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세르반테스

tlsdkssk 2014. 6. 10. 08:35

“세르반테스의 삶은 온갖 사건과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에스파냐어권의 뛰어난 작가가 쓴 소설처럼

드라마틱하다. 그의 명성은 서양 언어권에서 단테, 셰익스피어, 몽테뉴, 괴테와 톨스토이가 보여주었던 탁월함처럼

영원한 것이다. (...) 세르반테스는 글 쓰는 방법을 알았고, 돈 키호테는 행동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오로지 서로를 위해 태어난 하나다.”(해럴드 블룸)

 


레판토의 외팔이, 에스파냐의 국민 작가로 거듭나다

 

[돈 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는 1547년 9월 29일,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 인근의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이지만, 훗날 먼 친척의 이름인 ‘사아베드라’(Saavedra)를 덧붙여 사용한 관계로 오늘날에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Miguel de Cervantes Saa vedra)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 의사였지만 경제적으로는 무능해서 1551년에는 빚 때문에 전 재산을 차압당하고 투옥되기까지 했다. 이후 가족이 바야돌리드와 세비야 등 여러 지역을 전전하는 와중에도 가정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세르반테스의 어린시절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예수회 계열의 학교를 다니면서 인문 교육을 받았으리라 추정될 뿐이다. 그가 19세 때인 1566년에 쓴 소네트가 최초의 창작으로 여겨지며, 1568년에 사망한 여왕 이사벨 1세를 추모하는 공동 작품집에 시 몇 편을 썼다고도 전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작가를 지망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이력은 오히려 군인이었다. 1569년에

세르반테스는 교황의 사절로 에스파냐를 방문한 추기경의 비서가 되어 이탈리아로 건너갔고, 베네치아에서 그곳에

주둔한 에스파냐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1571년 10월 7일, 베네치아와 제노바와 에스파냐의 연합군이 투르크 군과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격돌한 레판토 해전이 벌어졌다. 세르반테스는 전투 중에 가슴과 왼손에 총상을 입었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 왼손을 쓰지 못하고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5년이나 더 군인으로

복무하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28세 때인 1575년, 세르반테스는 드디어 퇴역을 결심하고 고향 에스파냐로 향한다.

그런데 출항 엿새 만에 그가 탄 배는 해적선의 습격을 받았고, 세르반테스는 졸지에 해적의 포로가 되어 알제리로 끌려간다.

 

 

 


해적이 요구한 몸값은 가난한 세르반테스의 가족이 결코 마련할 수 없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외부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게 되자 세르반테스는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네 번이나 감행됐던 탈출 시도는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그때마다 그는 혹독한 처벌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를 딱하게

생각한 알제리의 에스파냐 동포들이 몸값을 대신 지불해 준 덕분에 세르반

테스는 5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1580년 마침내 에스파냐로 귀국한다. 1584년에는 37세의 나이로 19세의 카탈리나 데 살라사르와 결혼한다.

 

군인 시절의 인맥을 이용해 공직으로 진출하려는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자,

생계가 막막해진 세르반테스는 소싯적의 글 솜씨를 발휘해 시와 희곡과

소설 등을 써서 팔았다. 1585년에 발표된 첫 번째 소설 [라 갈라테아]는

호평을 받았지만 큰 명성을 얻진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말단 관리가 된

세르반테스는 이후 10여 년간 무적함대의 물자 조달관으로, 그리고 나중

에는 세금 징수관으로 일했다. 그는 여러 번 비리 혐의로 고발당해

징역형을 받았는데, 그중 한 번인 1597년 가을에 세비야에서 옥살이를

하는 동안 [돈 키호테]를 구상했던 것으로 전한다.

 

세르반테스가 57세 때인 1605년에 출간된 [돈 키호테]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생활고로 인해 출판업자에게 판권을 넘겨버린 까닭에 경제적

이득을 얻지는 못했다. 말년에는 신앙생활에 전념해서 아예 수도회에

들어갔지만, 그런 와중에도 문필 생활을 병행하여 [모범소설집](1613),

[돈 키호테] 제2부(1615) 등의 작품을 연이어 펴냈다. 마침내 수도사로

정식 서원을 했을 즈음, 그는 이미 수종증이 악화되어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다. 1616년 4월 23일, 세르반테스는 69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흥미롭

게도 이 날짜는 당대의 또 다른 대작가 셰익스피어의 사망일과 똑같다.

 

 

 

이듬해에 간행된 유작 [사랑의 모험](1617)에는 저자가 사망하기 직전에 쓴 서문이 있는데, 그 마무리 대목은 마치 독자들

에게 보내는 유언처럼 들린다. “모든 시간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 끊어진 실을 이으면서, 내가

여기서 쓰지 않은 것들, 그리고 잘 어울렸던 부분들을 언급할 시간이 올 겁니다. 안녕, 아름다움이여. 안녕, 재미있는 글들

이여. 안녕, 기분 좋은 친구들이여. 만족스러워하는 그대들을 다른 세상에서 곧 만나길 바라면서 난 죽어가고 있다오!”

(조구호 외 옮김)

 

 

최초의 근대 소설 [돈 키호테]

에스파냐의 국왕 필리프 3세는 어떤 사람이 길에서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배꼽이 빠져라 웃어대는 꼴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건 미친 놈 아니면, [돈 키호테]를 읽는 놈이로군.” [돈 키호테]가 얼마나 탁월한 유머 소설인지를 보여

주는 일화다. 지금은 최초의 근대 소설이며, 에스파냐의 국민문학이며, 호메로스와 단테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버금가는

세계 문학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지만, 이 작품의 전편을 관통하는 분위기는 무엇보다도 ‘유머’임을 잊어서는 곤란하

리라. 원제가 [재기발랄한 시골 향사, 라 만차의 돈키호테]인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알론소 키하노라는 노인이다. 중세의 기사

모험담에 매료되어 정신이 나간 그는 낡고 녹슨 갑옷을 차려 입고, 늙고 말라빠진 말 로시난테에 올라타 기사로서의 편력에

나선다. 풍차를 거인으로 알고 덤볐다가 나가떨어지기도 하고, 여관을 성으로 착각하고 여관 주인에게 기사 작위를 받기도

하며, 죄 없는 시골 사람들을 적이며 마귀로 오인하고 덤벼들기도 한다.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폭력을 휘두

르기도 하지만, 대개는 엉터리 기사 행각을 재미있어 하고 도리어 놀려먹기도 한다.

 

[돈 키호테]는 출간되자마자 대단한 인기를 얻었고, 심지어 그 인기에 편승한 가짜 속편이 유통되기도 했다. 세르반테스는

그로 인한 불이익을 막기 위해 서둘러 진짜 속편을 펴냈는데, 일각에서는 [돈 키호테]의 제1부보다 제2부가 더 탁월한 작품

이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제2부에서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는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곳곳에서 환대를 받는데, 두 사람은 기회

있을 때마다 세상에 떠도는 가짜 속편을 비난하며 자신들이 ‘진짜’라고 주장한다. 돈 키호테는 속편에서도 여러 가지 모험을

즐긴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제정신을 되찾고 노환으로 사망한다.

 

 

 

클리프턴 패디먼의 지적처럼 [돈 키호테]는 오늘날 사람들이 “읽기보다는 인용하기를 더 많이 하고, 즐기기보다는 칭찬하기를 더 많이 하는 책”이다. 이것은 고전이라는 명성에 뒤따르는 불가피한 결과이기는 하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돈 키호테]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고전도 없다. 비록 완독한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지금까지도 돈 키호테는 ‘무모한 사람’의 대명사로, 산초 판자는 ‘우직한 부하’의 대명사로, 로시난테는 ‘볼품없는 탈것’의 대명사로 사용된다. 어느 정신 나간 노인에 관한 17세기의 소설이 얻게 된 이런 보편적인 인기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 소설의 제2부에서 돈 키호테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으려는 학사를 만류하던 한 인물의 반론은 이 소설의 매력을 한 마디로 설명해 준다. “돈 키호테가 그의 허튼짓으로 우리 모두를 재미있게 한 그 즐거움에 비하면, 그가 정신이 말짱해져서 얻는 이득은 그에 못 미칠 거라는 걸 모르세요? (...) 저는 돈 키호테가 절대 병이 나아선 안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가 건강해지면 그의 재치와 매력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그의 하인인 산초 판자의 재치까지도 잃게 될 테니까요. 그들의 재치 있는 말들은 어떤 것이든지 우울증 자체라도 즐거움으로 되돌려줄 능력이 있거든요.”(민용태 옮김)

 

하지만 오늘날 [돈 키호테]를 읽은 사람은 십중팔구 이게 과연 ‘유머 소설’인지 의구심을 품지 않을까? 왜냐하면 등장인물만 650여 명에 달하는 이 방대한 소설은 의외로 상당히 지루하기 때문이다.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의 여정 곳곳에 무려 일곱 편이나 되는 ‘곁다리’ 에피소드를 늘어놓았는데, 아마도 원고의 분량을 맞추기 위해 기존의 습작 단편을 원고에 포함시킨 까닭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런 곁다리 에피소드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이야기되는 동안,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는 거의 하는 일 없이 옆에 서서 듣기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돈 키호테]를 걸작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조차도 완독보다는 오히려 선독을 권한다. 클리프턴 패디먼은 [돈 키호테]를 읽을 때 곁다리 에피소드나 ‘시’가 나오면 무조건 건너뛰라고 조언한다(세르반테스야말로 역사상 “최악의 시인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서머셋 몸도 비슷한 견해를 밝히면서 역시 선독을 추천한 바 있다. 하지만 [돈 키호테]에는 이런 뚜렷한 단점을 능가하는 수많은 장점이 있다. 역대의 수많은 문학평론가들이 이 작품을 최고의 소설로 격찬하며, 세르반테스를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대작가로 인정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문학사적으로 [돈 키호테]는 ‘최초의 근대 소설’로 평가된다. 기사를 선망하는 주인공이 시대착오적인 행동으로 비웃음만

산다는 내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시대적으로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사조적으로는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나아가 이 소설은 독특하고 파격적인 서술 방식으로도 유명하다. 제1부에서는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저자가 개입하더니, 이 작품은 사실 자기가 어느 아랍인 작가의 책을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제2부에서는 아예 주인공들까지 합세하여 ‘[돈 키호테]라는 소설’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현대적인 ‘메타 픽션’의 선구적인 사례로도 설명한다.

 

실제로 돈 키호테의 광기는 오히려 과거보다 현대의 개념으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 비유하자면 그는 이 세상을 상대로

일종의 ‘코스프레,’ 또는 ‘게임’을 하는 셈이다. 사람들은 그를 ‘광인’으로 여기지만, 종종 건전한 판단을 내리는가 하면 정말

위험한 상황에선 몸을 사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어쩌면 그는 이 세상을 무대로 자기만의 ‘놀이’를 하는

사람이며, 워낙 진지하게 몰입하기 때문에 도리어 ‘광인,’ 또는 요즘 식으로 ‘폐인’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놀이’를

통해 또 다른 자아상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돈 키호테는 현대인과 무척이나 비슷하다. 처음에는 유머 소설로 간주되던

[돈 키호테]는 18세기와 19세기를 거치며 이상과 현실의 갈등, 인간의 실존적 고뇌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담은 작품으로 해석

되었다. 하지만 서머셋 몸의 지적은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가 세르반테스의 애초 의도에서 점점더 멀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돈 키호테의 (...) 갖가지 불행을 목격하고 (...) 웃음을 터트리지 않으면 안 되지만, (...) 우리는 그 사람과 같은 시대 사람들

처럼 웃지 못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신경이 예민하고 섬세해졌기 때문에, 그를 바보처럼 비웃고 놀리는 농담이 때로는

잔인하게 느껴져서 즐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김정진 옮김)

 

 

세르반테스와 인간의 또 다른 '전형' 돈 키호테의 영향력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인간의 수많은 ‘전형’을 그려낸 것처럼,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역시 또 다른 ‘전형’을 만들어냈다.

에스파냐 사람의 기질을 집약한 인물로 평가되는 돈 키호테는 또한 16세기의 전성기 이후 강대국의 지위에서 격하된 에스

파냐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상징하게 되었다. 특히 20세기 초에는 돈 키호테 같은 불굴의 의지를 발휘해 새로이 도약하자고

역설하는 민족주의적 주장도 나왔다. 미겔 데 우나무노가 [생의 비극적 의미](1913)에서 돈 키호테를 가리켜 에스파냐의

구세주라고 격찬한 것이며,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돈 키호테의 성찰](1914)에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 키호테의 기개를

예찬한 것이 대표적이다. 러시아의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는 [햄릿과 돈 키호테](1860)라는 유명한 강연에서 ‘햄릿형

인간’과 ‘돈 키호테형 인간’을 구분했다. “이 세상에는 햄릿형의 인간이 존재하며, 이런 유형의 인간은 뛰어난 지각력과 (...)

깊은 통찰력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 햄릿형의 인간은 이 세상과 민중에 대하여 기여하는 바가 하나도 없으며, 실천력의

결여로 인해 비난을 받습니다. 반면 절반쯤 광인이라고 할 수 있는 돈 키호테형의 인간은 하나의 목표만을 추구하며 (...)

그런 까닭에 이 유형의 인물만이 인류 역사 발전에 기여하여, 민중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이철 옮김)

 

[돈 키호테]는 문학 이외의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미술 작품으로는 무엇보다도 구스타브 도레의

유명한 삽화를 빼놓을 수 없다(단테의 [신곡], 셰익스피어의 작품집, 그리고 성서 삽화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오노레 도미에,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같은 화가들도 이 유명한 소설을 소재로 한 작품을 남겼다. 음악 분야에서는

헨리 퍼셀,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 펠릭스 멘델스존, 쥘 마스네, 모리스 라벨,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등 저명한 음악가들이

저마다 [돈키호테]에서 소재를 취한 작품을 남긴 바 있다. 현대에 나타난 [돈키호테]의 각색 작품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뮤지컬 돈 키호테]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라 만차의 사나이](1964)가 있다. 데일 와서만의

희곡에 미치 리와 조 대리언이 작사 작곡한 노래를 덧붙여 만든 뮤지컬로, 세르반테스의 감옥 생활과 [돈 키호테]의 줄거리

를 교묘하게 접목시킨 액자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극중에서 세르반테스/돈 키호테가 부르는 ‘불가능한 꿈’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특히 유명하며, 토니상 5개 부문을 석권하고 1972년에는 피터 오툴과 소피아 로렌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글 : 박중서 / 출판기획자, 번역가
글쓴이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