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을 가꾼 영화들〕①
고난을 통한 구원과 사랑의 완성
- 라스 폰 트리에의‘브레이킹 더 웨이브’
김 문 홍
사랑과 구원의 逆說的 비틀기
사랑은 모든 문학예술 작품들의 영원한 소재이며 주제이다. 문자가 발명된 이래로 사랑이라는 주제는 많은 작가들이 지금껏 다루어 왔으며,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며, 앞으로도 탐험해야 할 미지의 처녀림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낡은’ 소재이긴 하지만 작가와 예술가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따라서는 섬세한 가공을 필요로 하는 원석(原石)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그들의 정교한 손질을 거치면 빛나는 보석이 되기도 하고, 미숙한 손질에 따라서는 평범한 야성에 머물러 빛을 발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들의 가공 여부에 따라 ‘낡은’ 소재에 머물러 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소재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한다.
「드라마분석」이라는 저서에서 연극학자 리스크는 “극의 과정에서 인물이 완성하는 많은 행동들은 피할 수 없는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비평가로서 우리는 인물의 동기를 분석해야 할 모든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인물의 행위에 대한 동기를 7가지로 세분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물 행위는 보상에 대한 희망, 사랑, 실패에 대한 공포, 종교적 신념, 복수, 탐욕, 질투라는 동기에 의해 유발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극에서 가장 특별하고 강한 동기는 ‘질투’라고 단정하고 있는데, 이 질투는 바로 사랑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물 행위의 가장 큰 동기는 사랑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사랑과 지상 위 남녀의 현실적 사랑은 프리즘을 통과한 빛의 파장처럼 그 해석과 수용에 있어서 다른 의미를 지닌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사랑은 전통적 인습과 도덕률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질 때만 용인되지만, 현실적 남녀의 사랑은 간혹 묵시적 범주를 벗어날 때도 있을 것이다. 윤리적 범주 안에서의 보통 남녀의 사랑은 얼마든지 승인되지만, 윤리적 도덕률을 벗어난 남녀의 사랑은 용인되지 못하는 것이 비근한 예일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이고 정신적 교감인 사랑은 인정하면서도 사회적 제도와 관습의 벽을 뛰어넘는 사랑은 용인되지 못하는 것이다.
남편은 전신마비의 불구이다. 남편으로서는 앞으로 회생 불가능한 자신을 간호하며 인내와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아내의 처지가 못내 안쓰럽다. 아내의 불행한 삶을 염려한 남편은 아내더러 다른 남자와의 육체적 교섭을 원한다. 아내는 남편의 요구대로 다른 남자와 성적인 접촉을 시도하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아내의 일탈 행위를 매춘으로 몰아붙인다. 아내는 그러한 자신의 매춘 행위가 남편의 회생이라는 구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데에도, 주위 사람들은 아내의 그러한 행위를 매춘으로 규정하고 있다. 종교적 구원과 사랑, 그리고 현실적 희생과 사랑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비틀어 보이는 영화가 바로 덴마크의 감독 라스 폰 트리에(1956〜 )가 1996년에 발표한「브레이킹 더 웨이브(Breaking the Waves)」이다.
서사적 표현기법을 통한 들고 찍기
이 영화는 세계 3대 영화제의 하나인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경쟁 부분의 대상이 황금종려상이라면 심사위원 대상은 2등상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의「올드보이」가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으며, 임권택 감독의「취화선」이 감독상을 수상(2002년)한 바가 있었다. 라스 폰 트리에는 덴마크의 작가주의 영화감독으로, ‘도그마 95’ 선언으로 세계 영화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가 있다. 이 선언은 기존 영화계의 영화 정신과 제작 방법에 대한 일종의 도전과 저항 운동으로, 조작적인 스튜디오 촬영보다는 현지 촬영, 인공조명보다는 자연 조명, 화면의 흔들림이 없는 카메라의 고정 촬영보다는 흔들림을 통한 사실적 느낌의 들고 찍기(핸드 헬드), 동시 녹음과 영화음악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현장의 음향 사용, 그리고 기존 영화의 내러티브(서사구조)보다는 상황의 나열을 선호하는 일종의 대안적 영화 만들기를 선도한 영화 운동이다. 이러한 그의 ‘도그마 선언’의 영화 정신과 제작 방법에 의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백치들」이다. 그는「어둠 속의 댄서」(2000년)라는 작품으로 칸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아메리카 삼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라 일컫는 그의 또 다른 작품인「도그빌」은 연극적 구성과 표현을 통한 영화 만들기로, 도그마 선언의 정점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주고 있는 극단적인 실험적 영화이다.
이 영화 역시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마 선언’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영화 음악 대신 현지의 음향을 사용하고 있으며 들고 찍기로 제작한 작품이다. 영화의 내러티브 역시 전통적인 영화의 줄거리 구조를 따르고는 있지만, 시퀀스 별로 몇 개의 장을 설정하여 사건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리고 각 장 별로 ‘제1장 베스 결혼하다, ......, 제7장 베스의 희생, 에필로그 장례식’ 등 모두 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은 일견 독립적인 하나의 시퀀스를 형성하고 있지만, 전체라는 주제와 서사구조에 유기적인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각 장은 주로 일몰이나 먼 바다 풍경의 롱 숏으로 각 시퀀스의 공간적인 배경이나 분위기 등을 묘사하고 있는데, 들고 찍기보다는 카메라의 고정 촬영으로 한 편의 시적인 영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일종의 서사극적 표현 기법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을 벗어나 서사구조에 몰입하는 ‘극적 환상’을 방해하고 있는 서사극적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관객으로 하여금 각 장의 이러한 표제 영상을 통해 드라마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응시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카메라를 고정시킨 촬영보다는 들고 찍기 기법의 화면 전환으로 현장의 사실감을 느끼게 하면서 역시 관객의 극적 환상을 방해하고 있다.
사랑과 구원을 위한 일탈된 자기희생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스코틀랜드의 한 작은 어촌 마을이다. 이 마을은 어느 누구나 외부인과의 결혼을 꺼려할 만큼 전통적 인습이 강하고 도덕률이 엄격한 곳이다. 여자 주인공 베스 맥닐(에밀리 왓슨 분)은 외부인인 남자 얀과 결혼하기에 이른다. 신랑이 될 얀은 바다 위의 유정(油井)에서 일하는 건장한 노동자로 현실성이 강한 인물이지만, 베스는 종교적 신심이 두터우며 거의 백치에 가까울 정도로 순수한 비현실적 인물형이다.
마을 주민들과의 결혼 환영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베스는 얀을 집 안의 화장실로 안내하여 자신을 가지라고 한다. 얀은 두 사람의 사랑을 나눌 공간이 탐탁지 않게 생각되지만, 베스에게는 그런 공간의 현실적 여건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준다는 그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베스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자기희생과 헌신만이 곧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꿈같은 신혼이 지나고 얀은 다시 일터인 유정으로 돌아가게 된다. 얀이 없는 공백을 베스는 마을 교회에서의 기도로 채운다. 그녀의 기도 방법은 아주 특이하다. 그녀 혼자서 신과 신도의 이중적 역할을 담당하는데, 그녀가 신에게 묻는 간절함의 호소도 자신의 목소리로 대체하고 그에 대한 신의 대답 역시 자신의 목소리로 대체하는 특이한 기도 방식이다. 유정에서 일하는 다른 동료 친구들은 휴가를 왔는데도 얀은 아직 돌아오지 않자 베스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기다린다. 그런데 얀은 작업 중에 동료 친구를 구하려다 크게 부딪쳐 전신마비가 되어 마을의 병원으로 후송된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전반부라면 중반 이후부터 후반은 얀의 회생과 구원에 대한 베스의 자기희생의 일탈된 사랑의 행위로 이어진다.
얀은 곁에서 그를 간병하는 베스에게 이상한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그는 그녀의 불행한 삶을 염려하고 성적인 자기만족의 환상을 채울 목적으로 그녀에게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그 경험을 자신에게 얘기해 달라고 제의한다. 그녀는 그러한 제의에 기겁을 하고 거절하지만 얀은 다른 남자와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와 사람을 나누는 것과 같다는 이상한 논리를 펼친다. 그렇게 하는 길만이 자기의 회생을 앞당기는 지름길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 설화에는 ‘살보시(육보시)’라는 것이 있다. 힘과 권력이 없거나 외로운 주변부적 삶을 영위하는 남자와의 육체적 접촉은 곧 그 남자들을 구원하게 하는 보시라는 것이다. 종교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 구원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 얀의 회생을 위한 다른 남자와의 성적 접촉은 상업적이고 속물적인 매춘 행위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행위야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구원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베스는 그 이후부터 일탈된 매춘 행위를 일삼기 시작한다. 버스 뒷좌석에 혼자 앉아 있는 중년 남자의 바지 지퍼를 내리고 손을 넣어 성적 욕구를 채워주는가 하면, 마을 술집의 남자를 유혹해 야산에서 성행위를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과거에 자신의 정신적 공황을 치료한 적이 있는 정신과 의사를 유혹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따금 남편의 병상에 들러 얀에게 자신의 매춘 행위를 들려주며 그의 회생을 간절하게 소망한다. 그녀의 이러한 일탈된 매춘 행위의 소문이 퍼지자 마을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그녀에게 돌을 던지기도 하고, 급기야 장로들은 그녀가 기도하러 교회에 오는 것조차 제지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멸시하고 경원하지만,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미망인 올케 도도만은 그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감싸 안아 보호하려 한다.
사랑과 종교적 자기정화의 역설적 비틀기
베스는 남편 베스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그동안의 자기희생이 혹시 부족하지는 않았나 하고 염려한다. 그래서 그녀는 극약 처방을 하기 위해 거대한 화물선에 승선하게 된다. 거기에서 그녀는 동물적인 선원들의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윤간 앞에 무릎을 꿇고 거의 초죽음 상태로 병원에 후송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남편 얀의 회생 여부를 올케인 도도에게 간절하게 질문하면서 숨을 거두게 된다. 이 대목에서 이 영화의 서사구조는 반전을 꾀하게 되는데, 베스가 숨을 거두자 남편 얀은 기적적으로 회생하게 된다. 사랑의 완성에 대한 그녀의 처절한 자기 파괴의 현실적 희생이 남편의 회생이라는 종교적 구원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인 ‘에필로그 장례식’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사랑과 구원, 그리고 종교적 자기정화의 함수 관계를 역설적으로 비틀고 있다. 때늦게 베스의 자기희생의 참뜻을 인식한 남편 얀은 그녀의 시체를 바꿔치기하게 된다. 마을의 교회에서는 정식 장례를 치루지 않고 그녀를 야산에 매장하며 베스가 지옥에 갈 것을 명한다. 그 자리에서 베스의 올케인 간호사 도도는 장로들을 향해 ‘당신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베스에게 욕할 권리가 없다’며 울부짖는다. 한편 남편 얀과 동료들은 그녀의 시체를 바다 위의 유정으로 운구하여 그곳의 바다에 투하한다. 그런데 그 후에 기적이 일어난다. 성난 짐승의 포효처럼 들끓던 바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며, 동시에 천상의 어디에선가 은은한 평화와 안식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영화가 끝난다.
연출자인 라스 폰 트리에는 이 영화에서 사랑과 구원의 참다운 의미는 무엇이며, 또한 종교적 자기정화의 의미에 대해 우리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종교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구원만이 종교의 궁극적 도달점이라고 역설하고 있는데, 그러한 거룩한 의미를 실천적으로 구원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교회와 신의 일꾼들은 현실적 도덕률과 윤리에 얽매이어 책임과 의미를 유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반문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신앙심이 누구보다도 깊은 베스는 사랑하는 사람의 회생을 통한 구원을 실천하기 위해, 종교적 도덕률이 금하고 있는 매춘의 방법으로 자기정화를 시도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도 전통적 인습과 제도, 그리고 종교의 도덕률은 그녀의 그러한 자기정화의 희생에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의 남편 얀은 어떻게 보면 종교적 도덕률을 상징하는 기제일지도 모른다. 그는 특이한 제안으로 그녀를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 영화의 제목인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파도를 헤치고’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의 ‘파도’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하나는 사랑의 완성과 구원을 위한 베스의 끊임없는 자기희생의 험난한 여정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베스의 숭고한 사랑을 위한 자기완성을 저지하고 방해하는 세속화된 종교의 모순과 질곡을 상징하고 있다.
종교적 자기정화를 통한 사랑의 완성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마 선언 작품인「브레이킹 더 웨이브」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사랑과 구원의 참 의미를 묻고 있는 작품이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인습적 고정관념에 대해 야유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창녀의 매춘을 통한 사랑행위는 무가치하게 보이고, 일반 남녀의 사랑은 가치 있을 것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창녀가 보통 남자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보통 남녀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아름답고 의미 있는 행위라고 생각해 오지는 않았는지 곰곰 되돌아 볼 일이다.
우리는 육체와 정신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육체는 더럽혀져 있는데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영혼만은 순수하고 아름답다면 어떻게 받아 들일 것인가. 그와 반대로 육체는 깨끗한데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진정의 마음이 더럽혀져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보면 육체는 아무 것이 아닐지 모른다. 영화의 여주인공 베스처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자기희생이 아름답고 강렬하다면 육체 하나쯤이야 더럽혀진들 뭐 어떠하랴 싶다. 그렇다. 문제는 마음이고 정신이고 영혼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아름다운 자기희생만 전제된다면, 그 정신을 감싸고 있을 뿐인 육체가 좀 더렵혀진들 어떠랴 싶다. 어떻게 보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자기희생은 종교적 자기정화나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사람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요구하고 있다. 사람을 만나거나 사귀고저 할 때는 표피로서의 육체인 겉모습을 보는 대신에,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음과 영혼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순수한가를 봐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그 사람의 겉모습만을 모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요즈음 젊은이들의 감각적인 사랑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첫 장면에 결혼이란 무엇이냐고 묻는 교회 장로들의 질문에 ‘결혼은 영혼과 영혼의 결합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베스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아직도 뚜렷한 잔상으로 남아 있다. 지상 위의 모든 가치들이 그녀의 모든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평화로운 종소리로 상징되는 신의 섭리만이 그녀의 행위를 자기 정화로 받아들인다는 마지막 장면이 아직도 뇌리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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