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스크랩]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소멸을 꿈꾸며 / 공월천

tlsdkssk 2013. 6. 28. 07:54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수필 당선작 -
소멸을 꿈꾸며 / 공월천

늦가을이긴 해도 11월은 어린 우리들에게 오싹하리만큼 추웠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폐허처럼 황량했고, 누렇게 말라가는 플라타너스 잎의 버석대는 소리에 더욱 스산하던 그날, 우리는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폐병을 앓던 순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훌쩍거리며 우는 아이도 더러 있었지만 나는 아무리 슬픈 생각을 해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다. 심보가 고약한 것이 탄로날까 봐 침을 찍어 바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려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방과 후에 선생님을 따라 우리 반 아이들 몇몇이 순자의 집으로 갔다. 시장 통 어물전 뒤에 대문도 없는 가난한 단칸방 앞에서 순자의 어머니는 아이가 입던 옷가지와 책가방을 태우고 있던 참이었다.


“어제 화장했심더. 조금만 더 댕기믄 졸업인데 망할 기집애 학교 졸업이나 하고 가지.”
길 위에 구르던 낙엽보다 더 푸석하고 늙어 보이는 순자의 어머니는 묻지도 않았는데 선생님께 그렇게 한마디하고는 타닥타닥 튀면서 타는 불더미를 작대기로 이리저리 뒤적거리기만 했지 울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그 타는 냄새에서 비로소 순자의 소멸(消滅)을 느꼈다. 늘 비릿한 생선냄새가 나던 순자의 옷이 타고 그 아이도 소멸(燒滅)되었다. 그제야 나는 무말랭이처럼 언제나 새들새들했던 순자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태우면 없어지는구나. 그래! 모든 건 타면서 연기처럼 사라지는구나.


며칠 후, 옷을 태우고 있는 순자 엄마의 꿈을 꾼 듯싶었는데 눈을 떠보니 부엌으로 통하는 샛문 앞에 앉아 어머니가 사진을 태우고 있었다. 사진이 화르륵 거리며 사그라지자 어머니는 물이 담긴 하얀 사발에 재를 툭 털어 넣고 후르륵 마셔버렸다. 초록 무늬가 각지게 새겨진 그릇이 희미한 불빛아래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재를 마시는 어머니의 모진 마음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몇 달 만에 집에 오신 아버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자는 척을 했지만 깨어있다는 걸 모를 만큼 나는 바보는 아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태워 마셔버린 사진이 낮에 서랍에서 몰래 훔쳐본 그 사진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자 훌쩍거리는 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입술을 깨무느라 숨통이 다 막혔다. 소리 없이 우는 것이 얼마나 힘 드는 건지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나는 알게 되었다.


군부대에 음식을 납품하는 통조림회사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는 언변과 수단이 보통이 아니셨기에 떼돈을 벌었다. 그래서 어지간히 작은 동네만한 큰 배를 두 척이나 샀다.


4월이면 연평도 쪽으로 조기잡이를 갔고,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대구나 명태를 잡으러 삼척이나 속초 쪽으로 가는 배를 관리하기 위해 아버지는 몇 달씩 집을 비우셨다. 어머니는 남편이 없는 종갓집 살림살이를 억척스럽게 이끌어가셨다.


그러나 알뜰하게 대식구를 보듬은 수고는 아랑곳없이 오랜만에 돌아온 아버지는 “오래 전에 상처(喪妻)했다고 했으니 자네만 없어지면 될 것이네”하는 말과 함께 사진 한 장을 던지신 것이었다. 약혼사진이었다. 검은 치마저고리에 하얀 동정이 눈부시게 어울리는 사진 속 그녀는 젊고 세련되어있었다. 물론 검은 폴로티셔츠 속에 살짝 보이는 와이셔츠의 깃이 멋스러워 보이는 아버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어머니와 있을 때 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고 그리고 다정해 보였다.


제천에서 영어선생을 한다는 젊은 과수댁과 살림을 차린 지는 이미 여러 해가 되는 듯했다. 객지에서 고생만하고 일 년에 두어 번 밖에 집에 올 시간이 없는 바쁜 남편을 위해 새벽이면 정화수를 떠놓고 무병장수하기만을 빌던 어머니로선 어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그보다 더 처참했을까?
그러나 배반의 아픔보다 앞서는 것은 역시 모성애였을 것이다. 여섯 자식을 위해 어머니가 선택한 것은 이혼이 아니었고 그들 사이를 소멸(消滅)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날 어머니의 행동은 사진을 태워 재를 마셔버림으로써 그들 사이가 소멸(燒滅)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주술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꼭 그렇게 되리라 믿었을 것이다.


어쩌면 모녀가 아니랄까 봐 소멸에 대한 어머니와 나의 의견은 그렇게 일치하고 있었다. 며칠 뒤 아버지가 속초로 떠날 때 막내 동생을 들쳐 업은 어머니가 무작정 따라 나서자 우리 집은 적막에 휩싸였다. 할머니와 삼촌이 계셨지만 모두들 말을 아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내가 중학교 시험을 보는 전날까지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는 공작시험이라는 것이 있어서 색종이나 풀, 가위 같은 준비물이 필요할 때라 시험 날이 가까워질수록 내 속은 시들은 검은콩처럼 딱딱하게 말라갔다. 딸아이의 시험 따윈 안중에도 없는 아버지나 어머니 때문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홀짝홀짝 울면서 내가 결심한 것은 시험에서 보기 좋게 떨어져버리는 일이었다.


시험 보는 전날 밤 늦게서야 돌아온 어머니는 이튿날 내게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엿가락 몇 개를 건네셨다. 나는 시험을 치를 중학교까지 걸어가면서 입에 대지도 않은 엿을 동강동강 허리를 잘라 길바닥에 하나씩 뿌렸다. 시험에 떨어지는 것만이 어머니를 배신한 아버지한테 복수하는 셈이 될 테니까.


그러나 간절한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며칠 뒤 나는 합격 통지를 받았다. 내 마음 속은 큰물 지나간 자리처럼 온갖 쓰레기와 흙탕물로 엉망이 되었으며 예전처럼 복구되기까지는 참으로 긴 시일이 필요했다. 그러나 물에 휩쓸려 온 흙이나 굴러온 돌들로 마음 속 지형은 예전과는 사뭇 달라지고 말았다. 그 뒤 나는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순자처럼 죽으면 6년 동안 개근한 성실함도 졸업장도 다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고, 엿의 효력도 믿지 않았다.


그 뒤 어머니의 주술(呪術) 탓인지 우리 집은 표면상으로 다시 예전처럼 돌아왔다.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개운한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여자는 돌아서면 옛 연인을 잊을 수가 있지만 남자는 평생 첫사랑이나 연인을 가슴에 품고 산다고 하지 않던가? 그 뒤로 그 일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한 채 오직 성심을 다해 아버지를 섬기는 어머니를 보면서 가슴 속에 떡하니 다른 여자 하나만 품고 사는 듯한 아버지가 미울 때가 많았다.


봄이 왔다. 여느 해 보다 꽃샘추위가 심해 움튼 꽃의 새싹이 얼기도 했다. 길고 긴 불신(不信)의 겨울이었지만 봄은 조용히 그 겨울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내 사춘기 중학교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해 겨울 이야기를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기에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나버렸다. 그리고 아버지는 너무 연로하시다. 그렇다고 훌훌 털어버리기엔 내 가슴속에 옹이처럼 깊고 여문 흉터로 남아있어서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내 기억 속 수많은 길 어느 모퉁이에 숨어 있다가 언제나 아버지와의 소통(疏通)을 방해하던 그때의 일을 버선목 뒤집어 보이듯 까집어 보임으로써 아버지와의 완전한 화해를 모색하고 싶은 심정에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에 찌든 아내와 자식들을 포함한 대식구들은 언제나 아버지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유식하고 말이 통하는 젊은 그녀를 만나 위로도 받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웃이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사람이 사람에게 품는 정을 어찌 막을 수가 있겠느냐며 그 분을 동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애틋한 사랑에 따뜻한 이해와 위로를 보내려고 애를 썼겠지만 그분이 나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용서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논리일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바래어 바싹 건조해져 있는 내 흉터는 아주 작은 불씨 하나에도 불이 붙어 활활 타버릴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묻어둔 상처의 소멸(燒滅)을 위해, 아버지와 나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의 소멸(消滅)을 위해 이제 따뜻한 불씨를 보듬고 아버지에게로 가고 싶다. <공월천>


수필 심사평

2008년도 전북중안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한 수필은 총 91편이다. 예심을 거쳐 본선에 올라온 작품 16편중에서 공월천의 ‘소멸을 꿈꾸며’를 이번 당선작으로 정한다.


공월천은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해 제제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함께 마지막까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던 문춘희의 ‘청동숟가락’과 ‘엄마의 발’은 참 애석하다. 두 사람의 작품을 놓고 우열을 이야기 하기는 부담스러운 점이 있으나 문춘희의 수필이 일상적인 소재와 기존의 잘된 수필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공월천의 수필은 깊이와 무게가 있으며, 가독성(可讀性)도 우수한 편이다.
인터넷의 대중화로 글, 특히 수필부문은 전문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과 취미로 글쓰기 하는 사람의 경계가 아주 많이 허물어져 있다. 그러나 신춘문예는 앞으로 전문적으로 글쓰기를 할 사람이 통과하는 등용문이라는 생각이 공월천의 글을 택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친구의 죽음과 아버지의 바람기, 그리고 그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소멸(消滅) 이라는 주제 하나에 유기적으로 얽어가는 공월천의 글은 ‘소멸(燒滅)이 가진 소멸(消滅)의 의미’를 나타낸 글이다. 같은 모양으로 쓰나 다른 뜻을 가진 ‘소멸’을 통해 과거와의 건강한 화해를 시도하는 공월천의 글은 작가의 깊은 사색과 진정성의 힘을 가늠하게 한다.


함께 응모한 ‘슬픈 여정’도 남북 이산가족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당선작인 ‘소멸을 꿈꾸며’에 비해 긴장감과 흥미가 좀 덜하다. 이 문제는 앞으로 당선자가 고민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일정한 작품성을 유지하는 것은 그만큼 많이 사색하고 고민하고 넓게 경험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문장을 만드는 솜씨도 당선자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적절한 어휘의 선택과 적확한 사용이 작가의 작품적 역량을 여실하게 드러낼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축하드린다. 한해를 마감하고 다시 한해를 시작하는 즈음에 괴롭고 힘든 시간을 소멸(消滅)하는 의식이 새로운 출발이며 자신과의 진정한 화해임을 깨닫게 해 주는 좋은 작품이다.
<김영자 전주대 강사>



수필 당선작 소감

“아지매는 누구인교?”
습기라고는 없는 마르고 가는 목소리로 묻는 어머니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눈에 고인 낯설음이 그저 서러웠습니다.


어머닌 딸의 이름도,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조차도 모두 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낯익은 사람에 대한 익숙함으로 나를 보는 시선이 아직은 편안하다는 것, 그것 하나로 애써 위안을 삼으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작은 위로마저도 내려놓아야 하나 봅니다. 무언가 되어주리라 철석같이 믿었던 딸이 어정쩡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못내 안타까워하시던 어머니. 왜 하필이면 정신을 놓아버리셨는지요?
그래도 그나마 다행입니다.


어머니 묻고 차디찬 땅 위에 엎드려 눈물 펑펑 쏟으며 말하는 것 보다는 안 듣는지 못 듣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머니 야윈 귀에다 대고 말할 수 있어서, 초점 없는 눈이지만 그 눈을 마주보며 말할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어머니한테 하고 싶고 듣고 싶은 말입니다. 그러나 끝내 들을 수는 없을 테지요.
“어무이, 며느리도 보고 나서 이렇게 늦게야 나 상(賞) 먹었어요. 그래도 장하다고 칭찬 좀 해주세요.”
“오이야, 그래 그래. 우리 딸.”


너무 늦게 시작한 글쓰기여서 사실은 오늘 같은 날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혼신을 다해 길잡이가 되어주신 홍억선 선생님, 경주수필 문우님들, 마치 시집 보낸 누이한테처럼 늘 따뜻한 시선으로 보듬어 주는 수필사랑 문우님들,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 모두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님 참으로 고맙습니다. 세상 모두가 다 고맙습니다.


※공월천
·1953년 경북 포항생.
·주부
·현재 경주수필 회원

출처 : 화타 윤경재
글쓴이 : 화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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