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편지(9월1일)
이은영님…
코스모스를 유난히 좋아하는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의 문턱에서 기자님이 보내주신 시집을 받고 반가움에 내리 몇 번을 읽었지만 시를 좋아하는 나도 절망 속의 독서여서 그런지 마음에 그리 와 닿지만은 않네요.
작년까지만 해도 가족, 그리움, 만남… 이런 단어들이 많이 생각되곤 했는데 보내주신 시집에선 유독 「이별」 이라는 시를 되풀이해서 봤습니다. 이제 세상의 모든 인연과 이별해야 하는 시점에서 미리미리 떠날 준비를 해야 되거든요…
전 양치질 하기 전엔 절대 잠을 못 자는 습관이 있는데 요즘은 그냥 자게 되더라구요. 이제 이 육신에 대한 미련도 함께 버리려고 슬슬 준비하는 거죠…
기자님의 편지를 받고 이 노래! 하며 놀란 것은 중고등학교 시절, 이수만의 「행복」을 같이 부르고 다녔던 같은 세대 (70. 4. 18) 더라구요. 사실, 제 또래 애들은 그런 노래 별로 안 부르던데 신기하네요. 제일 먼저 기타코드를 외웠던 「행복」은 저의 애창곡 1번이에요. 가난에 한탄하며 행복을 이상적으로 그린다는 저의 처지와 비슷해 여기저기 그림과 함께 자주 습작했었던 소중한 노래랍니다.
그리고 「아침이슬」, 「나뭇잎 사이로」, 「제비꽃」 등도 좋아하고 「사이먼과 가펑클」, 「소지로」, 「야니」 음악도 많이 좋아한답니다. 전 刑場에서 찬송가나 불경이 아닌 「아침이슬」을 부를까 하는 생각도 해봐요.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우습죠? 건방지게 노래나 부르면서 가겠다니…
어젠 봉원사 현장에 다녀왔어요. 근데 꼭 찾아주고 싶은 사람들은 못 찾고 왔지 뭐에요. 저도 이제 氣가 빠지고 나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찾지 못한 원혼들이 꿈속에 나타나더라구요. 왜 자기들은 안 꺼내 주냐고… 유독 나와 많은 얘기를 나눴던 사람, 눈물을 많이 보였던 사람, 동거하자고 했던 사람까지도 모두 찾지 못했어요.
어차피 저는 처음부터 원혼들을 달래주려고 모든 자백을 결심하게 됐는데 그 사람들이 싸늘하게 묻혀 있을 걸 생각하니 많이 안타까웠고 다시 못 올 현장을 떠나면서 그 사람들이 자꾸 제 발목을 잡는 것 같아서 정말 마음 아팠습니다.
저도 양심이 찔려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는데, 이제 나도 기억에 한계가 오는 것 같군요. 사람들은 나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라 합니다. 기독교 잣대로 보면 전 무조건 지옥으로 가야죠. 저라고 왜 양심이 없겠습니까.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 못난 인간 너무나 부끄럽고 죄스러워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뿐입니다…
어제 현장에선 모자를 쓰고 다녔어요. 사람들이 왜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다니냐고 욕을 하는데 사실 제가 얼굴을 드러내놓지 못하는 건 제 하나뿐인 아들 녀석 때문입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잘 놀아주던 아빠가 갑자기 소식이 끊겨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텐데 주위에서 TV보고 『네 아빠다』 할까봐서요. 아들 녀석 친구 부모님들을 많이 알거든요. 친구들과 함께 여기저기 하도 데리고 다니느라 제 얼굴을 기억할 텐데 TV에서 보고 혹시나 애들 부모님이 「왕따」 같은 따돌림을 줄까 걱정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뻔뻔하다 어떻게 저리도 당당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욕도 많이들 하시는데 그래도 전 갈 때까지는 씩씩한 모습 보이고 가려고 합니다. 밝힐 거 모두 깨끗이 밝혀 원혼들의 한을 달래주고 싶습니다. 제 아들 이름도 그래서 ♥이랍니다. 오직 굳세고 건강하게 크라고 제가 직접! 지어줬었는데… 이제 모든 걸 놓아야 되는데 한 오라기 희망이었던 아들 녀석을 정말 잊을 수 있을는지 자신이 없네요…
기자님, 솔직히 저처럼 행복한 놈도 없을 겁니다. 제 나이에 비해 해보고 싶은 거 많이 해보고 개처럼 살았지만 맘대로 살다 가는 세상이잖아요. 뭐가 미련이 남겠어요. 사람들이 화가 치민다고 나처럼 한다면 이 세상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이러니 하죠? 저도 이 밑도 끝도 없이 나오는 분노와 증오심이 도대체 저의 어디에서 나왔는지 기가 막힐 뿐입니다. 제가 마천루 같은 꿈을 꿔온 것은 아닌데 이렇게 말종의 인생으로 막을 내려야 한다는 게 참으로 슬플 뿐입니다…
언젠가 아내와 김치 하나에 맨밥을 물 말아 서로 웃어가며 맛있게 먹던 기억이 갑자기 생각나네요. 빌딩 몇 개씩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 맛과 행복을 알까요… 전 그리움이 있으면 마음만으로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출소 후에도 계속 처자식 주위를 맴돌았던 건데…
올 봄에 처자식과 찜질방에 같이 갔었는데 아내가 많이 변했더라구요. 원래 미모는 없는 여자였지만 눈가의 주름과 없어진 허리, 고생이 역력한 여러 모습들… 유난히 키가 작아 보여 가슴 아파했던 기억이 나는 군요. 세련되지도 않고, 이쁘지도 않고, 돈도 없고, 몸도 아프고… 처음부터 그런 사람 좋아하며 아름다운 사랑 꿈꿔왔는데… 낡은 영화필름 끊어졌다 이어졌다 했던 것처럼 그 사람 정말 오랜시간 기다리며 생각하곤 했었는데…
영화 「클래식」을 보셨는지요. 전 그걸 DVD로 사서 몇 번을 봤는데 볼 때마다 사내놈이 굵은 눈망울을 떨구며 봤던 영화랍니다. 저 같은 끔찍한 인간이 그런 멜로영화 좋아한다니 이상하죠? 「라스트 콘서트」라는 영화도 학창시절 펑펑 울며 봤던 기억을 못 잊어 힘들게 구해 소장까지 했을 정도로 멜로 영화를 좋아했었거든요… 현실에 충실하며 열심히 사는 것도 좋지만 그런 아름다운 옛 추억 잘 간직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취재 때문에 바쁜 나날 보내겠지만 언제 짬나면 인사동에 있는 「옛날 옛적에」라는 가게에 한번 들러보세요. 인사동 거리 중간쯤 2층에 있는데 매번 갈 때마다 추억에 젖는 기분이 잔잔하게 좋더라구요. 지난 세대들에게 향수를 일으키게 하는 물건들이 많더군요. 딱지, 구슬, 종이인형, 태권V, 물체 채집 주머니…
저는 학창시절에 모나미 볼펜의 수명이 오히려 참 짧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뭐 좀 습작하다 보면 떨어지곤 해선 20원 하는 볼펜심만 몇십 개씩 사놓곤 했었거든요…
외로움이 커서 살인을 계속 멈출 수 없었던 놈이 이제 행동까지 부자연스러운 꽉 막혀버린 이 공간에서 곱씹을수록 쓴맛밖에 없었던 인생을 되돌아보니 저는 참 염세적이고 비관론적으로만 살아온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상처만 남겨 숯검댕이가 되어버린 제 인생 지긋지긋하고 이제 하루빨리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군요. 어떻게 하겠어요. 절망 속에서만 살아왔으니 당연한 결과지만 한편으론 모든 걸 업이라 생각하니 그냥 받아들여지기도 하네요…
보내주신 한자책도 잘 받았는데 사실 전 제 압수품에 한자 1급 책이나 여러 전문서적들이 많았듯이 못 배운 자격지심 때문에 이런저런 공부를 좀 해왔습니다. 한자도 2급은 따고 1급 준비 중이었고 일본어도 1급 가이드 준비 중이었고 영어나 컴퓨터도 남들 하는 만큼 조금씩은 배워뒀거든요. 나중에 재결합해서 아들과 살게 되면 직접 가르쳐 주려고 열심히 배워 둔건데…
기자님, 책 하나 부탁드릴까 하는데요. 차 변호사님이 보여주신 건데 「살인범의 추억」이란 제목으로 제 얘기가 실린 「시사저널」이에요. 좀 지나긴 했는데 구할 수 있으면 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인터넷에 얘기가 많이 올라갔다는데 안 좋은 리플도 괜찮으니 출력해서 좀 부탁드립니다. 바쁘신데 죄송해요. 애들 같은 부탁이나 드려서…
어제 어느 신문사 기자가 뭐 물어 보길래 『월간조선 이은영 기자는 안 왔느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어떻게 아는 사이냐』 그러기에 『그냥 편지 주고 받는다』 그랬습니다. 마음 상해하진 마십시오. 검거되어 많은 사람들이 왜 그랬는지 궁금해하며 많이들 물어보는데 정신이 없었지만 오히려 반가울(?) 정도로, 외로움에 많이 굶주렸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 있다는 걸 느껴보고 싶었으니까요…
10월 초엔 공주 치료 감호소로 이 썩어빠진 머리 감정받으러 갑니다. 감정가격이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답장 보내드릴게요.
제비꽃의 꽃말이 「그리움」이래요. 모나미 시절과 하늘로 떠나보낸 F-5E 친구 기억하는 시간 가져보세요. 취재 수고하시고 안녕히 계세요.
04. 9. 1
유 영철
⊙ 세 번째 편지(9월4일)
이은영님…
기자님들의 수입도 박봉인 걸로 알고 있는데 책들을 이렇게 보내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부터 드려야겠네요…
「얼굴 빨개지는 아이」 라는 그림도서를 읽고 동질감을 같이할 수 있었던 그런 친구하나 제대로 사귀어 놓지 못했다는 게 아쉽고, 「인생 참 헛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은 「LAST」 를 의미 있게 읽고 있습니다. 책 속에 빠져 있을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편지하는 거나 책장 넘기는 거나 마음의 위안을 찾는다고 하는 건데 잘 안 되네요.
차 변호사님에게 기자님 편지 자주 온다는 말하지 말라 하셨는데, 그 전에 『이 기자님이 어떤 사람이냐 내 사생활 까놓고 얘기해도 되느냐』는 식으로 물었는데 친분관계도 없다며 난색을 표하시더라구요. 하지만 전 그런 거 그렇게 개의치 않으니 부탁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敎人들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나 의아해하셨죠? 사실 전 많은 시간 성경책을 끼고 살았을 정도로 기독교를 많이 의지 했었습니다. 저의 옛날 스케치 그림들을 보더라도 유난히 기도하는 모습들이 많은 것도 그런 점을 많이 나타내는 거겠죠.
제가 첫 징역을 받을 때 저는 경미하다고 생각되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기타 살 돈이 없어 옆집 누나의 기타를 훔쳤지만 나중에 돌려주고 용서도 받았습니다. 법정에 섰을 때 손에 조그마한 木(목)십자가를 하나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 나오지 못했습니다.
목십자가를 부러뜨리며 하나님을 등지게 되었고, 2000年 10月 강제이혼을 당하면서 『신은 죽었다』고 했던 니체의 말처럼 「저도 죽었다」고 마음 먹었고 만물을 창조했다는 유일신을 부정하듯 평화로워야 할 교회 주변 사람들을 그랬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전 하나님에게 저의 희망을 구걸하지 않았고 진리를 찾아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나 기도 같은 건 자연히 멀어졌고 전 결국 오랜 세월 믿고 의지했던 기독교를 떠났던 것입니다.
제가 이런 아픔들을 겪으며 점점 분노로 가득 찰 때 저는 부자들에게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오직 분노에 찬 저의 행동표출만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부자들이 비도덕하다든지 나쁘다고만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 때는 일종의 시기심이나 질투심 같은 것이었다고 보여지는군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과 행동이 이렇게 다르니 言語道斷(언어도단)도 유분수죠? 하지만 역시 선악도 돈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되었고, 이 세상 역시 돈에 의해 모든 것이 좌지우지 하는 기준이 된다는 걸 쓰디쓰게 깨달았을 때 호구지책이라 할 수 있었던 경찰 사칭으로 하루하루 버텨가며 응징자가 되어보겠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닙니다…
기자님이 주의 주셨던 것처럼 제 자신을 과대포장한다거나 합리화시킨다거나 이러이러해서 그랬다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저 또한 살아 있는 몸이니 제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을 뿐이죠.
심리학자들이 전 죄책감도 없고 불안해하지도 않는다고 했던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발버둥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전 제 오피스텔에서 16명을 그렇게 할 때마다 용기를 내기 위해 음악을 틀어놓고 범행을 했을 정도로 저 또한 용기가 필요했던 사람입니다. 도전정신과 용기를 내게 했던 「반젤리스」의 「1492콜럼버스」를 틀어놓고 나만의 의식을 치르면서 恨이 서린 나의 외로움에 대한 상실감을 회복시키려 했던 것이지요.
물론 검거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그 음악은 계속 흘러나오고 또 누군가가 희생되었겠지요. 신기한 것은 이렇게 구속되어 있으니 제 마음속에 끈질기게 자리했던 분노, 욕망, 증오, 미련, 집착, 머뭇거림까지도 어느 정도 가셔가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얘기를 듣다가도 『그래도 그렇지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들 말합니다. 제가 외로움이 무서워 살인의 속도를 멈출 수가 없다고 그랬던 것처럼 그 고독과 절망감을 당사자들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말들을 할 수밖에 없겠지요.
어제도 국과수에서 수사를 해왔지만 저를 상담했던 전문 심리학자들이 저를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성격장애자)』, 『살인 전문 기계』라고 언론에서 그랬다는데 저의 심적 고통은 모르고 그렇게들 진단 내릴 수도 있겠죠.
앞전에도 얘기했지만 누구나 증오심과 분노를 표출하지 못해 답답해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술, 담배를 못 하고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나 날 알아주는 여자 하나 없는 내가 택한 것은 오직 그 길뿐이었던 것 같다고 변명하고 싶군요.
지금에 와서 誰怨誰咎(수원수구)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판사가 절 벌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스스로 제 인생을 포기하고 저지른 일, 그 죄 값 또한 제가 단죄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정서가 메마를 대로 메마른 사람도 아닙니다…
전 花園(화원)을 하나 갖는 게 꿈이었습니다. 직업도 꽃집에서 일하기를 희망한 적도 있구요. 꽃을 많이 좋아해 꽃 이름을 많이 외우기도 했습니다. 특히 좋아하는 꽃은 「며느리밥풀 꽃」, 「패랭이」, 「달맞이」, 「소국」, 「제비꽃」, 「코스모스」, 「호박꽃」, 「접시꽃」, 「안개꽃」 … 흔하고 화려하진 않지만 나만이 좋아하는 꽃들이죠.
특히 「며느리밥풀 꽃」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일부러 찍으러 다닐 정도로 좋아했습니다. 그 꽃은 은초롱처럼 밥풀 꽃들이 매달려 있는데 정말 예쁜 꽃이랍니다. 이현세 만화 「며느리밥풀 꽃에 대한 보고서」라는 만화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 중에 하나였는데 너무 감동 있게 봐서 제 정서에 영향을 줄 정도였습니다.
제가 색맹이기 때문에 결국 화가가 아닌 단색의 만화나 끄적거리는 낙서쟁이가 되고 말았지만 꽃을 좋아하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기자님처럼 책 중독 정도는 아니었지만 저도 한때 독서광이라고 할 정도로 책을 많이 읽곤 했습니다. 많은 성인들의 책도 접했지만 저에게 영향을 준 혁명가 「체 게바라」나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 전범(戰犯)으로 치부해 버리는 「히틀러」 그리고 제 또래 친구들이 잘 안 읽었던 「에머슨」, 「키르케고르」, 「파스칼」, 「워즈워스」, 「셀리」, 「키츠」, 「휘트먼」… 등등 친구들은 제게 『왜 그런 책을 보느냐, 어렵지 않느냐 철학자가 될 거냐』 등등 그런 책들을 읽는 저를 이해하는 친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구한테 소감이나 얄팍한 지식을 논해 본 적이 없었고 「얼굴 빨개지는 아이」의 주인공들처럼 그런 친구 하나 없는 게 아쉬움이 많이 드는군요…
하지만 이런저런 책들을 봐왔음에도 정작 세상 바르게 살아가는 법에는 문외한이었으니 그 부족함을 뭘로 메웠겠습니까. 가슴 한쪽이 뻥 뚫린 듯한 허전함에 못 이겨 단세포적으로 고민하며 살아왔던 게 정말 못난 인간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군요.
기자님, 매달 産苦에 시달리신다고요? 요즘은 기사보다 광고가 더 많은 월간지들이 많던데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교보문고에 또 들르시면 서점 가운데 아이스크림 파는 곳에 앉아서 잠깐 쉬어가는 시간도 가져보세요. 가끔 산 책이 미리 읽고 싶어 거기에 앉아 나만의 사색과 독서를 즐겼던 시간들이 생각나네요.
사람들이 하늘 한번 올려다보지 않을 정도로 바쁘게 살아간다잖아요. 되돌아보며 쉬어가는 거 황금보다 소중한 겁니다. 수고 하세요….
04. 9. 4
유 영 철 출처/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