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호가 화경당和敬堂인 하회마을의 명문가 류씨 집안 고택은 이 마을 북촌을 대표하는 큰 집이라 해서 ‘북촌댁’이라 이름 지어졌다. 더불어 ‘적선지가積善之家’(착한 일을 많이 한 집)로 잘 알려져 있다. 착한 일을 한 집이라…. 북촌댁 솟을대문 바깥에 인접한 아홉 채의 초가가 이를 증명하는 첫 번째 단초다. 보통 양반가에서는 대문가에 행랑채를 두어 집안에서 부리고 있는 노비를 기거하게 하는데, 북촌댁의 노비들은 모두 대문 밖에서 살림을 사는 외거外擧 노비였다. 비록 노비였지만 이들 역시도 일가를 이루고 하루 일과를 마치면 주인집과는 별도로 자신만의 일상을 꾸리도록 한 상전의 아량은 북촌댁을 처음 일군 류사춘 공과 그의 아들 학서 류이좌 선생부터 이어져 내려왔다. 비단 거느리고 있는 몸종에게만 ‘베풂’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북촌댁 뒷간은 흥미롭게도 담장 안과 밖 사이에 걸쳐져 있다. 뒷간의 문이 담장 안에도 밖에도 있는 기이한 모습. 이는 북촌댁 사람들은 물론 길가는 이들도 급할 때 누구나 뒷간 사용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그 발상이 유머러스하면서도 훈훈하다. 정조대왕 당시 예조*호조 참판을 지낸 고관대작 류이좌 선생이 이처럼 지나는 행인의 말 못할 사정에도 마음을 썼으니 이 댁을 가히 적선지가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겠다.
(왼쪽) 하회마을 북쪽의 부용대芙蓉臺에서 바라보자면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휘감아 돌면서 흐르고 있다. 북촌댁 큰사랑 뒤편의 3백여 년 된 소나무도 강줄기의 흐름과 같은 형상으로 성장했다. 절묘한 인연이다.
(왼쪽) 중간사랑 화경당에서 바라본 북촌유거 전경. 큰사랑인 이곳은 두리기둥에 팔작지붕, 조선 철종 당시 명필인 해사 김성근 선생의 글씨가 새겨진 현판 등으로 풍모를 갖추고 있다. (오른쪽) 북촌유거 누마루는 동쪽으로 하회의 주산主山인 화산花山, 북쪽으로는 부용대와 낙동강, 남쪽으로는 남산과 병산 등 하회마을의 ‘명풍광’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명당이다.
이 댁 류씨 집안의 자손들에게 대물림되었던 것은 비단 유전자뿐만은 아니었다. 정조 21년에 시작 철종 13년 완공까지, 류사춘 공이 시작해서 아들 류이좌 선생과 증손 류도성 선생까지 3대에 걸쳐 65년 동안 이 집을 짓는 데 공을 들였던 것. 을해년 류도성 선생의 일화는 선대의 마음 씀씀이 역시 고스란히 물려받았음을 알려준다. 당시 엄청난 홍수로 하회마을을 돌아 흐르는 강물이 넘쳐 흘러 마을 사람들이 강물에 떠내려간다는 소식이 들리자 류도성 선생은 주저 없이 집 안에 쌓여 있던 춘양목 일체를 강물에 띄워 일부는 뗏목으로 사람을 구하게 하고 일부는 불을 질러 한밤중 구조 작업을 대낮처럼 환하게 했다. 이때 강물에 던져졌던, 수많은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던 춘양목은 선대로부터 이어서 짓고 있는 집을 완공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마련해놓았던 귀한 건축자재. 지금처럼 길 잘 뚫린 도로로 운전을 해도 무려 왕복 두 시간이나 넘게 걸리는 봉화에서 공수, 하나하나 돌판 위에 찌고 말리고 다시 마당에 널고 말리며 수고스럽고 정성스럽게 만들어놓은 나무들을 마을 사람을 위해 단숨에 던진 류도성 씨의 도량과 배포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하회마을의 위대한 전설로 남아 있다.
하회마을 북쪽의 부용대芙蓉臺에서 바라보자면 낙동강이 마을을 휘감아 돌면서 굽이쳐 흐르고 있다. 북촌댁 큰사랑 뒤편의 3백여 년 된 소나무가 강줄기와 같은 형상으로 성장했다. 절묘한 인연이다.
(왼쪽) 북촌댁의 안채는 하회마을 사가私家 중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로 대갓집의 위엄이 명백히 감지된다. 중앙에 마당을 두고 전체 평면이 ‘ㅁ’자형으로 부엌, 안방, 대청, 고방, 윗상방, 툇마루, 아랫상방 등이 갖춰져 있다. 주인 류세호 씨는 이곳에서 기거한다. (오른쪽) 큰사랑 북촌유거의 대청마루. 액자 속 붉은 홍패는 조선시대 과거급제자에게 국왕이 내린 합격증으로 이 집의 근간을 세운, 집주인 류세호 씨의 7대조 류이좌 선생이 정조대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것. 현판에 새겨진 ‘석호’는 5대조인 류도성 선생의 호. 큰사랑의 방과 대청 사이에는 들어열개문을 달아 건물 전체가 하나가 된다. 창밖 풍경까지 치자면 방에서 낙동강 건너 부용대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류씨 집안에서 만들어낸 전설 또 하나. 다름 아닌 ‘쌍벽雙璧’이라는 말이다. 류이좌 선생과 그의 종형 류상조 선생이 나란히 과거 급제하자 류이좌 선생의 모친이 이를 기뻐하며 지은 시가 바로 쌍벽가다. 선을 베푸는 마음 씀씀이와 학식을 두루 갖춘 선대의 기품과 지조가 이곳 북촌댁의 온전한 뿌리로 내려져 지금껏 하회마을의 명문 고택이라는 명망의 줄기를 뻗어나가고 있다. 북촌댁이 명문가가 되었던 것이 조상님의 은공 덕분이라면, 북촌댁이 2백여 년의 세월 후에도 여전히 명문 고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후손의 노고 덕분이다. 지금 북촌댁을 지키며 선대 명맥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이는 류이좌 선생의 7대손 류세호 씨와 그의 아내 김일주 씨. 요즘 살기 편하게 창문이라도 유리 창호를 달아보고 부엌도 신식으로 개조해볼 법도 한데, 류세호 씨에게는 어림도 없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엄두도 낸 적 없는 일이다. 한옥의 가치를 따질 때 무엇보다도 ‘역사성을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는가’를 으뜸으로 치고 있는 그이기에 1년 열두 달 행여 북촌댁이 상할세라 낡은 고택을 보수하는 와중에 행여 본모습이 다칠세라 몸 쉴틈 없이 집을 살피며 노심초사한다. 혹시 지식 짧은 후손 탓에 선대가 물려준 귀한 유산에 누가 될까, 전국의 대목, 와공, 미장공, 구들공, 석공 등 한옥 장인들을 스승으로 삼고 한옥에 대한 옛 문헌들을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수신와修身窩는 작은사랑으로 어려운 이웃을 생각해 언제나 삼가면서 겸손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는 적선지가積善之家로서의 마음가짐처럼 고스란히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1 집안의 손자가 기거하던 작은사랑에는 안채로 드나들 수 있는 쪽문이 달려 있다. 7세부터 남녀부동석이었던 시대, 어린 마음에 보고 싶은 어머니 품으로 남들 모르게, 언제든 갈 수 있도록 배려한 사랑채의 ‘사랑’ 문이었다. 2 북촌유거의 방은 ‘田’자형으로 되어 있다. 안채 역시도 이와 같은 구조로 방 하나를 4개로 나누어 자는 곳, 책 읽는 곳 등으로 구분하여 쓰도록 했다. 3, 4, 5 2백여 년 전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이 집에는 곳곳에 쓰임새 있는 살림공간들이 알뜰히 마련되어 있다. 큰사랑에는 방만큼이나 너른 다락, 안채 기둥 사이와 방에는 시렁 등이 있어 이불이며 세간 등을 챙기도록 했다. 6 북촌댁은 정조 시대 예조*호조 참판을 지낸 류이좌 선생의 7대손 류세호 씨와 그의 아내 김일주 씨가 지키고, 가꾸고 있다. 이들이 앉아 있는 곳은 북촌댁의 안채 툇마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