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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느껴봐] - 광기, 그것은 완성되기 위한 깨어짐 (역자서문: 찬란한 파멸을 기다리며)

tlsdkssk 2006. 2. 14. 06:24

찬란한 파멸을 기다리며...


이 책의 구술자는 르네라는 이름의 여인이다. 그녀의 성이나 다른 생활환경들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드러나 있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아주 비범할 뿐더러 정말로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거의 고통스러울 정도로 완벽하게 생생한 언어로 르네는 정신분열증이라는 나락으로의 추락과정과 10여년에 걸친 투병생활을 통한 점진적인 회복과정을 재현해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는 과정에서 그녀는 광기문학에서는 가히 필적할 상대가 없는 그런 휴머니즘을 만들어 내고 있다.
 르네를 성공적으로 치료해냈던 정신분석가 세쉬아에 부인의 해설과 함께 편집되어 출간된 이 책은 우리 '정상적인' 정신들에게 붕괴의 경계에 있는 아픈 정신의 감성적인 음영과 혼란과 고통을 마음이 아리도록 리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가히 인간이라는 존재의 생존과 승리의 능력에 대한 장엄한 증언이라고 하겠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광기에 걸려있다. 따라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미쳤다는 것의 또다른 형태일 것이다."
 철학자 파스칼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광기를 이성의 다른 한편에 두고 이성의 타자로서의 광기를 인식한다.
말하자면, 광기와 이성은 일체의 교통 밖에 있는 것이며 광기의 인간과 이성의 인간 사이에 공통적인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는것이다.
 그에 따라서 광기의 역사는 감금의 역사이자 소외의 역사일 수 밖에 없었다. 이성중심적인 사회에서 광기는 곧 '부도덕한'비이성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기를 단죄하는 이성이란 과연 어떤 이성인가?
그것은 인강의 보편적 본성, 유기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거시세계와 교류하고 있는 더 큰 자기인식을 내포하는 객관적 현상으로서의 이성인가 아니면 자기의 심신만을 전체로 인식하고 계산과 측량의 엄밀성이나 생산의 효율성을 위해 도구화된 주관적 현상으로의 이성인가?


『공자께서는 "중도(中道)를 가는 사람을 얻어 가르치지 못한다면 나는 반드시 다음으로 광자(狂者)를 택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광자라 함은 비록 다 실천하지는 못하나 큰 뜻을 가지고 옛선인들의 덕을 사모하여 말하는 사람이다. 또 공자께서는 "내 문을 지나면서도 내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내가 유감스럽게 생각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향원(鄕原)뿐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향원이라 함은 "뜻만 컸지 행동이 그에 따르지도 못하면서 옛선인만 찾으니 무엇하리오? 이 세상에 났으면 이 세상에 맞게 살것이다."라고 광자를 비난하면서 세상에 아부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특별히 나무랄 것은 없고 충직염결해 보이나 세상에 아첨해서 남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듣고 자기도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데 옛선인의 길에 들어설 사람은 결코 아니니 도리어 덕을 해치는 사람이다.』 -孟子-
 
 과거 권세에 저항하는 행동유형 가운데 이색적인 한 방식으로 청맹(靑盲), 청아(靑啞), 청광(靑狂)이라는 습속이 있었다.
말하자면, 거짓으로 눈먼 척 벙어리인 척 미친 척하면서 오염된 권세로 부터 피세불사(避世不仕)하려는 아웃사이더들의 저항이었다.
세조때의 전형적인 아웃사이더 김시습은 똥과 오줌을 받아두는 거름구덩이 속에 들어가 히죽거리면서 권력을 찬탈했던 세조를 상징적으로 모욕했던 당대의 소문난 '미치광이'였다.


오늘날에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고수하고 있는 학파로부터 원래의 개념을 변형시킨 다양한 수정주의 유파에 이르는 많은 정신분석학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파적인 차이를 떠나 훨씬더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정신분석이 과연 <적응adaptation>을 목적으로 하느냐 아니면 <영혼의 치유cure of soul>를 목적으로 하느냐 일 것이다.

 적응이란 한 사람이 자기 문화내의 대다수 사람들과 비슷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에 따라 그 사회와 문화가 인준하고 있는 행동유형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있느냐가 정신건강의 기준이 된다.
이러이러한 '옳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그로부터 벗어나는 일탈행동은 잘못된 것이고 건강하지 않은 것이라고 간주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사회 문화의 공식적으로 인준된 행동유형 자체가 제정신이 아닌 것(insane)이라면 어떨 것이가?
이러한 편향된 규범에 적응하지 못하고 좀더 인간적인 삶의 목적들, 존재의 독립과 자기 인성의 성실성 그리고 보편적인 존재의 진실을 달성해야 한다는 '내부의 목소리'로부터 과도한 고통을 당해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어떨 것인가?

 정신분석의 또하나의 목적은 영혼의 치유에 있다.
그것은 인간의 잠재력의 적절한 발달과 개체성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도덕적 지적 성실성을 배반하여 자신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버리고 참된 개체성보다는 군중의 익명성속에서 존재의 안위를 찾으려 하고 자기에게 분명한 것은 오로지 쾌락욕구의 만족뿐인 삶의 방식 때문에 자기 인성이 마비되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순한 적응상담이 아니라 영혼의 치유일 것이다.
 그들은 우리 문화가 이러한 고통이 의식되는 것을 잠재우기 위해 제공하는 탈출구, 섹스산업이라든가 여가 레저문화 혹은 주연(酒宴)으로의 탐닉으로는 더 이상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내부의 목소리를 가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귀스트 로댕의 「팔없는 명상」은 사유와 행동의 불일치, '내부의 목소리'를 듣지만 실천이 뒤따르지 않아 갈등하는 뒤틀린 자화상이다.
그리고 로버트 롱고의 「도시인」은 자기의 그림자조차 확인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눈부신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섬뜩한 익명성으로 압살될 것 같은 공포를 안고 있는 현대의 모습이다.


우리 주변에는 완전히 깨지기에는 그것의 존재에 대한 고통이 너무나 심해 하릴없이 균열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는 정신들이 많다.
그들은 동료들의 '정상' 판정에 만족해하며 오늘도 무난한 하루일과를 마친다.
그러나 그들도 때로는 홀로 있을 때 자기 존재의 황폐함과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치를 떨곤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웃을 감금함으로써 자기의 제정신sanity을 확인하는 것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내면의 심층에 광기에 대한 두려움을 가두어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치겠다!"라든가, "미치고 싶다!" 혹은 "정신병원"은 모두 자신이 지금 이 순간 미치지 않았다는 위안이자 확인이 아니겠는가?
모두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이성은 또 어떤 이성인가?

미국의 전체 병원의 병상을 점유하고 있는 사람들 중 50%는 정신적인 문제로 입원한 사람들이고 다시 이들 중 50%는 일반적으로 광인(狂人)이라 불리는 정신분열증 환자들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역자는 몇년 전에 번역했던 정신의학의 위대한 발견들을 다룬책 「미완의 궁상각치우(窮想覺恥愚」에서 이런 내용의 역자서문을 썼었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갈들은 인간 불치의 질병이라고!
  그러나 바로 이러한 갈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은 더 큰 자유로 전회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 갈등이 만들어내는 온갖 아픔들이 또한 있지만 말이다.
 
  삶 그 자체에는 달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등을 돌리고 있는 다른 한쪽이 있다.
  그러니 이 다른 한쪽이 있어야만 삶은 온전한 구(球)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나가 아닌 둘의 구를 말이다.

         여기에 기다리며 앉았었네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는 가운데,
         선악의 저 너머,
         어쩌다 밝음에 몸을 맡기고,
         어쩌다 그늘에 몸을 맡겨도,
         그것은 오직 놀이일뿐,
         그럴 때 갑자기 하나가 둘이 되었고
         그리고 짜라투스트라가 내 곁을 지나갔다. ........ 니체(실스 마리아)』




 그러나 바로 얼마 전 역자는 친형이 정신적인 문제로 병원에 들어가야만 하는 일을 겪었다.
그리고 역자는 그에 대해 나름의 무력감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딱한 사정이야 있었지만 결국 광기의 역사는 감금의 역사라는 사실을 역자 스스로 추인했을 뿐만 아니라 방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책을 보아오면서 아픈 사람들의 그 고뇌와 부조리에 치를 떨었고 그 부활과 회생의 기적에 눈물겨운 감회를 추체험하곤 했던 역자로서는 그 모든것이 자기 기만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이제 역자는 간절히 기다린다.
그가 불비한 것들을 미련없이 깨트리고 새로운 완성을 준비하는 독짓는 사람이어 주기를....


《아, 완성되기 위하여 깨어지는 찬란한 파멸이여》
                                               

출처 : [느껴봐] - 광기, 그것은 완성되기 위한 깨어짐 (역자서문: 찬란한 파멸을 기다리며)
글쓴이 : NeoTran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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