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스크랩] 문학에서의 스토리텔링의 중요성

tlsdkssk 2006. 2. 2. 06:59

문학창작반 강의 원고입니다.

아직은 미완성입니다만 강의의 편의를 위하여 올립니다. 수강생께서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추후 보완하겠습니다.

심후섭 올림

 

문학에서의 스토리텔링의 중요성
심 후 섭 /동화작가

 

1. 이야기의 어원에 대하여
서양에서는 역사를 가리켜 ‘history’라고 한다. 얼핏 ‘남자들의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는다. 사전에서 ‘story’를 찾아보니 ‘history’에서 두음이 소실되어 ‘옛날 이야기’ 또는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고 나와있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면면히 이어져 올만큼 가치를 지녔으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갈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story’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우선 가장 일반적인 것은 이야기(tale), 동화(fairy tale), 설명, 소문, 진실, 말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설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특히 단편 소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그리하여 ‘a detective story’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탐정 소설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소설, 시, 극본의 줄거리, 구상, 각색, 영화 시나리오를 가리키기도 하고 경력, 신상, 얘기(이바구), 내력, 일화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구전, 전설, 기사거리, 역사적 사실 등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어린이 세계에서는 거짓말을 뜻하기도 한다.
‘storyart’라고 하면 언어적 요소와 시각적 요소를 결합시킨 예술 형태(주로 미술 작품)를 가리키고, ‘storyline’이라고 하면 줄거리 혹은 그 구성(plot)을 뜻한다.
이처럼 ‘story’의 쓰임은 다양하며, 그만큼 인간의 정신 세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story’에 해당되는 우리말에는 이야기, 얘기, 이바구 등이 먼저 떠오른다. 사전을 아무리 찾아봐도 이야기에 해당되는 한자어는 보이지 않는다. 사전을 찾아보니 ‘이야기’를 나타내는 한자어가 보이지 않는다. 이곳 저곳 찾다보니 <한국문화사대계>라는 책에 유일하게 조선 전기의 명사(名士)․기인(寄人)들에 관한 일화를 설화식(說話式)으로 기술한 책의 제목에 <이야기책 (利野耆冊)>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나와 있었다. 이 <이야기책>의 ‘利野耆’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利)’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이롭다’는 뜻은 포함되어 있는 것 같고, ‘늙은이, 어른, 스승’의 뜻을 가진 ‘기(耆)’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가르침, 지혜’와 같은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들판을 뜻하는 야(野)가 어떻게 하여 가운데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해석하기 힘들었다.
‘이야기’라는 말의 어원(語源)에 대해서 서정범(徐廷範) 교수는 경상도 사투리인 ‘이바구’에 근거하여 ‘입’과 ‘아구(吻)’의 합성어로 제시하고 있다. 즉 이바구→이와구→이야구→이야기로 변화했다는 추론이다.
이에 반론할 능력은 없지만 나는 감히 ‘이야기’를 ‘이어약(耳語藥 혹은 利於藥)’이라는 한자말에서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더니 어느 노 선사께서 ‘굳이 한자어를 찾아 그 뜻을 분명히 하고 싶다면 혹시 귀로 먹는다는 약이라는 뜻을 가진 이어약(耳語藥)이 변한 것은 아닐까?’하는 가설을 던져 주셨던 것이다. 몸의 병을 고치는 약(藥)을 입으로 먹지 않고 귀로 먹는다면 그것은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며, 이것은 마음의 병을 고치는 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 ‘耳語藥’에서 나아가 ‘利於藥’이라고 한다면 ‘입으로 먹는 약보다 더 이로운 약’이라고 억지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참으로 엄청난 견강부회(牽强附會)이기는 하지만 나는 감히 ‘귀로 먹는 약’과 ‘입으로 먹는 약보다 더 이로운 약’에 더 큰 무게를 주고 싶다.

 

2. 이야기의 기능

“자, 이리 와. 내가 너에게 이야기를 들려줄게.”
이 말만큼 모든 사람들에게 정답게 다가가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도의 정신 세계를 열어줄 뿐만 아니라, 보다 허용적인 새로운 인간 관계를 열어준다. 특히 정신의 발달에 있어서 급성장기에 있는 학생들 즉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갈구하고 있는 어린 학생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는 가치관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심성을 맑게 하는 모든 예술의 밑바탕에는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다. 음악과 이야기가 만나서 오페라가 되고 노래가 되며, 이야기와 색채 그리고 조형물이 만나면 미술 작품이 된다. 이야기와 몸짓이 만나면 무용이 되고 행위 예술이 된다. 문학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이야기의 결집체이다.   
이야기는 모든 예술의 뿌리가 된다. 이야기에 멜로디와 리듬을  입히면 음악이 되고, 형상과 색깔을 입히면 미술이 된다. 이야기에 몸짓을 붙이면 무용이 되고, 글자를 붙이면 기록 문학이 된다. 예술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가치 체계이다.
이야기는 가장 오래 된 교육 수단이었다. 고대인들은 동굴 속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통해 삶의 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어디에 가면 먹을 것이 많으며, 어떻게 하면 위험하다는 귀중한 정보를 이야기를 통해 나누어가졌다. 위험한 물가에 함부로 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이시미를 만들어 내었고 용을 만들어 내었다. 그 이시미가 하늘을 날 수 있는 용이 되기 위해서는 천 명의 사람을 잡아먹고 천 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상상력이 보태어지면서 그 이야기는 마침내 본격 예술의 골격을 갖추게 된다.
이야기는 불안한 정서를 치료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너뿐만 아니고 어디에 누구도 그런 일을 당하였는데…….’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현대 심리 치료 기법 중의 하나인 합리적 정서 치료(RET)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야기는 모두를 화합의 마당으로 이끈다. ‘이리 와, 내가 너에게 이야기를 해 줄게.’라는 말보다 더 허용적이며 포용적인 말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갸기는 또한 최고의 오락 수단이 될 수 있다. 이야기꽃, 이야기꾼, 이야기판이라는 말이 이를 증명한다. 이야기만큼 다양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오락도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다소 세속적인 면도 살펴보자.
이야기를 잘 하면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다. 옛 그리스의 이솝은 이야기를 잘 꾸몄기에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셰익스피어는 극장 문지기에서 귀족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동화의 왕 안델센은 고향에조차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지만 백작의 칭호를 받았으며,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슐리만은 이야기를 믿은 덕분에 건축자재상 점원에서 대고고학자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야기를 잘 꾸미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 수도 있다. 우리가 즐겨보고 듣는 연속극 작가는 돈을 많이 번다. 베스트 셀러 작가도 돈을 많이 번다. 좋은 영화나 연극 대본 작가도 돈을 많이 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야기를 잘 꾸미는 사람들이다.
이야기는 유익하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다 책에서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면(面)대 면(面) 즉 face to face에 의한 인간적인 교감을 이루는 가운데 듣는 이야기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3. 이야기의 원형과 문학적 수용

 

가. 비극과 인간의 한계
- 뻐꾸기가 된 형제

바야흐로 5월 사랑과 은혜의 계절이다. 더러 뻐꾹새가 울음 소리가 들려올 법도 하다. 뻐꾹새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느 곳에 부모님을 일찍 여읜 형제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형은 돌림병 끝에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었고, 동생은 몸이 몹시 약했다. 형은 집에 있고, 동생은 마을을 다니며 먹을 것을 구하여 형에게 주었다.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 구하기가 몹시도 어려웠다. 그러나 동생은 주린 배를 참고 먹을 것을 구해 형을 봉양하였다.
“넌 왜 먹지 않니?”
형은 먹을 것을 구해 오기만 하고 먹지는 않는 동생을 이상하게 여기고 물었다.
“응, 나는 건넛마을 잔칫집에서 많이 먹었어.”
“이상하다. 그 마을에는 매일 잔치가 열리느냐?”
“응.”
“그렇다면 어디 네 팔 한번 만져보자. 음식을 많이 먹었다면 팔도 굵을 테지?”
순간, 동생은 움찔하였습니다. 동생은 얼른 제 다리를 내밀었다.
자기의 팔이 가느다란 줄 알면 형이 실망을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형은 동생의 다리를 만지며 생각하였다.
‘아니, 이 녀석 봐라. 팔이 거의 내 다리만큼이나 굵네. 이 나쁜 놈, 정말 자기만 많이 먹고 나에게는 부스러기나 갖다주었구나.’
“그럼, 너 내일 나하고 같이 건넛마을로 가자."
형이 따라 나서겠다고 하였다.
“안 돼, 형은 힘들어서 고개를 넘지 못할 거야.”
동생은 음식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형이 알게되면 미안해 할까봐 둘러댔다. 그러자 형은 자기도 몰래 욱하는 마음으로 동생의 목을 누르고 말았다. 동생은 먹은 것이 없어 힘이 없었으므로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참을 지나도 동생이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자 형은 더듬더듬 동생의 팔을 만져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내 동생 팔이 이렇게 가늘 수가! 아까 만진 것은 동생의 다리였구나. 나의 욕심이!”
그 후, 형은 동생을 부여안고 울다가 함께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후, 두 형제는 뻐꾸기가 되었는데 봄철이면 앞산 뒷산에서 서로를 애타게 불러댄다고 한다.

이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이지만 지방에 따라 건너 마을 잔칫집 대신 마(山藥)가 등장하고 뻐꾹새 소리도 뻐꾹뻐꾹 대신에 호또호또, 소쩍소쩍, 포복포복이 등장하기도 한다. 모두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 들리는 것이다.
우리 산천의 뻐꾸기 울음소리를 ‘포복포복(飽腹)’으로 표현했다고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역시 위와 같은 슬픔 전설이 바탕에 자리하고 있다. 눈먼 형과 함께 사는 동생이 산마를 캐와 큰 것은 형을 먹이고 작은 것은 자기가 먹었는데 형은 작은 것만 주는 줄 알고 성서 속의 카인처럼 동생을 죽이게 된다. 그 후 진심을 알게 된 형이 평생을 후회하며 살다 죽은 후 뻐꾸기가 되어 마를 많이 캐 배부르게 해주겠다며 배부를 포(飽), 배 복(腹)을 써서 ‘포복포복’하고 울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형제의 모습은 바로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좀더 가지려다가 끝내는 파국을 맞고야 마는 오늘날 우리 둘레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좋은 가르침이 될 것이다.

 

나. 시각의 대승화 
- 자식을 바른 길로 인도한 어머니

지금은 또한 어버이의 은혜에 더욱 감사드리는 5월이다.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한 자루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나라에는 예부터 훌륭한 어머니가 많이 있어 왔다. 스승으로서 어머니로서 훌륭한 분으로는 주로 학자 이율곡의 인성을 길러낸 신사임당, 성리학자 서 성(徐 省)의 충의를 길러낸 어머니 이씨 그리고 명필을 길러낸 한석봉의 어머니를 든다.
이들이 명사가 되었기에 어머니가 훌륭한 스승으로서의 위치를 드러난 것일 뿐 그에 못지 않은 어머니 스승은 매우 많다. 조선 순조 때, 호조판서 김좌명(金佐明)대감의 신변 심부름을 하던 몸종 최 수(崔 戍)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이다.
최 수는 평소에 착실하고 면학열이 높아 글을 익히고 글씨도 곧 잘 썼으므로 상전인 김좌명은 그를 호조(戶曹)의 서리로 임용하였다. 그 덕분에 최 수는 육의전에서 큰 전을 벌리고 있는 부잣집으로 장가도 들고, 살림도 넉넉해졌다. 하인의 신분에서 장가까지 가고 벼슬까지 하게 되었으니 대단한 신분 상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차츰 해이해지더니 뱅어국도 입맛이 없어 밥을 못 먹겠다고 물리기까지 하였다. 뱅어국은 당시 상류사회에서만 먹을 수 있는 고급음식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최 수의 과부 어머니는 상전인 판서 대감을 찾아갔다. 자식의 발탁을 감사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대감님의 보살피심으로 일자리 얻은 것만으로도 과분한데, 그 덕으로 부잣집 사위까지 되어 호의호식하면서 뱅어국 자반도 맛없다 할 지경이 되었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옵니까? 사정이 이러 하온데 나라의 큰 재물을 주무르는 호조의 서리 자리에 오르면 방만함이 더하여 행여 옥에 갇히는 일이 없다할 수 없는 노릇이옵니다. 오로지 그 혈육 하나에 의지하고 살아온 천한 과부를 보살피시는 뜻에서 그저 조석으로 죽이나 끓여먹을 수 있는 자리에서 제 분수를 지키도록 해주십시오.”
한낱 상민이요, 과부 어머니로서의 상식을 초월한 자식 사랑에 감탄한 대감은 이 어머니의 뜻을 받아들이고 이 일을 적어 가문의 딸이나 며느리를 가르치는 규방 교훈으로 전하게 하였다.
이는 맹자를 가르치기 위해 정서에 악영향을 주는 묘지 동네에서 저자 동네로 다시 저자 동네에서 글 읽는 서당 이웃으로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을 웃도는 훌륭한 어머니 상이 아닐 수 없다.
 
다. 가치갈등과 인간의 행동
- 효불효다리 전설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면 효자 이야기도 나와야 할 것이다.
가까운 경주 지망에 효불효설화(孝不孝說話)를 들어야 할 것 같다. 이 셜화는 일곱 아들이 홀로 된 어머니를 위하여 다리를 놓는다는 내용의 설화로서 경상북도 경주 지역에서 전승되는 교량전설(橋梁傳說)이다. 효불효다리․경주칠교전설(慶州七橋傳說)․칠성교전설(七星橋傳說)이라고도 한다.
효불효교는 경주부 동쪽 6리 되는 곳에 있는데, 신라 시대에 아들 일곱을 둔 홀어머니가 그 아들들이 잠든 틈에 남자를 만나러 다녔다. 어느 날 어머니가 추운 겨울에 신발이 젖은 채 돌아온 것을 아들들이 알고 서로 의논하기를 “어머니가 밤에 물을 건너 다니시니 자식의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고 이에 돌다리를 놓았다. 어머니는 부끄럽게 여기고 야행(夜行)의 나쁜 버릇을 고쳤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 다리 이름을 효불효교라고 불렀다.
구전설화에는 이 다리를 일곱 아들이 놓았다고 해서 ‘칠성교’라고 하기도 하고, 일곱 개의 돌을 놓아 만든 다리이기 때문에  ‘칠성교’ 또는 ‘칠교’라고 한다고도 전한다. 또한, 어머니에게는 효성스러운 행위이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불효가 되는 일을 한 것이라 해서 ‘효불효교’라고 한다는 해석도 있다.
민간에 전하는 속신(俗信)에 자식 없는 여인이나 젖이 적은 여인이 이 다리의 교각(橋脚)에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고, 또 짝사랑으로 고민하는 여인이 이 돌에 빌면 상대방에게 그 뜻이 전달된다는 전설도 전하고 있다.
이 설화는 사회의 기본 윤리 강목이었던 효를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자료로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부계의 혈연이 강조되고 가문 보존이 최우선이던 조선조 사회에서 홀어머니의 밤나들이는 인정될 수 없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머니이기 전에 한 인간이고 여인이기에 일곱 아들이 어머니의 행위를 비난하지 않고 편의를 제공하였다는 것은 굳어진 효의 관념을 부정하고 인간성을 긍정하였다는 면에서 설화 향유층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본능적 욕구가 강하였던 어머니는 다산(多産)과 풍요의 상징이 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자식 못 낳는 여인이나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기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 설화는 상층 사회의 윤리 강령보다는 평민의 삶의 원리가 반영된 자료라고 볼 수 있다.

 

라. 도덕률과 인간성의 한계
- 효자리 전설

몇 해 전 어머니는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셨다.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에 우리 형제들은 틈이 나는 대로 병원을 드나들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힘들어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 여러 궁리를 했지만 생각만큼 되지 않았다.
병상을 지켜보고 있자니 문득 옛날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한 자루가 생각났다.
어느 곳에 앞을 보지 못하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이 노인이 어느 날 이불을 개어 얹는다는 것이 그만 잠들어 있는 손자 위에 얹고 말았다. 제대로 먹지 못한 어린 손자는 힘이 없어 이불 밑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여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가난한 아들 내외가 들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귀까지 어두운 이 노인은 아무 것도 모르고 다시 잠들어 있었다.
며느리는 조용히 죽은 아들을 안고 밖으로 나와 집에서 멀리 떨어진 밭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죽은 아들을 부여안고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에이그, 이 녀석아! 왜 하필이면 거기에 누워 할아버지께 걱정을 끼쳐드리느냐?”
마음씨 착한 이 며느리는 아들을 죽게 한 시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는 도리어 죽은 아들을 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아버지가 자신의 잘못으로 손자가 숨을 거두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애쓰는 것이었다.
후에 이 소식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그 며느리를 크게 칭찬하고, 나라에는 정문을 세워주었다.
그 때부터 이 마을은 효자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는 곳곳에 효자리(孝子里), 효자동(孝子洞)이 있다. 그만큼 효자가 많았다는 것이기도 하고 그만큼 효도를 권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비해 늘 직장을 핑계로 잠시 병원에 들렀다가는 물러나고 말았던 나는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가.
 
마. 사려성과 정교성
- 스승의 길

5월은 스승의 날이 들어있는 달이기도 하다. 옛날보다는 그 위상이 많이 보잘 것 없어졌지만 스승은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말을 냇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사람의 행동을 억지로 강요한다 해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교훈을 준다. 이 말은 또한 ‘학생들에게 배우고 싶어하는 욕심이 일어나게 하지 않고 억지로 가르치려고 하는 선생은 마치 무쇠를 두드리는 것과 같다.’라는 말과 뜻이 통한다 하겠다.
옛날 어느 깊은 산골에 늙은 도사 한 분이 어린 제자와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 여름 날 두 사람은 탁발을 하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앞서가던 도사는 몇 발자국 옮긴 뒤에는 짚고 있던 지팡이로 땅바닥을 쿵쿵 굴리며 가는 것이었습니다.
‘거참 이상하다. 왜 우리 선생님은 조금 가시다가는 저렇게 지팡이로 땅바닥을 쿵쿵 굴리실까?’
이렇게 생각한 어린 제자는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얘야, 내가 이렇게 지팡이로 땅바닥을 쿵쿵 굴리는 까닭을 모르겠느냐?”
“네.”
“그럼 어디 십 리만 더 걸어가 보자꾸나. 그러면 생각이 날 것이다.”
선생님은 제자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십 리를 더 걸어갔다. 날씨가 더워서 이마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어린 제자에게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선생님은 도대체 왜 지팡이를 구르실까? 심심해서일까? 걸어가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중심을 잡기 위해서일까? 참, 알 수가 없네.’
어린 제자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얘야, 십 리를 다 왔다. 그래도 아직 모르겠느냐?”
“네,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십 리만 더 걸어 가보자.”
선생님은 여전히 지팡이로 땅을 쿵쿵 치면서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어린 제자는 또 부지런히 뒤따라갔다. 그러다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렇구나!’
어린 제자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무릎을 탁 쳤다.
“아, 선생님. 이제 조금 짐작이 갑니다. 선생님께서 땅을 구르시는 까닭은…….”
“그래, 내가 왜 땅을 구른다고 생각하느냐?”
“네, 선생님께서 땅을 쿵쿵 울려서 길섶에 있는 곤충들이나 뱀에게 우리가 가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지요?”
그 제서야 선생님은 돌아서서 어린 제자를 번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래. 잘 알아내었다. 내가 이렇게 땅을 쿵쿵 굴리면 곤충들이 함부로 우리 앞길에 뛰어들지 않을 것이야. 공연히 죄 없는 곤충들을 밟아 죽여서는 안되지 않겠니? 그래서 우리가 신고 있는 이 짚신도 오합혜(五合鞋)라고 해서 엉금엉금하게 해서 신는 거란다.”
선생님은 어린 제자에게 더욱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만약 선생님이 바로 답을 가르쳐 주었더라면 어린 제자의 기쁨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며, 또 오래 그 답을 기억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답을 스스로 알아내었기 때문에 어린 제자의 기쁨은 그만큼 더 컸고, 더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처럼 배우는 학생들이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배려해 줄줄 아는 것이 교사에게는 매우 필요한 일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다. 앞에서 잠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학문을 크게 이루려면 스승도 훌륭해야 하지만 배우는 학생도 훌륭해야 한다. 학생들이 훌륭하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쉬운 작은 것을 배우고도 크게 깨닫기 때문이다. 똑같이 배웠는데도 어떤 사람은 크게 느끼는데, 어떤 사람은 전혀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이것을 보면 배우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옛날 어느 작은 암자에 노스님과 청년 스님이 함께 도를 닦고 있었다. 청년 스님은 노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어느 따뜻한 봄날, 노스님은 청년 스님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날씨가 화창하니 바람도 쐴 겸 개울가에서 밥을 지어 부처님께 공양하도록 하자. 네가 먼저 가서 솥을 걸어두어라.”
“네.”
노스님의 분부를 받은 청년 스님은 개울가에 가서 돌멩이 세 개를 모아놓고, 그 위에 솥을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노스님에게 달려와 돌멩이 셋을 모아놓고 그 위에 솥을 얹어 준비를 해 놓고 왔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노스님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수고했다. 어디 다시 가서 고칠 점이 없는지 한 번 더 살펴보고 오너라.”
 청년 스님은 이 말을 듣고 다시 냇가로 달려갔다.
‘아, 돌멩이만 모아놓고 솥을 거니 바람에 불기운이 흩어지기 쉽구나.’
이렇게 생각한 청년 스님은 불기운이 흩어지지 않도록 돌멩이와 돌멩이 사이를 흙으로 메웠다.
일을 마친 청년 스님은 다시 달려와 노스님께 고하였다. 그러자 노스님은 다시 가보라는 것이었다.
“어디 다시 가서 또 고칠 점은 없는지 살펴보거라.”
이 말을 들은 청년 스님은 다시 달려가서 이번에는 굴뚝을 만들었다. 굴뚝을 다 만들고 돌아온 청년 스님은 다시 노스님께 굴뚝까지 만들었다고 고하였다.
그러자 노스님은 이번에도 더 고칠 점은 없는지 또 가보라고 하였다. 청년 스님은 다시 달려가 골똘히 생각한 끝에 부엌 바닥의 흙을 긁어내었다. 그래야만 잉걸불이 많이 모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청년 스님은 다시 노스님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그때마다 노스님은 또 고칠 점이 없는지 생각해 보라며 무려 아홉 번이나 되돌려 보냈다. 청년 스님은 그럴 때마다 웃으면서 달려가 고치고 또 고쳐서 웬만한 집 부엌보다 더 훌륭하게 솥을 걸고, 또한 돌을 주워 모아 식탁까지 만들었다.
아홉 번이나 일을 시킨 다음에야 솥을 보러 온 노스님은 그 청년 스님을 칭찬하며 말했다.
“그래, 잘 했다.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아홉 번이나 솥을 고쳐 걸었다. 내가 그대에게 잘 참고 해내었다는 상으로 구정(九鼎)이라는 법명을 내리겠노라.”
이리하여 이 청년 스님은 ‘아홉 솥’이라는 뜻을 가진 구정 선사로 불리게 되었다.
그까짓 솥을 거는데 무슨 아홉 번이나 손이 가겠나 싶지만 아홉 번이나 솥을 다시 거는 과정을 통해 세상의 이치는 물론 참을성까지 배우게 된 것이다. 우리의 배움도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참고 견디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청년 스님이 중간에 싫증을 내었다면 그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작은 일이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일이었고, 스승은 바로 그것을 가르치는 분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 구정 선사는 집안이 가난한 탓으로 일찍이 등짐장수로 나서서 돈을 꽤 모았다. 그러나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판단한 청년은 당시 고명하신 이 무염(無染) 선사를 찾아나셨던 것이다.
“부처님이란 무엇입니까? 어디에 있습니까?”
이 물음에 무염선사는 “즉심시불(卽心是佛), 네 마음이 곧 부처이니라.”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이 떠꺼머리 총각은 자기 마음이 부처라는 데에 수긍하지 못하고, 즉심시불에만 마음이 갔다. 그리하여 ‘짚신이 곧 부처’라고 생각하고, 짚신을 아주 귀하게 여기며 짚신을 통해 사유의 폭을 넓혀 나갔던 것이다.
무염 선사 또한 신라의 왕족으로서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벼슬자리에 나아가 새속적인 부귀를 누릴 수도 있었지만 일찍이 깨달은 바 있어 중국으로 유학을 하고 돌아온 분이었다. 중국에서 문명을 날렸으나 그 또한 세속적인 명예라고 생각하고 귀국하여 상주의 한 골짜기를 찾아 들어가 겨우 눈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움막을 지어놓고 양지에 앉아 자신의 피를 이에게 나누어주는 수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아니 할 수 없다.   
일찍이 역사상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꼽히고 있는 공자(孔子)의 언행을 기록한 책 논어(論語)에는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알면 능히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 즉 이미 나와 있는 지식을 익힌 다음에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그리고 지식을 이해한다고 함은 어떤 사실을 단순히 암기만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역시 같은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사실을 암기만 해서 얻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남의 스승의 될 자격이 없다.’

 

바. 기다림과 한의 미학
- 질마재 전설 속의 ‘신부’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은 문학 작품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 할 수도 있다. 알게 모르게 이야기가 들어가야만 작품으로서의 형상화가 가능한 것이다.
소설은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니던가? 시(詩)에서도 이야기를 수없이 찾아낼 수 있다. 서정주 시집 <질마재 神話>(1975)에 나오는 ‘신부(新婦)’를 읽어보자.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잡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시집 <질마재 神話>의 맨 첫머리에 실린 작품이다. <질마재 신화>는 미당(未堂)의 문학이 원숙기에 접어든 시기에 간행된 시집으로서 초기의 퇴폐적, 상징적 '원죄 의식(原罪意識)'에서 벗어나 '신라'와 '불교'에 대한 관심을 거쳐 가장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정취에 몰입한 시기에 간행된 것이다.
이 시집에 담긴 대부분의 시는 대체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내용도 그야말로 보편적인 한국인의 질박한 삶 그 자체를 담고 있어 가장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신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산문적 내재율이 돋보이는 이 시는 짤막한 이야기 속에 한 여인의 인생 전체를 담아 놓은 서사적 구성이 그 원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한국 여인의 매운 절개를 놀랍도록 담담하고 짧은 이야기체로 엮었다. 이 시가 이야기체로 되지 않았으면 첫날밤에 소박을 맞은 여인의 한을 강렬하게 담고 있으면서도 전혀 괴로움과 한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묘한 안정감을 줄 수 있었을까?
육(肉)의 세계를 넘은 영(靈)의 세계에 존재하는 이 ‘신부’의 의식은 이야기를 통해 교묘한 토속적 심미 의식(審美意識)을 발현시킨 작품으로서, 백제시대 가요 ‘정읍사’와 관련된 망부석 전설, 신라시대 박제상의 아내가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치술령 고개 위에 선 채로 돌이 되었다는 전설과 대비되어 새로운 이미지가 형성된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신부의 수동적이고 침착한 기다림과 신랑의 조급성이 대립됨으로써 처절한 비극이 유발되고 있는데, 이 점이 문학적으로 텐션을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옷자락이 돌쩌귀에 걸린 것을 신부가 음탕해서 잡아당기는 것으로 오해한 신랑에게 신부는 40~50년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저항으로 맞서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다림은 자기 소멸이라는 더 큰 비극을 가져오게 된다. 40~50년이란 그 긴 세월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우연히 들른 신랑의 손길이 닿고서야 '매운 재'로 내려앉는 신부의 소리 없는 반항이 나타나면서 비로소 신랑은 ‘안쓰러운’ 뉘우침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철저한 속물적 근성의 신랑에 대비되는 신부는 전통적인 윤리관을 대변하는 ‘일부종사(一夫從事)’라는 현세적․육체적 세계를 초월하는 영적(靈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매력적인 이야기가 문학작품을 어떻게 방향 지우는가에 대한 좋은 작품이라 하겠다.


 

4. 맺는 말

本立道自然

출처 : 문학에서의 스토리텔링의 중요성
글쓴이 : 심후섭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