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크랩] 에바 가드너는 역시

tlsdkssk 2016. 6. 7. 16:06

 

 

 

  이 세상에는 ‘미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 록음악의 대부 신중현은 <미인>이라는 노래에서 미인에 대한 정의를 아주 정확히 내렸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아름다운 그 모습을 자꾸만 보고 싶네

  그 누구나 한번 보면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나도 몰래 그 여인을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도 넋을 잃고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나 한 번 보면 자꾸만 보고 있네

  그 누구의 애인인가 정말로 궁금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

 

  한 번 보고 두 번 봐도 자꾸만 보고 싶은 존재가 바로 미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3밀리만 짧았다면 지구의 얼굴이 변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인류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로 바뀌어 전해진 바로 그 말이다. 이 말은 클레오파트라가 상당한 미인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코가 얼굴과 균형을 이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클레오파트라는 코도 뭉툭하고, 치열도 엉망이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클레오파트라가 세련된 화술과 뛰어난 두뇌, 감각적인 정치 본능으로 카이사르를 유혹하여 결혼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아무튼 로마사에서 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 반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전쟁이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와의 패권 다툼에 클레오파트라가 개입한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7년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안티오크에서 결혼하였다. 이즈음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의 본처인 풀비아와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시우스가 집정관 선출 문제와 三頭治者의 지위 문제를 놓고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곧 풀비아가 사망하자 그 일당이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였고, 안토니우스도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기 위해 로마로 귀국하여 그의 누이동생인 미망인 옥타비아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결혼한 지 3년도 못 어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되돌아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당시 로마법상으로 뚜렷한 잘못이 없는 옥타비아와 이혼한 것을 두고 안토니우스를 비난하는 여론이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영토를 이집트에 양도하였다. 게다가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이 죽고 나면 이집트에 묻어달라는 유언장을 남겼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이제 로마 제국의 실권을 놓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간에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일어난 전쟁이 악티움 해전이고 이 전쟁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졌다.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자, 그에게 충성을 다짐했던 지중해 동부 지역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복속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잔당을 격파하고 이집트를 점령하였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하였다. 이로써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국은 종말을 고했고, 로마는 옥타비아누스의 일인 독재체제가 성립되었다.

 

  자, 미인의 대명사인 클레오파트라의 역사상의 기록은 그렇다 치고, 할리우드의 영화사에 수많은 미인이 명멸해 갔는데 최고의 미인을 한 명만 꼽자면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 나 개인의 견해로는 무성영화 시절에는 그레타 가르보, 토키(유성영화) 시절에는 글쎄…… 영화광이 아니어서 누구를 꼽아야 할지 모르겠다. 진 할로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비비언 리, 잉그리드 버그만, 진 아더, 제니퍼 존스, 나탈리 우드, 그레이스 켈리, 마릴린 먼로, 제인 러셀, 리타 헤이워드, 엘리너 파카, 소피아 로렌, 클라우디아 카르니날레, 데보라 카, 라나 터너, 실바나 망가노, 킴 노박, 피어 안젤리, 지나 롤로브리지다, 로미 슈나이더, 올리비아 하세……. 대단한 미인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여배우들의 이름을 얼른 떠올려보아도 20명이 넘는다. 물론 나는 이 여배우들의 영화를 다 보진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과 중학교 시절에 토요일과 일요일에 ‘주말의 명화’을 열심히 봤지만 그 이후론 영화에 대한 흥미를 잃어 1년에 몇 편 안 보며 산 세월이 제법 길었다.

 

 

                                                       <모감보>에서

 

                                <모감보>에서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그건 그렇고, 내 취향일지는 모르지만 <모감보>와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본 에바 가드너는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나를 자살로 유도했을 만큼……. 저런 미인을 두 번이나 보았으니 이젠 죽어버리자. (바보 같은 녀석!) ‘미인’이라는 것이 사실은 해골바가지 하나 위에 일정한 양의 피부가 덮여 있는 것일 뿐인데 남자는 미인을 보면 충격을 받고, 그 충격이 서서히 미쳐버리게 해 한강 가를 거닐게 한다. 에밀 졸라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을 보면 미인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남자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가!

  미인이 노년으로 접어들면 이상하게도 얼굴이 더 많이 상해 안쓰러움을 느끼게 된다. 에바 가드너는 평소에 담배를 즐겨 말년에 폐기종을 앓다 뇌졸중이 와서 죽게 되는데……. 미인의 죽음은 이상하게도 ‘비참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래는 네이버에서 가져온 그녀의 짧은 이력이다.

 

  에바 가드너(Ava Gardner, 1922~1990)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스타 중 한 사람이었다.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했는데, 상대는 모두 할리우드의 톱스타인 미키 루니와 아티 쇼, 그리고 프랭크 시나트라였다. 가난한 담배농가의 일곱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녀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MGM에서 면담 요청을 받았다. 그러고는 1941년에 할리우드로 옮겨가, 단역에서부터 낭만적인 주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류의 B급 배역을 연기하며 5년을 보냈다. 그런 다음 필름누아르 <킬러스(1946)>에서 유혹적인 키티 콜린스 역을 완벽하게 연기해냈다.

 

 

                                                    <킬러스>에서

 

 

                                                                     <킬러스>에서

 

  거기서 버트 랜커스터를 자신을 살해하려는 자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을 만큼 껍데기만 남은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아쉽지만 그녀에게 곧바로 흥미로운 역할이 주어졌던 건 아니다. 빼어난 외모 때문에 <비너스의 손길(1948)>에서 사랑의 여신으로 캐스팅되었고, <쇼 보트(1951)>에서는 예쁜 배경 속에서 노래를 부르지만 다른 사람의 노래를 더빙한 것이다. <판도라(1951)>에서는 남자들을 파멸로 몰고 가는 혼돈스러운 유혹녀이면서, 사후 세계에서라도 제임스 메이슨과 함께 하기를 열망하는 다면적인 인물을 유연하게 표현한 그녀의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볼 수 있다.

 

  <맨발의 콘테사(1954)>에서 리타 헤이워스를 모델로 한 스타 역으로 빛나는 연기를 보여 주었는데, 그 역을 통해 오히려 개인적이고 직업적인 면에 관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듯했다. 1955년에 시나트라와 이혼한 후 스페인으로 떠났고, 이후 여러 편의 영화를 해외에서 만들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1957)>와 <그날이 오면(1959)>과 <이구아나의 밤(1964)> 같은 여러 명의 스타가 출연하는 영화에서는 그녀의 열정적이고 공격적인 매력이 완벽하게 맞아들었다.

 

  본 사람은 많지 않은 <탐 린(1970)>에서는 마녀 같은 연기를 잘 해냈고, <대지진(1974)> 과 <카산드라 크로싱(1976)>에서는 용감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1968년에 런던으로 옮겨가 말년을 거의 은둔자로 살아갔다. 1989년에 뇌졸중이 일어나 침대 신세를 지게 되었고, 병원비는 세 번째 남편이었던 시나트라가 모두 대주었다.

 

  "스타덤에 대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결코 원하지 않았던 모든 걸 내게 주었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501 영화배우』, 마로니에북스, 2008.

 

  아래는 두산백과에서 가져온 그녀의 생애다.

 

  미국의 영화배우. <살인자들>에서 버트 랭커스터의 상대역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헉스터> 등에서 허스키한 목소리와 매혹적인 자태로 195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섹스 심벌'로 꼽혔다. 이후 <모감보> 등에서는 성격배우로서 호평받았으며 아카데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었다.

 

 

 

 

  1922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스미스필드에서 가난한 소작인의 딸로 태어났다. 18세 때 뉴욕으로 가서 스크린 테스트를 받고, 특출한 미모 덕분에 MGM과 계약을 맺고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처음에는 주로 단역을 맡다가 <살인자들 The Killers>(1946)에서 버트 랭커스터의 상대역을 맡아 단숨에 스타덤에 뛰어올랐다.

 

  이어 <헉스터 The Hucksters>(1947), <원 터치 오브 비너스 one Touch of Venus> (1948), 뮤지컬 영화 <쇼보트 Show Boat>(1951),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1952), <맨발의 백작부인 The Barefoot Contessa>(1954) 등에서 주연을 맡았으며 허스키한 목소리와 매혹적인 자태로 195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섹스 심벌'로 꼽혔다.

 

 

 

 

  이후 <모감보 Mogambo>(1953), <보와니 정션 Bhowani Junction>(1956), <온 더 비치 on the Beach>(1959), <이과나의 밤 The Night of the Iguana>(1964) 등에서는 성격배우로 열연하여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모감보>에서는 클라크 게이블의 상대역을 맡아 1953년 아카데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하였다.

 

  1958년 MGM을 떠나 독립적으로 활동하면서 꾸준히 영화에 출연했지만 이전에 비해서는 활동이 두드러지지 못했다. 배우 미키 루니(Mickey Rooney), 밴드 리더 아티 쇼(Artie Shaw),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와 세 번 결혼했으며, 『애바, 나의 이야기 Ava, My Story』라는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상 [두산백과]에서

 

  아래는 한창호 기자의 배우 스케치

 

  [한창호의 오! 마돈나]

 

  아프리카의 밤과 어울리는 이국정서

 

  에바 가드너는 팜므파탈로 등장했다. 필름누아르의 고전인 <살인자들>(감독 로버트 시오드막, 1946)을 통해서다. 가드너는 순진한 청년 버트 랭커스터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여성으로 나왔다. 라틴 여성 같은 열정, 너무나 완벽하게 잘생긴 얼굴, 군살 없는 몸매, 허스키한 목소리 그리고 범죄의 어둠에 그늘진 인상까지, 가드너는 필름누아르를 위해 태어난 배우처럼 보였다. 그 인상이 강렬해서인지 가드너는 이후에도 주로 ‘일탈한’ 혹은 ‘다른’ 여성을 연기하며 경력을 쌓았다. 가드너의 스타 이미지는 미국이 아닌 곳, 이를테면 아프리카, 멕시코 같은 ‘다른’ 지역을 배경으로 할 때 더욱 돋보였다.

 

  헤밍웨이와의 인연

 

  가드너에겐 헤밍웨이가 행운의 길잡이였다. 단역으로 떠돌던 가드너를 배우로 각인시켜준 작품인 <살인자들>은 헤밍웨이의 단편이었고, 그녀를 대중적인 스타로 주목받게 한 작품도 헤밍웨이의 소설을 각색한 <킬리만자로의 눈>(1952)이었다. 헤밍웨이의 작품 속 분신인 작가 해리(그레고리 펙)가 파리의 재즈클럽 바닥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려고 할 때, 그 담뱃불을 빌리려고 옆에서 얼굴을 내미는 신시아(에바 가드너)의 클로즈업은 외국 또는 외지에서의 설렘으로 기대할 수 있는 ‘다른’ 사랑의 표상이었다. 가드너는 자유분방하고, 모험심 많고, 성적 매력도 넘쳐 보였다. 아마 많은 관객이 이때 가드너의 모습에 반했을 것 같다(히치콕의 1954년 작품 <이창>에서 그레이스 켈리가 잠자고 있는 제임스 스튜어트에게 키스하며 화면에 처음 등장하는 클로즈업 장면은 이 영화를 참조한 것으로 짐작된다). 감독 헨리 킹은 가드너의 예리한 얼굴선을 강조한 프로필 클로즈업으로 단숨에 그녀의 매력을 포착한 것이다.

 

  그레고리 펙과 에바 가드너의 스크린 커플은 시오드막이 <살인자들>의 성공 이후, 가드너를 다시 기용한 <위대한 범죄자>(The Great Sinner, 1949)에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도박꾼>을 각색한 영화인데, 여기서 펙은 역시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인 작가로, 그리고 가드너는 러시아 장군의 딸이자 도박중독자로 나온다. 말하자면 가드너는 러시아라는 이국의 여성이자 도박꾼이라는 일탈의 이미지로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이후 가드너는 미국의 표준적인 백인 여성으로 나와서 큰 인상을 남긴 경우는 거의 없다. 늘 이렇게 외국에서 혹은 바깥에서, 다른 이미지로 등장할 때 더 큰 사랑을 받았다.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킬리만자로의 눈>은 아프리카에서의 현지 촬영으로도 유명하다. 실제로 헤밍웨이가 사파리 사냥을 좋아했고, 영화는 작가의 생생한 경험을 표현해놓았다. 가드너가 카키색 사냥복을 입고 초원과 밀림에 서 있을 때, 그곳이 그녀에겐 미국의 대도시보다 훨씬 더 어울려 보였다. 자연스럽고, 그래서 간혹 야만적이고, 무엇보다도 성적 에너지가 넘쳤다. 헤밍웨이의 작품에 연속해서 출연하며 가드너는 실제로 그와 친분을 트기 시작했다.

 

  <킬리만자로의 눈>은 헤밍웨이의 취향에 따라 아프리카, 프랑스, 스페인 등을 배경 삼아 촬영됐다. 반면에 존 포드의 <모감보>(1953)는 전적으로 아프리카에서만 진행된다. 사파리 사냥 사업을 하는 남자(클라크 게이블), 부자 추장을 찾아 그곳에 도착한 과거가 수상한 여성(에바 가드너), 그리고 인류학자의 아내인 순진한 여성(그레이스 켈리) 사이의 삼각관계를 다룬다. 마초맨인 게이블을 가운데 놓고, 가드너와 켈리는 당대의 표현을 쓰면 라틴계 백인/순수 백인, 경험 많은/순결한, 야만적인/우아한, 육체적/정신적 등의 이항대립으로 비교된다.

 

 

                                                              그레이스 켈리와

 

  배우의 비중을 놓고 보자면 이 영화는 게이블과 가드너 사이의 모험으로 예상됐는데, 영화는 사실 신인배우 켈리(그녀의 데뷔작)의 등장을 알리는 작품이 됐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켈리의 순수한 이미지가 더 커 보였다. 아마 그래서 가드너는 포드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훗날 포드를 가리켜 “지상에서 가장 비열하고, 완전한 악당인데, 하지만 숭배한다”라고 말했다. <모감보>에서 창백한 피부를 가진 그레이스 켈리와 비교되면서, 가드너의 이국적인 이미지는 더욱 굳어졌다. 가드너는 ‘아프리카의 밤’과 어울리는 스타로 자리를 잡았다.

 

  존 포드와 존 휴스턴

 

  가드너가 자주 들은 질문은 스페인계냐는 것이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그런 혈통을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가드너는 남부의 평범한 미국인의 딸로 태어났다. 부모는 목화와 담배 밭에서 일하는 가난한 농부였다. 가드너는 7남매의 막내였고,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16살 때, 아버지가 죽은 뒤 가드너는 자기 앞길을 스스로 헤쳐 나가야 했다. 뉴욕에 사는 언니 집에 놀러갔다가, 사진작가였던 형부의 권유로 얼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형부는 그 사진을 윈도에 전시했고, 가드너의 빛나는 외모는 곧 할리우드 에이전트의 눈에 띄었다.

 

  시오드막 감독에 의해 주목받기 시작한 가드너는 1950년대 들어 자신의 전성기를 열었다. 대부분 이국정서를 자극하는 캐릭터로 나온 작품에서다. <쇼 보트>(감독 조지 시드니, 1951)에선 흑인 피가 섞인 인물로, <맨발의 백작부인>(감독 조셉 맨케비츠, 1954)에선 스페인의 집시 여인으로, <보와니 분기점>(감독 조지 쿠커, 1956)에선 영국과 인도의 혼혈 여성으로 등장했다. 헤밍웨이 작품에 세 번째로 출연한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감독 헨리 킹, 1957)는 스페인에서 주로 촬영됐는데, 가드너는 헤밍웨이의 영화 속 분신인 제이크 반스(타이론 파워)의 색기 넘치는 파트너로 나왔다. 이 영화를 마친 뒤, 가드너는 당시의 남편이었던 프랭크 시나트라와 이혼했다. 그러고는 헤밍웨이가 있는 스페인으로 떠났다. 두 사람은 자주 대중에게 목격됐는데, 하지만 늘 서로를 친구로 소개했다.

 

  40대 이후, 곧 여배우로서 주연의 자리에서 내려올 때, 가드너가 만난 감독이 존 휴스턴이다. 멕시코의 아름다운 해변을 배경으로 현지 청년들과 자유분방한 관계를 맺는 <이구아나의 밤>(1964)은 가드너의 이국정서 캐릭터가 없었다면 외설로 폄하됐을지도 모른다. 휴스턴 특유의 위험한 윤리의 드라마는 가드너의 이국적인 캐릭터에 의해 큰 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협업은 <천지창조>(1966), <법과 질서>(1972)로 이어졌다.

 

  에바 가드너는 할리우드의 전통적인 여성 이미지와 대척점에 선 인물로 사랑을, 또 보기에 따라서는 차별을 받았다. 순응적인 여성과는 다르기 때문에 매력적이었고, 바로 그런 이유로 거부되기도 했다. 하지만 가드너가 영화사에 남아 있는 것은 바로 그 다름의 매력이 더 크기 때문일 터다.

 

  충격적인 에바 가드너 자서전

 

  [마이데일리 = 남안우 기자]

 

  전설적인 글래머 여배우인 에바 가드너의 충격적인 과거 애정편력이 담긴 자서전가 나올 예정이어서 관심을 모은다. 해외 연예뉴스 사이트 레이더 온라인은 왕년의 대배우 미키 루니와 프랭크 시내트라 등과의 생생한 연애 결혼생활이 포함된 이 책(Ava Gardner : The Secret Conversations)은 가드너 생전에 낼 예정이었으나 보류됐다가 임종자리에서 그녀의 얘기를 전해들은 대필작가 피터 에반스에 의해 오는 7월 3일 출간될 예정이다.

 

  매체는 에바 가드너가 알코올 중독으로 무일푼일 때인 지난 1988년경 돈이 필요해 임종직전 자신의 결혼생활과 연애 편력을 고백한 책을 낼 결심을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계획을 곧 취소했고 에바 가드너는 지난 1990년 세상을 떠났다. 이를 피터 에반스가 당시 임종자리에서 녹음한 테이프를 23년 만에 꺼내 지난해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 것.

 

  1922년생인 에바 가드너는 당대의 최고 글래머 스타로 클라크 게이블과 출연한 <모감보(Mogambo)>, 그레고리 펙과의 <킬리만자로의 눈(The Snows of Kilimanjaro)>, 버트 랭카스터와의 <킬러스(The Killers)> 등의 영화에서 볼륨감 넘치는 육체파 매력을 보여주며 당시 세계 남성 팬들의 큰 인기를 모았었다.

 

  책에서 그녀는 첫 남편인 배우 미키 루니에 대해 소상히 밝힌다. 두 사람의 결혼은 당시 최고 글래머 여배우가 최고 단신 160cm의 코미디 배우 미키 루니와의 결합이라 큰 관심을 모았다. 에바 가드너는 그의 별명이 ‘미키 하드-온(Hard-On, 발기)’이었다고 폭로하며, “나를 볼 때마디 미키는 ‘너만 보면 하고 싶다’고 계속 말해왔다”고 한다.

 

 

                                                       미키 루니와 함께

 

  작가 에반스에 따르면 “당시 가드너는 18세 처녀였는데, 그녀는 ‘자신을 계속 쥐어짜는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는 것. 하지만 미키 루니는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돼 ‘할리우드 사상 최고의 글래머 미녀’를 놔두고 병원서 맹장수술을 받고 있는 사이 딴 여자와 놀아났다는 것.

 

  그녀는 영화 제작자이자 항공업계 거물이었던 하워드 휴즈와도 염문을 뿌렸는데, “매우 거슬리는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털어놨다.

 

  에바 가드너는 당시 밴드 리더였던 아티 쇼와 두 번째 결혼했지만 ‘불리(Bully)’라고 부를 정도로 자신을 괴롭혀 곧 이혼했다. 직후 그녀는 가수 겸 배우였던 프랭크 시나트라와 배우 로버트 미첨과 동시에 연애를 했다. 그때 두 사람 다 유부남이었고, 가드너는 미첨에 더 빠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첨은 가드너를 볼 때마다 바른생활 사나이처럼 굴었고, “연애경쟁을 하려면 한사람은 죽어야겠구먼”이라면서 시나트라와의 경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고 한다. 로버트 미첨은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에서 마릴린 먼로와 공연한 당대 터프가이 스타였다.

 

 

                                                      프랭크 시나트라와 함께

 

 

 

  결국 시나트라는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1957년 최고 섹시스타 에바 가드너와 할리우드 사상 가장 떠들썩한 결혼식을 올렸다. 우여곡절의 결혼생활 끝에 둘은 이혼했지만, 시나트라는 나중 가드너가 병에 걸려 곤경에 처했을 때 돈을 대주었다고도 한다.

 

  이밖에 수많은 남성 편력 가운데, 조지 C. 스코트와의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조지 C. 스콧은 1970년 영화 <패튼 대 전차군다(Patton)>에서의 열연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지명됐지만 수상을 거부한 사건으로 유명한 성격파 배우. 에바 가드너는 그와 영화 <천지창조(The Bible in The Beginning)>에서 공연했는데, 여기서 만나 연애했지만 자주 폭행을 가해 입원까지 했을 정도라고 고백했다.

 

  가드너의 자서전은 오는 7월 3일 정식 출간될 예정이지만, 일부가 이미 유출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남안우 기자 naw@mydaily.co.kr

 

  에바 가드너의 사진을 스무 장 모아봤다.

 

 

 

 

 

 

 

 

 

 

 

 

 

 

 

 

 

 

 

 

 

 

 

 

 

 

 

 

 

 

 

 

 

 

 

 

 

 

 

 

 

                                <이구아나의 밤>(1964)에서 리처드 버튼과. 40대 초반밖에 안 됐는데 어느새 노화가 느껴진다.  

 

출처 : 이승하 : 화가 뭉크와 함께 이후
글쓴이 : 이승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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