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1853.3. 30 ~ 1890. 7. 29)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명한 화가가 또 있을까?
그의 작품들은, 그림에 문외한인 내게까지도 너무나 익숙해서 <별이 빛나는 밤>이나 <싸이프러스>,
<까마귀가 있는 밀밭>,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노란집>, <해바라기>, <자화상>, <의사 가셰의
초상화>, <감자먹는 사람들>,<아를르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등등, 그 이름만 들어도 화폭에
담긴 그림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연히 떠오르곤 한다.
고흐의 화집을 펴볼 때마다 화집 속의 풍경들은 내게 안식을 준다. 그 중에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둘만 고르라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별이 빛나는 밤>과 <구두 한 켤레>를 고를 것이다.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해선 새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연작 형태로 이루어진 <구두 한 켤레>
에 대해선 나름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고흐는 우리에게 일곱 켤레의 구두를 남겼다.
그 구두들은 한결같이 낡고 구겨지고 밑창이 다 닳아빠진 구두들로, 바닥에 박힌 구두징들이
밖으로 튀어나와 우리를 눈물겹게 한다. 또한 구두 주인의 힘겹고 고단했을 삶이 느껴져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그리고는 곧 추레하고 볼품없는 그 구두를 바라보면서 깨닫게 된다. 고흐가 그린 저 구두속에는
불행하고 절박했던 고흐 자신의 삶의 애한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 작품을 보면서 줄곧 생각나는 싯귀절이 하나 있었다.
손택수의 <길이 나를 들어 올린다> 라는 제목의 시인데 별로 길지 않아서 잠깐 적어 보련다.
길이 나를 들어 올린다 / 손택수
구두 뒤축이 들렸다 닳을 대로 닳아서
뒤축과 땅 사이에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공간이 생겼다
깨어질 대로 깨어진 구두코를 닦으며
걸어오는 동안, 길이
이 지긋지긋한 길이
나를 들어 올리고 있었나 보다
닳는 만큼, 발등이 부어오르는 만큼 뒤꿈치를 뽈끈
들어 올려주고 있었나 보다
가끔씩 한쪽으로 기우뚱 몸이 기운다는 건
내 뒤축이 허공을 딛고 있다는 얘기
허공을 디디며 걷고 있다는 얘기
이제 내가 딛는 것의 반은 땅이고
반은 허공이다 그 사이에
내 낡은 구두가 있다
어쩜 이리도 고흐의 작품과 딱 들어 맞는 시인 건지...
만약 그 때 그 시절에 고흐가 이 시를 읽었더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모든 예술가들은 작품 속에 자신의 삶과 의식, 감정을 투영하며,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작품으로 분출해 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작 시리즈를 그렸을 무렵의 고흐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가슴이 시리다. 평생을 가난과 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불과 십여년
의 짧은 기간동안 인간으로선 감히 상상조차할 수 없는 다작을 그려냈던 남자, 반 고흐...
고흐의 구두 한 켤레는 여러 학자들의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는데 그 중에서도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하이데거와 미국의 미술사학자 샤피로, 프랑스 철학자인
데리다의 싸움은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그들이 그처럼 논쟁의 한복판에 섰던 이유인 즉슨, 고흐의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론이
각자 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들을 통해 구두논쟁이라는 새로운 신조어가 탄생되었으니 그 시대 고흐의
작품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얼마나 컸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헌신짝 / 김상현
구두 밑바닥을 간다
돌부리에 차이고
진 땅, 마른땅을 가리지 않고
온몸으로 나를 지탱해주느라
한평생 땅에 코를 박고 지낸
구두 밑바닥
그의 최후가
아무 생각 없이
사납게 뜯겨져
쓰레기통에 던져진다
문득
누군가를 위해
저토록 굽이 달도록
헌신한 적이 있는가를
뉘우치며
버린 구두 밑바닥을 주워
다시 들여다보며
허무에 던져질
내 인생의 끝물을 생각한다.
아내의 구두 / 박정원
아내의 구두굽을 몰래 훔쳐본다
닳아 없어진 두께는 곧 아내가 움직였을 거리
넘어지지 않기 위해 한쪽으로만 기대었던 굽이
다른 한쪽 굽을 더 깊게 파이게 했다
덜 파인 쪽에 힘을 주면 굽의 높이가 같아질까
나를 받아주기 위해 제 몸만 넓혀갔지
헐렁헐렁한 건강 한 번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구두
밑창을 갈면 왠지 낯설 것 같은 구두, 버리면
지나간 가난이 서리발처럼 일어설 것 같아
신발장에 슬며시 들여놓는다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넣으며 눈물 흘렸을 때
군말없이 동행해주었던 구두
핼쑥해진 아내의 얼굴처럼 광택이 나지 않는 구두
아무렇게나 신어도 쑥쑥 들어가는 구두가
보약 한 번 먹이지 못한 아내 같다
키를 맞추겠다면서
높은 구두는 고르지도 않던 아내에게
숫처녀 같은 구두 한 켤레 사주고 싶다
헌 구두를 내려다보며 탄식함 / 이선영
세상이 만들어 낸 많은 신발들 속에서
나는 우연히 내 것이 되었던 몇 켤레의 신발들을 신고 이곳까지 왔다
그 중에는 아주 내 맘에 드는 것도 있었지만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신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신발들은 쉽게 닳았으며 결국은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나는 지금 내가 신고 있는 구두를 내려다본다
이 구두는 지나치게 낡았다
나의 험한 발걸음이 이 구두의 여린 몸을 망쳐 놓은 것이다
오 용서해 다오, 나를 만나는 게 아니었던 불운한 구두여
이 구두도 이제 버려질 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수한 신발들의 순결을 짓밟고 내가 당도한 이곳은 어디인가
나의 발걸음을 도왔던 청춘의 갖가지 신발들이여
그토록 힘들여 나를 데려다 놓은 곳이 고작 이곳이란 말인가
이곳 역시 잘못 든 길에 불과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여기까지 오는 데 그렇게 많은 신발들을 신고 버려야 했던 것처럼
이곳을 빠져 나가기 위해 나는 또 그렇게 많은 신발들을 신고 버려야 하는 것이다
내 낡은 구두에게 바치는 시 / 염명순
아직 더 닳아질 마음이 남아 있구나
갈 만큼 갔다고 생각했는데
못다 간 마음은 낡은 구두 속에서
거친 숨결을 고르고
내가 밟은 길들이 등뒤에서 나를 감아온다
내 발에 잘 맞는 구두일수록
나와의 은밀한 기억을 즐기고
내가 잠시 머물던 차양 낮은 골목골목에
머리를 맞대어 피던 채송화 봉숭아 같은 키 작은 꽃들
주머니마다 씨앗을 가득 채우며
다음해 봄날을 예감하고 있는지
벗어놓은 내 구두 속에서는
가끔 마른풀 냄새와 바람 소리가 났다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내가 가면 비로소 길이 되던
그런 날들도 있었다
구두는 내 그림자 뒤에 발자국을 새기며
아파오던 발가락의 추억을
아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지
어느새 내 발 모양을 그대로 닮아 있고
텅 빈 구두를 보면 한없이 적막해지는 날에
우리는 길이 아닌 곳에서도 자주
개망초꽃처럼 하얗게 흔들리다 돌아오곤 했다
함께 닳아 초라해진
내 낡은 구두를 신고
나는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고흐가 이 세상을 떠나던 날, 고흐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구두는 바로 이 구두뿐이었으리라
살가죽구두 / 손택수
세상은 그에게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맨발로 세상을 떠돌아다닌 그에게
검은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부산역 광장 앞
낮술에 취해
술병처럼 쓰러져
잠이 든 사내
맨발이 캉가루 구두약을 칠한 듯 반들거리고 있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
벗겨지지 않는 구두,
그 누구도
벗겨 갈 수 없는
맞춤 구두 한 켤레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네
죽음까지 껴 신고 가야 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