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움을 넘어 숨 쉴 수 없을 것 같은 햇살과 따가운 날들의 연속이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 속 수영장에서 느끼게 되는, 모든 감각을 회화로 표현하는 그림이 어울릴 것 같은 날, 영국 워크샵 자료를 정리하며 테이트 모던(Tate Modern) 신축관 Artist Rooms 의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15.25-2010.05.31) 작품 사진들을 발견하였다.
우리에게는 마망(Maman)이라는 거대한 청동 거미 작품으로 잘 알려진 거미 엄마 부르주아. 130cm의 작은 키와 왜소한 체격으로 1세기를 증명한 현대 미술의 대모이자 여걸인 그녀는 너무 늦어서 이루지 못했던 꿈의 좌절을 한탄하는 이들에게, 또 내 꿈과 처지가 이미 늦었다고 주저한 사람들에게 <내일 할 작업>이 삶의 가장 큰 소망이었음을 고백하며 삶이란 고통과 상처를 정화하고 치유하는 투쟁을 이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 마망(Maman). 마망은 <엄마>라는 뜻이다. 알을 품고 있는 거미의 모습에 모성의 강인함과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루이스 부르주아. 그녀는 99세의 나이로 2010년 작고하였다. 97년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던 그녀는 일주일에 한번 사람들을 자신의 작업실에 선데이 살롱을 열어 젊은 작가들의 작품과 음악, 시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가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언론은 현대미술의 대모이자 여걸이 숨을 거두었다고 보도했다>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2010)
1911년 파리에서 태어난 부르주아는 대대로 양탄자 수선 사업을 해 온 집안에서 자랐다. 그녀는 8살 때부터 양탄자 도안을 그리는 작업을 통해 가업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어머니는 그녀가 일곱 살이던 1918년 유럽을 휩쓴 스페인 독감이라는 전염병에 걸리면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 만사에 의욕을 상실해갔기 때문이다.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점점 멀리하게 되고 결국 집안에 들어와 있던 영어 가정 교사와 사랑에 빠진다. 그 후 아버지는 영어 가정교사를 임신시켰지만 더 이상 애를 원하지 않는 다며 영국으로 쫓아버린다. 스페인 독감은 감기에 걸린 듯한 증상을 보이다가 폐렴으로 발전하는가 싶더니 환자의 피부에서 산소가 빠져나가면서 보랏빛으로 변해 죽어가는 전염병이다. 10년을 넘게 방 안에서 고통을 받던 어머니 대신 부르주아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그녀가 8살 때 부터 가업인 양탄자 사업에 도안을 그리는 일을 시작한다. 실제로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내 성격 중에는 나를 희생해서라도 남을 기쁘게 해주려는 점이 있는데 나는 당시 두려움의 대상이던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엄마를 간호하고 태피스트리를 수리했다”라고 말했다. 엄마를 간호하고 아버지의 작업을 거들며 모두를 기쁘게 하는, 일종의 ‘치유’를 위해 헌신적으로 자신의 10대 시절을 보낸 그녀는 이 시절에 경험한 배신의 상처와 아버지에 대한 증오, 어머니에 대한 연민 등은 자신이 표현하는 예술의 지속적인 원동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안의 사업을 도우면서 부르주아는 자신이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는 운명임을 깨닫고 피할 수 없는 의무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에게 예술가라는 직업은 그저 식충이나 기생충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러한 부친의 반대로 예술을 시작하지 못한 그녀는 소르본 대학에서 먼저 수학을 전공했다. 어린 시절부터 정신적 불안감을 느꼈던 부르주아는 수학의 예측가능하고 안정된 체계에 끌려 정답을 찾을 수 있는 수학에서 평안을 찾았다. 그러나 곧 수학적 관념이 불변의 진리가 아니며 이론적 구조일 뿐임을 깨닫고 예술의 세계로 들어서기로 결심한다. 부르주아는 에꼴 데 보자르(Ecole des Beaux Arts)와 에꼴 드 루브르(Ecole du Louvre)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몽마르트 및 몽파르나스에 있는 화가들의 스튜디오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 시절에 그녀를 가르쳤던 여러 화가들 중에서도 특히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는 부르주아에게 삼차원에 대한 관념을 심어주어 훗날 조각가가 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예술가로서 그녀 인생에 가장 중요한 변곡점은 1938년 미국인 미술사학자 로버트 골드워터(Robert Goldwater)와 결혼한 것이다. 그들은 뉴욕으로 이주했으며 부르주아는 사실 60살이 다 되도록 거의 무명에 가까운 시절을 보냈다. 다시 태어난다면 미술사학자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말은 남편과 함께한 시간 속 미술을 바라보는 관점에 남편의 영향이 많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뉴욕 이스트 142, 18번가에 있던 그녀의 아파트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루이스 부르주아. 한번도 자르지 않았던 긴 머리가 눈길을 끈다>
그녀가 세상이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70이 다되어서이다. 1940년대 말부터 기하학의 영향이 엿보이는 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한 그는 38세의 나이, 1949년 뉴욕의 페리도 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조각은 재료가 다양해지고 주제가 과감해진 50년대와 60년대를 거쳐, 70년대에는 급속도로 부상한 페미니즘 열풍과 함께 더욱 강렬하고 파격적인 인상을 띠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이 정점에 다다른 ‘아버지의 파괴’나 ‘저녁식사’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부르주아는 1960년대 중반부터 그룹전에서 천천히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당시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페미니스트 평론가인 루시 리파드가 기획한 <기이한 추상>전에 합류하면서 전시회에 참여한 다른 여성 미술가들이었던 에바 헤세, 야요이 쿠사마, 리 본테큐 등과 함께 여성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가슴이나 남성의 특정 신체 부위 같은 <부분-대상>, <파편화된 신체>등으로 제작된 조각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들 여성 4인방의 작업은 잭슨 폴록의 드리핑 추상이나 드 쿠닝의 회화와는 다른 여성적 경험을 강조한 조각이나 평면작업으로 자서전적인 경험과 내용을 진솔하게 드러내어 미술계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아버지의 파괴>
이 전시회에서 부르주아는 라텍스 고무를 사용하여 전통적이지 않은 기이함, 미니멀리즘 미술 같지 않은 톡특함, 생물학적인 형태를 강조하여 남성작가들이 보통 표현하지 않는 기괴하고 환영적이며 에로틱한 표현을 강조했다. 1968년에 제작된 <개화하는 야누스(Janus Fleuir)>는 남성의 페니스와 여성의 질을 서로 결합시킨 작업으로 이렇게 남녀의 생식기를 이용한 이중성이 결합된 방식은 이후 작업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같은 해에 제작된 <작은 소녀(Fillette)> 남성의 페니스 부분을 강조한 조각으로 1968년에 제작되었고, 재료는 석고에 라텍스를 사용하였다.
<작은 소녀(Fillette,1981)와 그것을 들고 있는 루이스 부르주아 / 각각 좌,우>
이후 부르주아는 1960년대 후반부터 대두되는 페미니즘의 흐름과 함께하는 동시대적 이슈와 맞물리면서 서서히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헤세가 뇌종양으로 요절하게 되고, 리 본테큐는 결혼과 함께 감자기 화단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1970년대 뉴욕 화단에서 부르주아는 페미니즘적인 이슈를 잘 드러내는 미술가로 각인되었다. 특히 당시 미술계에서는 여성미술가들의 존재가 예전에 비해 더욱 가시회되기 시작했는데, 린다노클린(Linda Nochlin)은 <왜 위대한 여성미술가는 없는가? Why Are There No Great Women Artists?>라는 논문으로 여성들의 의식을 촉구하며 과거 위대한 화가들이 모두 천재였던 남성을 강조하고 이를 배출한 사회상의 문제점에 대해 고발했다.
사람들은 이런 그녀를 두고 페미니즘 작가라고 말한다. 그녀 또한 “나는 여성이고 여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르주아는 자신이 여성주의 작가라는 말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여성보다는 ‘자기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시도한다고 고백한다. 40대에야 화가로서 작업을 시작한 그녀는 처음부터 공격적이고 파격적이며, 폭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과감한 에로티시즘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어려서부터 마음속에 출렁이던 아버지로 인한 상처와 불신의 감정이, 한편으로는 남성성을 이긴 어머니란 존재에 대한 경외감과 함께 마침내 피를 토하듯이 자신의 그림에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60세까지는 거의 무명이었던 그녀가 70이 넘어 1982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여성 작가 최초로 회고전을 연다. 이렇게 그녀가 이름을 얻은 것은 70세가 넘은 나이에서다. 또한 늦게 국제적 명성을 얻은 그녀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거미시리즈를 70세 이전까지 드로잉으로만 존재하게 했다. 80세가 넘어서야 이 기괴한 거미 조각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90세 가까운 나이인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 사자상을 수상하며 90이 넘은 나이에 예술가로서 전성기를 맞았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99세의 루이스 부르주아/ 사진-알렉스 반 겔더
루이스 부르주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거대한 조각품을 만든 조각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 일생 중 작업에는 종이에 그린 드로잉이나 에칭 판화 작품의 열열한 열정으로 폭넓은 예비 활동을 펼쳤다. 뉴욕에서 익히 요판 인쇄 방식으로 작업한 드로잉과 인쇄물들로 자신의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책을 출판하거나 영감과 아이디어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무려 40여 년간 내공의 에너지를 축적했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드로잉과 판화 작업들>
2009년 변변한 사진 한장 없는 루이스 부르주아를 찍은 네덜란드 사진작가 엘렉스 반 겔더(Alex Van Gelder)는 이렇게 회고한다. “루이스는 그저 인물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었어요. 사진 촬영을 자신의 생애 작업 연장으로 생각했거든요” 그가 찍은 부르주아의 손 사진을 한번 본다면 90이 넘은 작가의 손에 무한한 생명력이 넘침을 알 수 있다.
거미 엄마의 손 / 암드 포시드 / 부르주아 99세 작고 1년전 사진이다.
당신의 꿈과 처지가 이미 늦었다고 주저하는가? 너무 늦어서 이루지 못 했던 꿈에 좌절하고 한탄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성공이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성공하고 싶은 젊은 예술가들이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성공은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것이다. 그것을 그 자체로 끝이 아닌 궁극적으로는 내 생각을 정말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것이 성공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재물을 쇼유하는 이상으로 만족스러울 것이다. 젊은 작가들은 성공이라는 것이 어떤 내공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길 바라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형태의 의미나 진짜 근본이 되는 동기에 접근해가는 자기 경험은 없으면서 다른 어떤 것의 겉모습만 베끼고 모방하려 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삶 자체이지 그럴듯해 보이는 역사가 아니다>
단신의 작은 체구, 루이스 부르주아는 진정한 거인이다. 70세를 넘어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90세가 넘어 전성기를 맞았고, 100세가 되어 거장으로 우뚝 섰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는 더욱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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