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남원 노치마을

tlsdkssk 2015. 8. 8. 08:20

[백두대간 특집] 산과 산을 잇는 어느 마을 이야기

백두대간 마루금이 지나는 '남원 노치마을' 월간마운틴 | 권상진 기자 | 입력 2015.08.07 10:14

 
노치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큰당산은 마을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신희수 기자
백두대간 북진의 시작점이 되는 지리산. 산청 중산리에서 시작해 천왕봉, 노고단, 고리봉을 거쳐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길에는 자그마한 한 마을이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백두대간 마루금이 지나는 유일한 마을’인 남원 노치마을에는 산과 산을 이어주던 마을과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리 없이 흐른다.

남원 시내에서도 꼬불꼬불 산길을 차로 30분 더 달려야만 보이는 노치마을. 예전 지리산의 고리봉과 만복대 일대에 갈대가 많아 ‘갈재’라 불린 노치(蘆峙)마을은 이제는 ‘백두대간 내 유일 마루금 마을’이라는 말이 더 많이 따라붙는다. 지리산을 품고 백두대간의 역사와 발자취를 함께 해온 노치마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살며시 마을 어귀로 들어선다.

마을회관 옆 작은당산에는 남원문화원에서 설치한 백두대간 안내석이 세워져 있다. ⓒ신희수 기자

고려시대 절터였던 명당에 자리 잡은 마을

마을의 원로 박정동 할아버지는 60여년의 세월을 마을과 함께 했다. ⓒ신희수 기자
'거, 어떻게 온 양반이유?' 보슬비가 흩날려 정적이 내려앉은 마을을 조심스레 둘러보는데 문득 등 뒤에서 불호령 같은 물음이 들린다. 마치 잘못을 하다 들키기라도 한 마냥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마을 가장 높은 곳의 집 대문에 머리가 희끗하고 왜소한 어르신이 서 있다. 마을을 찾은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자 '그럼 잠깐 앉았다 가'라며 자신의 집 거실로 안내한다. 마침 안주인께서 깻잎부침을 노릇노릇 부쳐내고 있어 고소한 냄새가 방 한가득이다.

'내가 1928년생이니께 얼른 나이를 따져보면은 시방 팔십여덟이여.' 박정동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원로. 그는 이곳 출생은 아니지만 1956년 군 제대 후 내려와 지금까지 60여년을 이 마을과 함께했다. 그간 노인회장을 18년 동안 맡을 정도로 마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인물이다.

'여가 말하자면 옛날 절터라. 아주 옛날에 한 스님이 여기다 절을 지은 것이제. 앞뒤로 산이 있으니까네 이보다 좋은 곳이 어딨었겄어. 그때 여기 마을 중앙에 있는 샘도 판 것이여. 그러다 시간이 지나 절이 없어져버리고 정씨가 여 들어와 살면서부텀 마을이 된 것이제.'

고려시대 때 스님들이 팠다고 전해지는 노치샘은 마을 사람들의 중요한 식수원이었다. ⓒ신희수 기자
박정동 할아버지가 옛 선조들에게 전해들은 마을의 탄생이야기를 전한다. 그의 말처럼 실제로 노치마을의 형성은 역사 자료에도 정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오래 전의 이야기다. 절이 없어진 이후 조선시대 초에 경주정씨(慶州鄭氏)가 이곳에 정착하고 이어 경주이씨(慶州李氏)가 들어와 살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질 뿐이다. 다만 형성 당시 마을에 심은 소나무와 느티나무의 수령이 약 400~600년 사이(한국환경생태학회 2008년 연구자료)가 된다 하니 그 역사가 깊음은 분명하다.

'우리 부락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디 그것이 뭐다냐 하면은, 옛날에 민씨(閔氏)라는 사람이 여기에 살았는디 그 사람이 그지였어 그지. 그런데 어느 겨울날 그 사람이 그만 죽어버렸다고. 그래서 부락민들이 불쌍한 그 사람을 산에다 묻어줬는디, 그 자리가 바로 명당이었다는 것이여. 그 뒤로 후손이 번창하고 마을도 흥했다지 뭐여.'

할아버지가 풀어놓은 신화 같은 이야기는 그저 허한 말만은 아니다. 노치마을 뒤로 솟아있는 수정봉은 마치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갈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민씨가 바로 이 수정봉 어딘가에 묻혔다. 알고 보니 그곳은 곧 ‘용은 용인데 주인이 없다’는 황룡무주(黃龍無主)의 명당이어서 그 뒤로 그의 후손들은 대대손손 번창했다 전해진다. 실제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독립운동가 민영환(閔泳煥, 1861.7.2~1905.11.30)이 그의 후손 중 한명이라니 사실이 바탕된 이야기인 것이다.

마을 어귀로 들어오는 버스. 하루에 5번 오가는 이 버스는 마을 주민들의 중요한 이동수단이다. ⓒ신희수 기자
이처럼 노치마을은 백두대간 중에서도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예로부터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 통치하던 시절에는 백두대간의 맥을 끊으려 마을에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박정동 할아버지는 이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일본놈들이 그렇게 우리를 괴롭혔제. 여기 지리산을 빨치산이라 하면서 젊은 사람들을 쏴죽이고 부락을 홀라당 불태워버렸당께. 그뿐이당가, 이짝에서 높은 사람이 나오지 못하게 맨들려고 부락에 커다란 목돌을 박아버렸제. 천하의 나쁜놈들이여.'

일제는 수월한 통치를 위해 국토조사를 실시하고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백두대간에 쇠말뚝이나 목돌을 설치했다. 백두대간의 목 부분에 해당하는 노치마을에도 방죽을 파고 그 안에 목돌을 박아 숨을 못 쉬게 했던 사실이 나중에서야 드러났다. 정확히 언제 심어진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마을 일대의 경지정리를 통해 발견된 이 목돌은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과 후손들의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해 지난 2013년, 남원문화원의 주도 하에 마을 정자 옆으로 전시되었다.

일제가 백두대간의 혈맥을 끊으려 마을에 설치했던 ‘목돌’은 현재 작은당산 옆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은 2013년, 발견된 목돌을 옮기는 모습. (남원문화원 제공)

백두대간 자락에서 올리는 마을 당산제

박정동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는 곧장 마을 구석구석을 둘러본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갖가지 크기의 돌로 조탑이 쌓여있고, 더 안쪽으로 들어서면 작은당산인 느티나무가 서 있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옛 마을 주민들의 식수터였던 노치샘이 흘러 백두대간을 지나는 이들의 마른 목을 적셔주기도 한다. 그 위로 조금 더 올라가면 마을의 가장 높은 곳인 큰당산의 소나무 4그루가 우뚝 서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위해 당산제를 올린다.

당산제는 마을을 지켜주는 산에 보답하는 의미로, 마을이 형성되던 초기 당산나무를 심으면서부터 시작됐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이 역시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단정하기 어렵다. 옛날에는 음력 1월 1일에 당산제를 지내왔으나 자손이 없는 마을 주민 두 명이 세상을 떠나면서 당산에 필요한 재산을 기증해 그에 보답하고자 한동안 그들의 기일과 가까운 백중(7월 15일)에 제를 지내게 되었다.

노치마을 사람들은 큰당산에서 매년 당산제를 올리고 있다. 사진은 2011년 당산제의 모습. (남원문화원 제공)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는 유복수 할아버지(74)는 누구보다 당산제에 애정이 많다. 3번에 걸쳐 총 10년 동안 마을 이장을 맡은 경력이 있는 그는 재임기간 중 당산제에 대한 내용을 책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예전 당산제는 말도 못했제. 제를 올린다 하면은 며칠 전부터 샘물을 모두 퍼내고 아무도 못 들어가게 했당께. 그러고는 다시 고이는 첫 물로 밥을 지어 제단에 올렸제. 제관도 아무나 못혀. 초상난 데 가지 않은 깨끗한 사람들 몇 명만 제관으로 뽑고, 제수를 맨들어도 제를 올리기 전에는 맛도 안 뵐 정도로 아주 엄하게 했제. 지금은 그때에 비하믄 아주 수월치.'

전 마을이장이었던 유복수 할아버지는 재임기간 중 마을 당산제의 내용을 담은 책 편찬 사업을 펼쳤다. ⓒ신희수 기자
그의 말처럼 노치마을 당산제는 전통이 깊은 만큼 아주 엄중하게 치러졌다. 옛날에는 마을 유일의 식수였던 노치샘을 며칠간 마시지 못하게 했어도 마을 사람 어느 하나 군말 없이 따를 정도였다. 제관 역시 3일 전부터 선발했고 당산나무와 노치샘에 금줄을 쳐 외부인이나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당산제 당일에는 농악패가 마을을 돌며 노치샘에서 굿을 먼저 치르고 큰당산으로 오르면 제관들이 뒤이어 합류해 축문을 읊으며 제를 올린다. 큰당산에서의 제가 끝나면 다시 농악패와 함께 마을 모정 앞 작은당산으로 내려와 농악을 치며 당산제를 마무리한다.

몇해 동안 당산제의 맥이 끊긴 적도 있었지만 그 가치를 되살리고자 최근에는 남원시와 산림청, 남원문화원 등의 행정기관이 마을과 ‘당산제 추진위원회’를 결성해 매년 정월 초순에 공동으로 제를 지내고 있다. 이처럼 노치마을 당산제는 단지 한 마을의 행사가 아닌 ‘백두대간 내 중요한 역사’인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주된 업은 벼농사. 마을 곳곳에 심어진 벼는 여름을 맞아 푸름을 더하고 있다. ⓒ신희수 기자

백두대간과 노치마을 사람들의 삶

'이짝으로는 우리 주천이고 저짝으로는 운봉이여. 이 질(길)이 구분을 짓는겨, 이 질(길)이.' 마루금이 정확히 어디냐는 물음에 선뜻 알려주겠다고 앞장선 유복수 할아버지는 골목을 돌고 돌아 마을 입구로 향했다. 조탑 옆으로 난 길이 바로 백두대간 마루금이다. 마을 앞에 솟은 고리봉에서부터 이어진 마루금은 마을을 지나 큰당산 뒤로 난 수정봉을 향해 올라간다. 두 마을이 바로 옆에 붙어있어도 이 선을 기준으로 다른 마을이 된다.

마을 어귀에 쌓여있는 조탑. 오른쪽으로 보이는 길로 백두대간 마루금이 지나간다. ⓒ신희수 기자
'그러니께 옛날에 이짝은 남원군, 저짝은 운봉군이었제. 군이 달랐던거라. 아무리 가까이 살 부대끼고 살았어도 동네가 다르니 이장선거라도 할라치믄 우리는 우리대로 저짝은 저짝대로 따로 해버렸던 것이제. 말소리도 이짝 사람하고 저짝 사람하고 쪼끔 달라. 저짝은 경상도와 가까우니께.'
최순자 이장이 운영하고 있는 마을 쉼터에는 이곳을 다녀간 이들이 남겨놓은 메모가 한가득 걸려 있다. ⓒ신희수 기자
지금의 남원 운봉읍은 신라시대 때는 천령군(지금의 경남 함양군)에 속했고, 고려시대 때 남원부(府)로 편입되었는데 군(郡)은 달랐다. 이후 1896년 운봉군으로 승격되고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며 당시 남원군에 편입된 것이다. 그만큼 주천과 운봉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달리한 세월이 길었다. 마루금이 두 생활권을 만든 것이다. 이처럼 백두대간은 노치마을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유복수 할아버지의 할머니는 운봉에서 주천으로 넘어와 터를 잡았다. 당시만 해도 집안을 밝혀주는 유일한 수단은 호롱불이 전부. 그나마도 불을 켜기 위해서는 기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매년 가을이면 앞산에 올라 때죽나무와 쉬나무의 기름을 채취해 사용했다. 우리나라에 석유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은 이 기름을 사용해 불을 밝혔다. 지금도 유복수 할아버지의 집 안뜰에는 당시 할머니가 산에서 옮겨 심었던 때죽나무가 일부 남아있다. 백두대간 산골마을의 생활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대목이다.

노치마을에는 과거와는 다르게 최근 마을을 찾는 외부인들이 많아졌다. ‘백두대간’이라는 개념이 재조명되기 시작하면서 종주를 하는 이들이 마을을 지나는 것이다. 특히 지난 2008년 개통된 ‘지리산 둘레길’의 영향으로 마을 어귀를 지나는 이들도 부쩍 늘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남원시는 마을회관 옆으로 공중화장실을 설치해주었다.

올해 취임한 최순자 이장은 노치마을의 역사와 이야기를 담은 콘텐츠 제작을 구상하고 있다. ⓒ신희수 기자
조용했던 마을에 사람이 늘고 외부시설이 생겨 싫을 법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마저도 마을의 일부라 생각하고 오히려 깨끗이 유지하고 있다. 남편을 따라 10년 전 이곳에 오게 된 마을 이장 최순자(54)씨는 이와 관련한 입장이 뚜렷하다.

'우리 마을은 예로부터 깨끗하고 조용한 마을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사람이 많이 찾아들고 그런다 해서 저희가 그에 맞춰서 삶의 모습이 바뀌진 않아요. 이곳에 오래 사신 분들도 그렇고 얼마 안 된 저도 그렇고 그저 마을을 아끼고 사랑하는 거죠.'

그의 말처럼 노치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산과 산을 이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욱 짙어질 것이다. 취재를 마치고 떠나는 길에 돌아본 노치마을에는 처음 왔을 때처럼 웅장한 고요함이 걸려있다.

올해 8월말 개관을 앞둔 ‘백두대간 생태 전시관’에는 노치마을이 소개되어 있다. ⓒ신희수 기자

Information - 노치마을

교통

남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노치마을까지 가는 버스가 2대 있다. 112번 버스는 오전 6시 25분과 오후 7시, 하루 2차례 운행되며 약 50분이 소요된다. 102번 버스는 오전 7시 45분과 오후 1시, 오후 5시 10분 하루 3차례 운행되며 약 1시간이 소요된다.

민박

노치민박(오명례) 063-625-1239. 숙박 3만원, 식사 6천원(산채정식).

권상진 기자 / dhunhil@emountain.co.kr

'사랑방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성독립운동가  (0) 2015.08.10
[스크랩] 조선시대의 생활상(펌)  (0) 2015.08.09
아, 데이지  (0) 2015.07.29
오마이...  (0) 2015.06.20
노인 학대  (0) 2015.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