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저항의 인간 허균

tlsdkssk 2020. 2. 2. 09:14

명문가의 자제로 불우한 이들의 벗이 되다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은 분명히 시대의 반역아요 이단이었다. 그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한 세기에 날까 말까한 천재적 시인이요 문사이자 최초로 국문소설을 쓴 작가였으며, 또한 유불선(儒佛仙)에 두루 통달한 학자였고 불 같은 의지를 지니고 현실을 뜯어 고치려던 개혁사상가였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의 평가이지만 당시 그에게 붙여진 이름은 한마디로 ‘막된 인간’이었다.

허균은 대대로 고관직을 누리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허엽(許曄)은 서경덕의 수제자격으로 높은 벼슬을 지낸 동인의 거두였으며, 그의 맏형 허성(許筬)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다녀와서 일본 침략을 정확하게 예단한 인물로 알려졌으며, 그의 둘째 형 허봉(許)은 명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조천기〉를 쓴 인물로 유명했다. 또 누이는 여류시인 난설헌이었다.

이런 가정배경이다 보니 어릴 적부터 유성룡과 같은 명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서울의 명문집 자제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허균은 또 어릴 적에 누이 난설헌과 함께 서자 출신 시인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이때부터 당시 서자들이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알았다.

허균은 열 살 무렵부터 서울에서 천재로 일컬어졌고 그의 누이도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이런 그였는데도 어찌 된 까닭인지 스물한 살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스물여섯 살에야 겨우 사관의 벼슬을 얻었다. 그 뒤 그는 30대의 나이에 황해도 도사(都事, 감사 아랫자리)가 되기도 하고 수안군수가 되기도 했으나 관아에 부처를 모시고 염불했다는 둥, 부모 상중인데도 기생을 끼고 놀아났다는 둥 비난을 받고 벼슬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허균은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당당히 맞섰다. 도대체 썩은 세상에다 치졸한 선비들의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썩어빠진 조정에서 벼슬할 뜻이 도통 없었다. 그런 탓에 그는 불우한 문인이나 시인들과 어울렸고 또 세상에서 버림받은 서자, 승려, 무사들과 한패가 되어 술로 나날을 지냈다.

왜 그랬을까?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 탓이었고, 또 예교(禮敎)를 중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이를 깔보고 자기 멋대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한때 그의 제자였고 또 아주 가까이 지냈던 이식의 평을 들어보자.

허균은 총명했고 문재(丈才)가 있었다. 부형(父兄)과 자제(子弟)들이 모두 높은 벼슬살이를 하며 유명했지만 그는 행동을 단속하지 않고 어머니의 상중에도 고기를 먹고 기생을 끼고 놀았다. 이런 사실이 드러나서 좋은 벼슬을 얻지 못했다. 드디어 도교 · 불교의 서책을 두루 읽고서 스스로 얻은 바가 있다고 말했는데 더욱이 이에 대해 거리낌이 없었다. 나중에는 원흉(元凶)과 줄이 닿아 벼슬이 참찬에 이르렀지만 끝내 대역을 피해서 죽음을 당했다. 그 사람의 일은 입에 올리기에도 더럽지만 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요, 윤기(倫紀)의 분별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이 성인을 일등으로 높였으나 나는 하늘을 따르지,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않겠노라.”

그들 무리가 이 말을 외며 지극한 이론이라고 했으니 이단 · 사설의 극치였다.
- 《택당집(澤堂集)》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수호전》을 지은 사람은 3대에 걸쳐 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어 그 응보를 받는다고 했다. 도둑들이 그 책을 읽으며 우러렀다. 허균 · 박엽 등이 그 책을 좋아해 책에 나오는 도둑들의 이름을 따서 서로 부르며 어우러졌다. 허균은 또한 《홍길동전》을 지어 《수호전》에 비겼다. 그들 무리인 서양갑 · 심우영 등이 몸소 그들 행동을 답습하여 한 마을이 시끄러웠다. 허균 또한 모반을 피하다가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귀머거리 · 벙어리가 되는 갚음보다 훨씬 심했다.
- 《택당집》

이 두 인용문에서는 허균이 이단이었다는 점과 《홍길동전》을 지어 돌려 읽으며 반역을 도모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허균을 욕질하기 위해 쓴 글이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그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식은 전형적인 유학자였고, 이를 밑천으로 하여 높은 벼슬과 명망을 낚았다. 그러면 일단 그의 삶과 행동을 더듬어보고 그 속에서 그의 참모습을 발견해보기로 하자.

그는 집안이 좋았으므로 여느 사람 같으면 신분에 따라 끼리끼리 놀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어울려 사귄 사람들은 핍박받는 서자나 불우한 문사나 벼슬에서 떨려난 사람들이나 산속에서 떠도는 중들이나 어렵게 사는 화가 그리고 무사나 기생들이었다. 이런 모습에 대해 어떤 사람이 물었다.

그대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당 사귈 적에는 높은 벼슬아치들과 한 무리가 되어 서로 찾아오고 찾아다니며 그들과 나랏일을 함께 짤 수 있을 것이오. 하루아침에 권세를 휘어잡아서 부엌이나 곳간에 물건을 그득히 쌓아놓고 살 수 있을 텐데 어찌하여 조정에서 물러나올 적에는 변명도 못하고 숙맥같이 입을 다무느뇨? 현달한 이가 찾아오는 법이 없으며 괴상망측한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느뇨? 그들 중에는 얼굴이 검은 사람도 있고 수염이 붉은 사람도 있소. 수염이 붉은 사람은 혓바닥으로 희롱도 하고 얼굴이 검은 사람은 술병을 차고 오오. 어느 키가 작달막한 사내는 여우 코구려. 애꾸눈도 있고 눈썹이 붉은 이도 있소. 이들과 날마다 별당에서 떠들고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고 만상을 아로새기며 그 스스로를 즐거워하는구려. 그래서 미워하는 사람들이 저 남산의 숲과 같이 많고 등을 돌리는 선비들이 별처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소. 마땅하오. 그대 몸은 진흙 길에 내동댕이쳐진 신세이거늘 어째서 이런 무리들을 쫓아 보내고 중요한 지위에 있는 인사들과 사귀지 않는 것이오?
- 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藁)》

허균은 물론 이 따위 비난에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과 계속 어울려 다녔다. 그들은 바로 서양갑이나 이재영 같은 사람이었고, 화가 이정도 그들 부류에 속했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벼슬아치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양갓집 자제들은 허균을 멀리했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이들은 타락한 무리였던 것이다.

인간애 넘치는 개혁사상가

허균은 낮은 벼슬을 하다가 쫓겨나기 일쑤였는데 벼슬아치들이 보는 시험에서 연거푸 세 번 일등을 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재주를 특별히 인정하여 공주목사 직을 내렸다. 공주목사는 지방관 중에서도 그야말로 좋은 자리였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한 재산 톡톡히 모을 수 있는 벼슬이었다. 그런데 그는 맨 먼저 엉뚱한 일을 벌였다. 그는 친구 이재영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는 큰 고을의 원이 되었네. 마침 자네가 사는 곳과 가까우니 어머님을 모시고 이리로 오게. 내가 절반의 봉급으로 대접하리니 결코 양식이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네. 자네와 나의 처지는 다르지만 취향은 같으며 재주는 나보다 열 배이지만 세상에 버림받음은 나보다 심하니 내가 매양 기가 막히네. 내 비록 운수가 기박하나 몇 차례 고을 원이 되어 목구멍에 풀칠은 할 수 있지만 자네는 입에 풀칠도 못하는 것 같네. 이런 것은 모두 우리의 책임이네. 밥상을 대할 적마다 부끄러워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네. 어서 오게. 비록 이 일로 비방을 받더라도 나는 마음을 쓰지 않겠네.

절절히 우정이 넘치고 있다. 실제로 그는 부정한 재산에 관심이 없었으며 적게 받는 봉급을 나누어 이재영이란 친구와 그의 어머니를 먹여 살렸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의 인정은 한없이 넘치고 있었다. 그는 공주목사 자리에서 1년이 못 되어 또다시 떨려나갔다. 이때 그의 식객은 이재영 모자만이 아니었다. 허균은 자신의 처외삼촌 되는 서자 출신인 심우영도 불러와 함께 살았다.

그 뒤 한직으로 돌다가 1609년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때 이재영과 이정을 데리고 갔다. 무슨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이정은 불우한 화가였다. 한 고관이 이정에게 그림을 부탁했다. 그러자 이정은 술을 마시며 빈둥거리다가, 뇌물 짐을 가득 실은 소들이 대갓집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그림을 그려놓고 도망쳤다. 바로 고관이 뇌물을 받는 사실을 풍자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의 이정은 불행한 삶을 살다가 먼저 죽었다. 이때 허균은 또 이런 글을 남겼다.

서쪽에서 온 사람이 말하기를 이정이 죽었다고 하니 이 말이 사실인가? 통곡하며 피눈물이 흐른다. 하늘이여, 원통하도다. 나는 누구와 함께 물외(物外)에서 노닐까? 세상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중히 여기나 나는 그 사람됨을 중히 여기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애절함이 깃들어 있다. 그는 1614년 사신으로 임명을 받아 중국에 가게 되었다. 이때에도 그는 외가의 서족인 현응민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많은 서적을 사 가지고 왔다.

허균은 이때 명나라의 기록에 선조와 광해군의 사실이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변무사(辨誣使)로 파견되면서 많은 자금을 가지고 갔다. 광해군이 내탕금을 몽땅 내준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돈을 로비 자금으로 쓰지 않고 책을 몽땅 사와 강릉에 도서관을 만들어 보관하고 선비들에게 읽게 했다. 현응민은 이런 허균의 일에 군말 없이 협조했고 나중에 허균이 일대 모반을 꾀할 적에 그도 함께 죽었다. 허균은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며 문학과 사상의 폭을 넓혀 나갔다.

도덕군자들이 허균의 사람됨을 계속 나무라면서도 그의 시만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어릴 적에 이달에게서 누이 난설헌과 함께 시를 배웠다고 위에서 말했다. 그 뒤 그는 당시 시인 · 문사로 이름을 떨치던 전오자(前五子) · 후오자(後五子) 등과 교류했다. 이들은 모두 불행한 시인 · 문사들이었다.

그중 권필의 경우를 보자. 권필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명신 이정구를 따라 시를 주고 받는 수창외교(酬唱外交)에 동원되어 중국 사신을 접대하면서부터 문명이 자자했다. 그 뒤 권신 이이첨이 교류를 청했지만 끝내 거절했고, 왕비의 동생인 유희분이 날뛰자 성이 유(柳)인 것을 풍자하여 〈궁류시(宮柳詩)〉를 지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게 했다. 그리고 이 시로 인해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길에 그는 말술을 마시고 동대문 밖에서 잠을 자다 그만 죽고 말았다. 권필은 허균을 아꼈고 허균은 권필을 사모했다.

허균은 시를 지을 때 부질없는 미사여구나 재주를 부리지 않았다. 뜻을 나타내고 시세를 한탄하고 질박하게 감회를 읊었다. 그의 시는 당대 시인들에게 표본처럼 널리 퍼졌다.

부안 기생 계생은 얼굴은 못생겼지만 시로 이름이 났다. 한미한 출신인 유희경과 정분을 나누는 사이였다. 허균이 부안에 유배가 있을 때 계생과 사귀면서 자주 시로 화답했는데 뒷날 허균은 계생의 시를 높이 평가해 시평집에 실을 정도로 아꼈다. 그는 시만 지은 것이 아니라 시평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가 쓴 《학산초담(鶴山樵談)》과 《성수시화(惺詩話)》는 최초의 본격적 시평론으로 꼽힌다. 그는 여기에서 불행한 사람들의 시를 많이 소개했다. 또한 《국조시산(國朝詩刪)》이라는 시선집에서는 당파나 친소를 떠나 엄격한 기준에 따라 시선을 했다. 뒷날 전라감영에서 이를 찍어 출판했는데, 역적이 만든 책을 보급했다고 하여 그곳 감사가 파직되기도 했다. 그만큼 이 시선집은 독자가 많았고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의 문장 또한 시 못지않게 좋은 평을 받았다. 그가 지은 글은 뜻을 중시했지, 중국의 고사를 현학적으로 늘어놓지 않은 것이 특징이었다. 더욱이 그의 문장에는 현실비판이 강하게 깔려 있다. 그리고 중국의 인물이나 경전을 따져 견해를 밝히는 따위의 일반적 풍조를 배격하고 《호민론(豪民論)》 《유재론(遺才論)》과 같은 정치개혁 사상을 밝힌 것이 대부분이다.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백성이다”라고 시작하는 《호민론》은 호민의 혁명사상을 담고 있다. 이는 뒷날 이루어진 정약용의 《탕무혁명론(湯武革命論)》과 함께 이 분야의 2대 명작으로 꼽힌다. 《유재론》에서는 인재를 신분과 출신에 관계없이 발굴해 고루 써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그는 또한 귀양살이 중에 전국의 특산물에 대해 설명한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집필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식품사와 관련된 최초의 저술로 꼽힌다.

민중에게 사랑받은 《홍길동전》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홍길동전》이다. 공주목사에서 밀려난 뒤 그는 함열에서 귀양살이를 했고 이어 부안에서 살았다. 당시 서양갑 등 서자들은 서자 차별을 없애달라고 조정에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들어줄 리 만무했다. 그러자 그들은 여강(남한강)가에 굴을 파고 병서를 읽고 황해에서 염전을 경영하여 거사자금을 염출하려 했다. 《홍길동전》은 이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길동전》

이 소설에는 당시 사회제도의 모순, 특히 적서의 신분차별 타파와 정치개혁을 주제로 한 영웅소설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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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은 조선 초기에 충청도 일대에서 활약한 의적의 두목이었다. 역사 기록에는 실존인물인 홍길동이 서자라는 사실은 나타나지 않는다. 허균은 이런 역사인물을 빌려 서자로 만들고 부정한 재물을 털고 끝내 성공을 거두어 임금에게서 서자의 굴레를 벗는 허락을 받고, 이어 온갖 차별이 없는 율도국을 건설하게 한다. 실제 활동했던 역사인물을 빌리긴 했지만 홍길동은 바로 서양갑을 본보기로 한 것이다. 허균은 서양갑에게 석선(石仙)이라는 호를 지어주며 남달리 가까이 했다.

어쨌든 《홍길동전》이 완성된 다음해에 박응서가 새재에서 은상을 털다가 잡혀 서자들의 거사음모가 발각되어 떼죽음을 당했다. 허균은 여기에 연루되지 않았지만 신상의 위험은 나날이 다가왔다. 《홍길동전》은 그 뒤 베껴져서 민간에서 계속 읽혔다. 특히 서자들과 의적들은 홍길동을 영웅시하여 본받으려 했다. 뒷날 일본 식민지 시기에 의병이나 도둑들이 《홍길동전》을 읽고 모방한다는 소문에 따라 일제 당국이 이를 번역하여 읽은 사실에서도 이런 일이 증명되고도 남는다.

더욱이 그의 다른 글들은 모두 한문이지만 《홍길동전》만은 한글로 쓴 덕에 널리 민중들에게 읽혔고 이것이 국문학사상 한글로 쓴 첫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홍길동전》으로 그는 국문학사에서 작가의 위치를 확보했지만 이것은 그의 행동이나 사상의 한 면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마흔아홉 살 되었을 때 새로운 정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인목대비의 폐비 논의가 일어난 것이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의 계비였으니 어머니뻘이 된다. 나이도 광해군보다 열 살 아래였는데, 그녀의 아버지와 자식이 모두 죽음을 당해 늘 광해군을 원한에 차서 대했다.

이때 허균은 형조판서가 되는 등 조정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허균 일파는 인목대비 폐비에 찬성하고 나섰다. 그리고 인목대비를 모략하는 글을 인목대비가 거처하는 경운궁에 던졌는데, 이 일을 주동한 사람이 허균의 일파인 김윤황으로 지목되었다.

인목대비의 폐비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허균을 물고 늘어졌다. 그리하여 일대 상소운동으로 번졌다. 서로 공방을 펼친 이들 상소에서 허균 일파는 일단 기선을 잡았다. 이때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남대문에 격문이 붙었는데, 곧 난리가 날 것이니 모두 도성에서 피난하라는, 민심을 충동하는 내용이었다. 그것을 붙인 주모자가 앞에서 언급한 현응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끝내 허균도 잡혀왔다.

반역자의 이름으로 기록되다

허균은 승려 · 무사들을 거느리고 일대 모반을 꾀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썼다. 허균은 실제로 이런 음모를 꾸민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일파는 모두 시세에 불만을 지니고 변혁을 꿈꾸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허균은 광해군의 깊은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런데도 허균 일당이 여러 정치적 분란을 일으킨 것은 하나의 모반을 준비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이이첨으로부터도 경원을 당하고 있었다. 이이첨은 재빨리 허균과 그 일파를 처형하라고 광해군을 압박했다. 광해군은 마지못해 허균을 사형에 처하라는 조치를 내렸다. 허균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허균의 서자와 그의 부하들은 민활하게 움직였다. 그를 감옥에서 빼내려 한 것이다. 특히 허균의 서자는 이 일로 또 잡히는 몸이 되었다. 이런 낌새를 안 이이첨은 제대로 심문을 벌이지도 않고 허균과 그의 일파인 김윤황 · 하인준 · 현응민 · 우경방 등을 서문의 사형장에서 처형했다. 이때 허균의 나이 쉰 살이었다.

심문을 받을 때 현응민은 이렇게 말했다.

“앞뒤의 흉서는 모두 내가 한 것이고 허균은 알지도 못한다. 나를 죽이면 그뿐이요, 허균을 죽이는 것은 실로 원통하다.”

그러나 허균의 첩 추섬은 이렇게 말했다.

“경운궁의 흉한 격서와 남대문의 흉한 방문은 모두 허균이 만든 것이다. 흉역(凶逆)의 일은 현응민과 함께 모의했고 방문을 붙인 사람도 현응민이다. 현응민이 허균의 집에 늘 드나들면서 일을 꾸민 것이다.”

어느 말이 맞는지는 여기에서 굳이 따질 필요가 없겠다. 그의 시체가 토막나서 조리 돌려질 때 서리인 박충남은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면서 잘린 허균의 머리를 훔쳐가려 했다. 또 이때 몇백 명이 허균 일당이라고 지목되어 잡혀와서 날마다 국문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끝내 허균을 감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있는 말 없는 말을 보태서 벗어나려 하고, 어떤 사람은 평소에 허균과 원수 사이라고 발뺌을 하고, 어떤 사람은 허균의 꾐에 빠졌다고 하여 곤장에 맞아 죽거나 귀양 가거나 사형을 당하거나 풀려나기도 했다. 이렇게 여덟 달을 감옥이 있는 거리인 무교동(의금부 자리)엔 울음소리와 신음소리, 고함소리가 뒤범벅이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허균은 문사나 벼슬아치의 생애가 아닌 반역자란 이름으로 종장을 기록했다. 오늘날 우리가 그를 이름난 시인으로 평가하든, 《홍길동전》을 쓴 작가로 평가하든, 불 같은 개혁의지로 왕조를 한바탕 엎으려 한 의기의 인물로 평가하든, 그는 분명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늘날 허균이 태어나 살았던 강릉에서는 허균-허난설헌제 등 여러 행사를 통해 그를 기리고 있고, 장성에서는 실제 인물 홍길동이 살았던 고장이라 하여 홍길동 축제를 열고 있다. 또한 허균을 진보적 사상가로 보는 글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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