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리 고양이의 죽음
-윤이형의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를 읽고
작품을 읽으면서 토론의 주제를 무엇으로 삼을까 많이 망설였다. 어떻게 보면 젊은 부부가 이혼하는 과정을 그린 우리 사회의 흔한 이야기 중 하나였다. 이혼에 이르는 복잡한 심리적 경로들과 이혼에 이를 수밖에 없는 개인적, 사회적 원인들을 분석하고 해석해 내는 과정들에서 작가의 통찰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나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는 소설을 읽으면서(시도 마찬가지) 어떤 부분을 수필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다보면 결국 장르를 통섭한다든가 장르를 초월하는 글쓰기에 이르게 된다. 단지 기교라든가 수사에만 관심을 쏟다보면 자연스럽게 모방만을 일삼게 된다. 우리가 어떤 문학작품을 대하든 한 작품에서 우리가 배울 바는 결국 우리의 비판 능력에 준한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에서 상징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전체적인 맥락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바판적으로 읽으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상징물은 두 마리의 고양이다. 흔히 시적 상징에서처럼 객관적 상관물로 그치지 않고 이 소설에서 고양이들은 인물들과 교감하고 감정이 이입되는 정서적 등가물로서 역할을 한다. 첫째, 나는 회원들과 이 고양이들이 어떤 상징적 의미가 있는 가를 논의하고자 한다. 둘째, 이 소설에서는 상징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어떤 효과를 내고 있는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어떤 기여를 하는 가를 논의하고자 한다. 셋쩨, 수필에서 사용하는 상징의 예를 들어보고 시와 소설, 또는 인문학적 글쓰기에서의 상징들과 어떤 점이 유사하고 어떤 점이 다른 가를 비교 분석해 보고 싶다. 물론 완벽한 논문을 쓸 의도나 능력은 없고 단지 논의를 위한 소재를 제공할 뿐이다. 그때그때 작품을 읽어가면서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였다. 그래서 논리의 일관성이라든가 결론에 이르는 체계적인 서술은 없고 거칠고 조잡할 뿐이다. 우선 제시하고 함께 완성해 나갈 것이다. 필요하다면 다른 자료들도 올려주시면 고맙겠다.
1. [그들의 첫 번째 고양이가 죽던 날.
정민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날을 기억했다.
극심한 슬픔이나 분노는 없었다. 그것은 정민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때 정민의 삶은 생존을 위한 행동, 행동, 그리고 또 다음 행동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여섯 시에 24시간 영업을 하는 맥도날드에 도착해 버거로 아침을 때웠다. 여섯 시 반에 지하철역 근처에서 통근버스를 탔고 일곱 시 오십 분쯤 일터에 도착했다. 작업은 여덟 시에 시작이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앉아 1천 개가 조금 안 되는 부품들을 쉬지 않고 조립하고 나자 점심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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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메뉴는 밥과 상추 여남은 장, 김치, 그리고 건더기가 없는 묽은 된장국이 전부였다.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수저를 드는데 희은에게서 문자가 왔다, 치커리 무지개 다리 건넜어.
그는 사진 속에 담긴 고양이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밥을 먹었다. 그런 다음 관리팀으로 가서 반차를 내야겠다고 말했다, 관리팀장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오늘은 오후 대체 인력이 없다고 중얼거렸다. 장부를 뒤져본 그는 정민이 올해 연차를 다 사용했으므로 반차라 해도 더 이상 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미안해. 퇴근하는 대로 갈게. 정민은 희은에게 문자를 보냈다.]
소설가는 타인을 관찰한다. 타인의 삶에 감정이입이 이루어진다. 타인과 교감하고 타인의 의식에 침투하며 타인의 세계를 해석한다. 자아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인식의 폭을 넓혀서 삶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자아는 무수한 경험의 축적물이며 나의 경험이라는 것은 나의 내면과 외부의 끊임없는 접촉이며 반응들이다. 따라서 동시대적 경험은 근본적으로 동질적이다. 자신을 객관화시킨다는 것은 자신을 대상화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자신을 타인에게 투영해볼 수는 있지만 자신을 타자화할 수는 없다.
2. [치커리는 진료실 옆에 따로 마련된 작은 방으로 옮겨졌다. 소파가 하나 있고, 선인장이 심어진 조그만 화분이 구석에 놓인, 반려인과 동물의 영원한 작별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희은은 소파에 앉아 고양이를 무릎 위에 눕혔다. 산소가 새어나오는 튜브를 코에 대주자 치커리는 천천히 힘겹게 숨을 쉬었지만 희은이 속삭이는 그 어떤 말도 알아듣거나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희은은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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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들어와 숨이 멎은 고양이를 안고 검사실로 들어갔다. 심폐소생술이 시도되었다. 부질없었다. 잠시 후 의사가 다시 한 번 희은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희은은 로비에 앉아 기다렸다. 치커리는 커다란 국화꽃 한 송이가 그려진 갈색 종이 상자에 담겨 나왔다. 희은은 안경에 묻은 눈물을 닦고, 가방을 메고, 상자를 두 손으로 안고 병원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병원에 도착한 지 한 시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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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죽음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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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라 생각하며 애도한 수많은 사회적 죽음도 있었다. 분향소에 꽂았던 그 많은 향들, 그 많던 기도와 눈물방울들. 희은은 여러 날 가슴 아파했고 분노했고 비극이 잦은 사회의 다른 시민들처럼 그 죽음들의 영향을 받아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것이 위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9년간 품어 키운 흔해빠진 생김새를 지닌 한 마리 고양이의 죽음은 그 죽음들과는 달랐다. 전혀 달랐다.]
첫번째 고양이와 두번째 고양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희은은 반려동물과 감정을 교류하고 그의 죽음 때문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고양이를 떠나보내는 장례식 과정은 매우 치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고양이의 죽음을 대하는 가족 세 사람의 반응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감정들은 서로 교차되면서 엇갈린다, 첫번째 죽음과 두번째 죽음 사이의 간극과 그 미묘한 변화들이 의미하는 바는? 결혼의 파탄과 가족의 해체? 남과 여의 불신과 몰이해로 빚어진 극단적 대치? 실종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결국 고립과 단절의 벽 너머일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 결혼은 미친 짓이며 가정은 서로의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닫혀있는 세계인가? 그래서 그들은 각자도생에 성공했나? 그 결과는 바람직하며 다른 가능성은 없었는가? 동물과의 (가족)관계 형성과 깊은 감정적 교류는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관계의 어려움, 또는 대화의 단절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은지.
3. [치커리가 세상을 떠난 것은 그 일이 있과 석 달이 지나셔였다.
치커리의 죽음은 희은에게, 희은 역시 언젠가는 그렇듯 죽을 것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그러하리라는 사실을 새겨 놓았다. 희은은 죽을 것이었다. 그건 소문이 아니고 확정된 사실이라고, 그 장례식이 알려주었다. 억센 손으로 희은의 얼굴을 거머쥐고 똑똑히 보라고 치커리의 몸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래서 희은은 보았고 알게 되었다. 정민 역시 언젠가는 죽을 것이었다. 그 일이 일어날 것이고, 되돌릴 수 없고, 저항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소용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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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커리의 죽음은 희은 안에 있던 것들을 무서운 기세로 태워버렸다. 울고, 화내고, 허공에 혼잣말을 하고, 잠을 자다 깨어나 가슴을 치며 며칠을, 몇 주를, 몇 달을 보내면서 그 뜨거운 죽음을 몸 안에 집어넣는 동안, 정민과 주고받은 말들, 꺼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끝까지 간 감정들, 그 악몽 같던 악다구니들도 함께 하얗게 불타서 날라가버렸다. 전에는 무섭고 괴로웠는데, 이제 희은은 텅 비어 있었다. 의지도, 기력도, 용기도 말라버렸다. 희은은 정민과의 일을 잊기로 한 자신이 묘지의 일부가 되어버렸다고 느꼈다. 정민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뭘까? 죽은 것일까? 정말 완전히 죽어 나무로 만들어진 마리오네트가, 무감각한 기계가 되어버린 것일까?
희은은 머리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튕겨도 반응이 없던 치커리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날 치커리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희은이 갔을 때 이미 어둠 속에 놓여 있었다. 소리는 들렸을까? 냄새는? 촉각은 남아 있었을까? 정확히 언제 시력은 잃었을까? 대체 몇 시간 동안이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있었던 걸까? 자신을 버려두고 간 희은이 돌아왔다는 것을, 너무 늦게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울며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느낄 수는 있었을까?]
상징은주제를 구체화시키고 한 주제 아래 이야기를 집약시키는 힘이 있다. 상징은 우리의 삶과 일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십자가는 기독교를 상징한다. 처형의 도구였던 십자가에 수난과 희생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상징은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 기호이자 방식이기도 하다. 부처는 깨달음의 상징이다. 우리는 부처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깨달음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서 맹목적이며 고통에 찬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말하자면 상징은 삶의 작동방식을 풀어볼 수 있는 일종의 키워드로 작동하는 것이다.
4.[그들의 두 번째 고양이가 죽던 날, 그들은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희은의 집에서 커피 한 잔씩을 마셨다. 늦은 밤이어서 초록은 데운 우유를 마셨다. 그들은 그들의 두 번째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첫 번째 고양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앞으로는 이렇게 셋이서 오래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눌 일이 생기기 어려우리라는 사실을 세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픈 이야기,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고양이들과의 즐거웠던 추억을 하나씩 꺼내며 웃었다. 샐러드 속에서 톡 쏘는 알싸한 채소의 맛처럼 예민하던 치커리의 성격을, 착하고 순하던 순무의 게으름과 하품을 기억했고 나누었다. 그러나 그날 밤 희은과 정민은 각자의 집에서 잠들기 전에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희은은 순무를 생각했다. 정민은 치커리를 생각했다. 그들은 너무 크게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하지만 각자 울고 싶을 만큼 마음껏, 울었다. 그러고는 초록을 떠올리며 비슷한 새벽녘에 잠들었다.]
문학에서의 상징은 비유metaphor의 일종이다. 진부하고 관습적인 것들은 문학적 상징이 될 수 없다. 상징은 세계를 새롭게 보는 시각이다. 상징은 다각적인 시선으로 기존의 관습적 시각을 허물고 우리를 새로운 해석의 장으로 끌어올린다. 반려동물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은 대개 휴머니즘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나 지금은 휴머니즘의 사각지대에 머물 수도 있다. 희은과 정민에 의해 나뉘어 살게 된 두 마리의 고양이 치커리와 순무는 어쩔 수 없이 분열될 수밖에 없는 초록의 의식을 상징한다. 또한 부모 자신도 겪게 되는 자아 정체성의 균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5. [그들은 날이 저물어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7년 전에 갔던 곳과는 다른 업체였다. 장례지도사가 나와 그들을 맞았다. 절차를 간단히 안내한 그가 순무의 몸을 상자에서 꺼내 단 위에 올려놓았다. 흰색 조화로 장식된 단에는 미리 전송받은 순무의 사진을 깔아둔 태블릿이 세워져 있었다. 향이 피워지고, 낮은 볼륨으로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초록은 결연한 표정으로 참고 있었다. 정민은 초록의 어깨를 감싸안고 있었고, 희은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순무의 몸은 깨끗했다. 투실투실했던 옛날보다 살이 눈에 띄게 빠진 것이 낯설 뿐이었다. 녀석은 조금도 죽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무르고 순해 보였다. 그들이 함께 살던 시절 거실 매트 위에 누워 태평하게 잠들어 있던 모습 그대로여서, 흔들어 깨우면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배를 만져 달라고 자세를 바꿀 것만 같았다.
이제 순무가 먼 길 떠납니다.
장례지도사가 그렇게 말하고 순무의 몸을 운반대에 올려 소각로로 데려갔다. 희은은, 순무야 미안해, 속으로 몇 번이나 속삭였다. 그려러고 했던 건 아닌데, 너에게 마음만큼 잘해주지 못한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그러난 그 미안한 마음은 7년 전과 같으면서도 조금 달랐다. 미칠 듯한 죄책감이 예리한 유리조각처럼 출렁거리며 몸속을 찔러대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더 뭉툭하고, 둥그렇고, 차분한 슬픔이 마음속에서 천천히 커져갔다.
초록은 참는 것을 포기하고 아빠에게 안겨 울었다. 정민도 안경을 벗고 손으로 눈을 닦아냈다. 세 사람은 나란히 서서 각자의 방식으로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양이의 성장과 죽음처럼 우리들의 꿈도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서 그렇게 소리없이 성장하다가 소멸된다. 이 소설은 꿈의 소멸에 대한 애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희은이 고양이를 잃고 장례식장에서 마치 혈육을 떠나 보내는 듯이 슬퍼하며 애도하는 장면이 길게 이어진다. 그 치밀하고 리얼한 묘사는 사람의 장례식을 방불케 한다. 우리사회는 반려견 인구가 천만이 넘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 한 방울 안나왔는데 자신이 키우던 반려견이 죽었을 때는 대성통곡을 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인간)서로에 대한 증오와 불신이 도를 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인간 상호간에 의사소통이 힘겨워지고 상대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지면서 인간은 서로에게 불가해한 존재로 여겨진다. 개인적, 사회적 불행에 대해 둔감해지며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갈수록 떨어진다. 이 감정의 질식상태에서 우리가 찾아낸 것이 바로 반려동물에 대한 과도한(동류 인간에 비해) 사랑이며 의미 부여다. 정서적 불안과 심리적 왜곡이 반려동물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희은과 정민은 결혼과 출산, 그리고 공동 육아의 과정 속에 생활고까지 겹치면서 점점 자아를 상실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랑이라는 낭만적 포장이 찢겨나간 뒤에 처절한 현실의 민낯을 보게 된다. 거기에 희은은 결정적인 사건을 접하게 된다. 대낮 아파트 입구에서 한 여자를 칼로 찌르고 한 남자자 황급히 도망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이별 폭력이다. 작가는 남녀 두 인물을 통하여 자신의 의식을 확산시킨다. 남자의 관점과 여자의 관점이 대립하며 사건과 상황(결혼과 가족)에 다각적이고 입체적으로 접근한다. 이런 방식이 냉정하고 객관적인 분석이 될 것 같지만 다른 한 편으론 한 사람 내부의 두 목소리, 자폐의 벽에 갇혀있는 다중인격의 대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치커리와 순무, 두 마리의 고양이는 이혼을 전후해서 차례로 죽는다. 치커리는 희은의 집에서, 순무는 정민의 집에서. 두 마리의 장례식에 세 사람의 가족이 만난다. 고양이들은 그들을 연결시키는 끈이기도 했고 그들 각자의 꿈이기도 했다. 그들 각자가 간직한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족에의 꿈. 첫번째 고양이의 죽음은 그 가족의 해체를 의미한다. 두번째 고양이의 죽음은 그들 각자가 공유했던 기억에 대한 애도를 의미하며 그날 밤 희은과 정민은 각자의 집에서 그 기억 때문에 따로 운다. 이제 세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걸을 것이다.
희은은 첫번째 고양이 치커리를 동물병원에 입원시키고 온다. 그날 주위에 개들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무신경하게 어떻게 보면 부주의하게 치커리를 그냥 두고 온다. 다음날 치커리가 죽고나서야 자신이 치커리를 방치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치커리 혼자 그 좁은 케이지 안에 갇혀 겪었을 지옥같은 밤의 경험에 감정이입된다. 여기서 고양이는 작가 혹은 희은의 정서적 등가물로 기능한다. 고양이는 단지 상징적 이미지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일화로 작용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얼개에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그 공포는 곧 아파트에서 벌어진 칼부림 사건으로 인하여 확산되었다가 남편 정민이 쓴 일기 한 토막으로 인하여 내파를 겪게 된다. 즉 소설에서의 상징물은 시적 상징과는 달리 직간접적으로 인물 혹은 사건들과 관련을 맺으며 스토리라인에 참여하는 현실적 구체성을 띈다.
6.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절대로 보호자분의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다..... 고양이는 아픈 것을 드러내지 않는 동물이라 상태가 이 정도로 나빠질 때까지 필사적으로 숨깁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물을 너무 많이 마신다거나, 사람이 쓰는 화장실에 들어가 젖은 바닥에 주저앉는다거나, 평소에 하지 않던 그런 행동을 하며 증상을 드러낼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인 거예요. 보호자가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사실은, 아이가 몇 시간 전쯤에 이미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보호자분을 기다리면서 최선을 다해 버틴 것으로 보입니다. .....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많이 힘들 텐데, 이제 아이가 최대한 편하게 갈 수 있도록 곁에 있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희은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몸 전체가 살갗 안쪽에서부터 투명한 연기로 변해 입을 통해 조금씩 새어나가는 것 같았다,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조금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때 의사가 희은을 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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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은은 다시 그 말을 했고 의사는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와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환자의 죽음은 일상적이다. 하물며 반려동물의 경우는 그들에게 무의미에 가까울 수 있다. '조금 전 희은이 젖은 눈을 들어 돌아보았을 때, 조금 떨어진 검사대 앞에서 자기들끼리 아마도 농담으로 보이는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으며 웃음을 교환하던 간호사들도, 그저 쉴 틈 없는 격무 한가운데 인간으로서 자연스레 필요로 하기 마련인 긴장 완화의 시간을 갖고 있었을 뿐, 치커리의 죽음에 특별히 무심하거나 잔혹한 심성을 보인 것일 리 없었으므로 희은은 그들 역시 증오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가족(혹은 반려동물)의 죽음은 심각한 비극이지만 타인들에게 그 심각함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의 무심함을 탓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헸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부모가 이혼하고 가족이 해체되더라도 어쩌면 그들도 그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 수의사처럼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희은처럼 자책감에 시달리며 주위 사람들과 스스로를 비난하고 힐책하는 것은 감정적, 사회적 낭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모든 개인들의 비극은 결국 거대한 사회의 메커니즘 안에서 일상화되며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닐까?
토론 과제) 우리가 읽은 수필 중에서 토론하고 싶은 상징물이 있는가? 그 상징물은 그 수필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기능을 하는가?
예) 조성자의 베란다 보이 시즌3
입양된 길고양이 두 마리가 혼자 사는 작가와 가족을 이룬다. 혼밥족이 늘어나고 고독사가 새로운 뉴스 거리가 되지 못하게 된 오늘날 이제 다양한 가족 형태를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시골에서는 혼자 된 여자 노인들이 둘씩 셋씩 한집에 모여 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10년 이상 함께 살면 가족이라고 한다'는 식의 법률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한집에서 먹고 자고 이야기하고 아프면 걱정하고 먼 데 갔다오면 반가워하고 없으면 안될 것 같으니 가족이다. 나와 아인슈타인, 사와자키는 그렇게 살고 있다...오늘따라 햇볕이 좋다. 나는 12층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서 폰을 보는 중이다. 새로 들인 화분 곁에서 한참을 놀던 아인슈타인과 사와자키가 나란히 앉아 있다. 베란다 창문 밖 어딘가를 보며 구글 어스를 하고 있다.]
고양이 뒤에 숨어 있는(또는 고양이를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고독함이 글의 전체적 정조다. 그러나 고양이를 위해 깊은 철학적 사색이나 감각적 표현을 동원하지는 않는다. 반려동물이 가족의 일원처럼 여겨진다는 어찌보면 덤덤한 이야기다. 필체도 사뭇 거침없는 스케치풍이다. 그런데 마지막 한 구절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베란다의 의자에 앉아 있고 고양들은 나란히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이 장면을 고양이들이 '어딘가를 보면서 구글 어스를 하고 있다'라고 표현한다. 고양이의 영묘한 눈동자가 떠오르며 미래에는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살아야 할 뿐 아니라 무언가를 함께 해야 한다는 새로운 지구의 비젼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