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스크랩] 일상의 삶이 종교가 되고 신성함이 될 때 - 서 정록

tlsdkssk 2018. 4. 8. 20:15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묻는다. 종교가 뭐냐고. 그럴 때 나는 주저 없이 삶이 곧 종교라고 말한다. 나의 삶이 나의 종교라고. 그러면 간혹 사람들은 당황한다. 아마도 종교란 일상의 삶과 다른 뭔가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글·서정록



인류학자들이 지적하듯이, 북미 인디언들에게는 ‘종교’란 말이 없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종교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와 달리 그들의 종교란 일상의 삶 그 자체이다. 그들의 일상은 감사와 축복의 성격을 띠는 각종 의례와 기도로 가득 차 있다. 말하자면 일상의 삶이 그들에게는 종교요, 의례요, 기도인 것이다. 일상을 떠난 그 어떤 종교도 그들에게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저녁에 자는 것도 모두 종교 행위다. 아침에 목욕을 하고 해맞이를 하는 것도,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는 것도,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사냥하는 것도, 여인들이 모여 길쌈을 하는 것도 모두 그렇다. 땔감을 줍는 것도, 심지어 수다를 늘어 놓고 함께 깔깔대며 웃는 것도 그렇다. 그런가 하면 산모가 조용한 숲 속을 거닐며 뱃속의 아이에게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전사가 몸을 단련하기 위해 산을 오르내리는 것도, 청춘남녀가 카누를 타고 그들만의 시간을 지내는 것도, 동물들이 짝짓는 것도, 나비가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것도, 새들이 노래하는 것도, 시냇물이 졸졸거리는 것에도 모두 종교성이 담겨 있다. 도자기를 빚는 것도, 그 도자기의 표면에 신성한 문양을 그려 넣는 것도. 마찬가지로 옷에 자수를 놓는 것도, 활에 아름다운 색칠을 하는 것도, 그리고 아기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것도, 춤을 추는 것도….
말하자면 그들 일상의 모든 일에는 신성함과 종교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을 통해서 그들은 다른 존재들과 뭔가 주고받으며 배우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인디언들이 말하는 삶이요 종교다. 그렇다면 나의 일상생활은 어떨까?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묻는다. 종교가 뭐냐고. 그럴 때 나는 주저 없이 삶이 곧 종교라고 말한다. 나의 삶이 나의 종교라고. 그러면 간혹 사람들은 당황한다. 아마도 종교란 일상의 삶과 다른 뭔가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나도 예전엔 종교를 일상의 삶과 분리된, 일상의 삶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지극히 순수하고 고귀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북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제3세계 원주민들의 삶과 영성을 이해하고부터 나는 일상의 삶과 종교가 본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상의 삶과 분리된 종교도, 종교의 신성함이 없는 일상도 모두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 돌아보면 모든 게 신비이고 기적이다. 아침에 어둠을 딛고 산등성이를 올라서는 해를 보라. 경이롭지 않은가. 땅에 심은 곡식이 자라는 것을 보라. 그저 놀랍지 않은가.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싹트고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는 모습이…. 또한 겨울이 가면 어김없이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때가 되면 어김없이 철이 바뀌고, 때맞춰 철새들은 날아오고, 겨우내 잠을 자던 나비들은 날개짓하고, 검은 산이 푸르른 산으로 바뀌는 것이 그저 신비롭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아이가 태어나 첫 울음을 터트리는 것도, 아이가 제 어미의 젖을 빠는 것도, 손가락을 쥐었다폈다 하며 잼잼하는 것도, 좀더 지나 아장아장 걷는 것도, 그 아이가 훌쩍 커서 청년이 되고, 제 짝을 찾는 것도 모두 신비롭기 짝이 없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두 눈 뜨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것도. 해와 달이 교대로 우리를 비추는 것도,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이는 것도, 그렇게 낮과 밤이 바뀌는 것도 모두….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조화와 아름다움과 신성함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벌레조차도 철이 변하는 것을 알고, 제 짝을 찾을 줄 알고, 잉태하고 알을 낳고 새끼들을 먹일 줄 안다. 그러고 보니 부화기에서 태어난 병아리들은 나중에 커서 둥지에 알을 넣어주어도 알을 품을 줄 모른다던가. 어미가 품어서 부화한 병아리들만이 나중에 커서 알을 품어 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조화요 이치다. 어찌 놀랍지 않은가. 인간의 의지와 지성만으로는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낸 기계적인 원리만으로는 이 세상의 오묘한 조화를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 일상과 분리된 종교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무언가 멋있어 보이고, 품격이 있어 보이지만, 자연의 오묘한 조화에서 벗어난 것이다. 반대로 일상과 종교가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은 신비로우며, 경이롭고, 아름답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행복이 피어오른다.
그런데 일상이 곧 종교라고 말하지만, 나는 과연 인디언들처럼 24시간 늘 기도하며 살고 있는가? 늘 감사하며 사는가? 늘 남을 배려하고, 사랑과 평화를 위해 사는가?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며 봉사하는 삶을 사는가? 무엇보다 내 주위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가? 웃게 하는가?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부끄럽기만 하다. 일상이 곧 종교라고 말하는 것만큼 나는 그렇게 확고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한 것이다. 때로는 불편해 하고, 언짢아 하고, 때로는 인상 쓰고, 때로는 불쾌해 한다. 그럴 때마다 아차! 싶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일 때가 많다. 그렇게 늘 넘어지면서 산다.
인디언들은 말한다. 아마도 자기들만큼 많은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들도 없을 거라고. 왜? 잠시라도 마음의 끈을 늦추면 나는 물론,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주위의 사람들, 인연들을 제대로 챙길 수가 없기에. 아니, 제대로 챙기기는커녕 오히려 짐이 되고 수고거리를 만들 수 있기에. 그러므로 내 주위의 사람들을 챙기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심지어 자면서도 깨어 있어야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잠시도 멈추어 서는 법이 없다고. 그렇게 모든 존재는 매순간 변한다고.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것을 의식하든 않든 지금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라고. 자연 역시 어제의 자연이 아니라고. 꽃봉오리가 맺혔는가 하면 어느새 활짝 피어있는 것처럼. 그리고 꽃이 활짝 피어 있으려니 하면 어느새 시들어 있는 것처럼. 물론 꽃이 시드는 것이야 애닯고 슬프지만, 그 또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만일 모든 게 고정되어 있으면 썩기 시작한다고. 딱딱하게 굳어진다고. 마음도 마찬가지여서 이내 완고해지고 만다고.
변화는 우주를 관통하는 거대한 강과 같다. 그리고 그 강 속에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일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모든 존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산다. 그리고 나의 행위는 돌고 돌아 내게 다시 돌아온다.
인디언들은 말한다. 이 세상의 삶은 늘 행복하고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고통도 있고, 괴로움도 있다고. 그렇게 우리의 일상의 삶이란 걱정거리로 가득 차 있다고. 그럼에도 고개를 들면 태양이 우리를 비추고 있고, 숲에서는 새들이 울고, 정원에서는 꽃이 핀다고. 무심할 것 같은 한 자락 바람조차 때때로 우리의 얼굴을 스치며 시름을 달래 준다고. 그렇게 이 세상은 경이와 신비로 가득 차 있다고. 감사할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사실은 이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고.
하지만 일상과 종교가 나누어지면 일상의 이런 축복과 감사는 공허해지고 만다. 왜? 종교가 일상의 그 모든 가치와 경이와 신비와 축복을 가져갈 것이기에. 아름다움과 미와 진실과 선함을 모두 종교가 차지할 것이기에. 그때 일상의 삶은 빈 쭉정이가 되고 사람들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말한다. 일상의 삶 속에서 신성함을 찾으라고. 일상의 삶이 종교가 되고, 기도가 되게 하라고.

출처 : 의식 혁명
글쓴이 : 기 자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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