 셰필드에 사는 에이브러험 부스로이드라는 사람이 자신의 부인 클라라를 5실링에 팔아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1885 년 영국은 16세 이하의 소녀를 매매하거나 납치해서 윤락 행위를 시키는 일을 방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그러면 16세 이상의 여자들에 대한 거래는 합법적이라는 소리였다. 1891 년에는 자신의 부인을 감금하는 일이 불법이 되었다

출처 : 마누라 팔아먹기: 여성에 대한 실용적 관념
글쓴이 : joba 원글보기
메모 :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붉은머리 오목눈이들의 합창  (0) 2006.03.24
[스크랩] 보기힘든사진  (0) 2006.03.24
[스크랩] 서울의 산  (0) 2006.03.20
[스크랩] 가슴울리는 사진한장  (0) 2006.03.20
[스크랩] 야생화 전시회  (0) 2006.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