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tlsdkssk 2011. 6. 28. 11:35
모두가 임재범이 될 필요는 없다
 
 
- '나는 가수다', 스펙이 생기다

[엔터미디어=김작가의 핫 브레이크] 세상에 통용되는 말들 중 유독 불편한 게 있다. 나에게는 '스펙'이란 단어가 그렇다. 언젠가부터 은어도 아닌 일상어가 된 스펙은 본래 기계 따위의 물건 사양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헌데 어느 순간부터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토익 점수, 각종 자격증, 사회 활동 경험 등 취업에 필요한 조건을 의미하기 시작했다.

스펙이란 말이 불편한 건 꼭 물건에게 쓰일 말이 사람에게 쓰여서는 아니다. 그 단어에 어떤 자발성도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실현이나 행복추구를 위해 스펙을 쌓는 사람은 없다. 단지 취업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이력서에 채울 스펙들을 하나 하나 만들어나갈 뿐이다. 일반적으로 스펙의 기준은 본인의 의지나 적성과는 큰 상관이 없다. 기업의 요구사항일 뿐이다. 즉 자신이 아닌 타인의 요구 사항에 맞추기 위해 청춘의 좋은 시절을 소모하는 것이다. 시스템의 부품으로 채택되기 위해 자신을 연마하는, 버젓이 당연한게 되버린 현실이다.

음악 칼럼에 난데없이 스펙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 나는 가수다 >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에 언젠가부터 하나의 규칙이 생겼다. 노래를 잘한다, 라는 정의에는 실로 다양한 기준이 있겠지만 < 나는 가수다 > 에서는 하나의 기준만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옥타브를 끌어 올리고, 바이브레이션을 폭발 시키고, 있는 힘껏 표정을 쥐어짜고, 뭐 그런 '폭발적인 가창력'의 요소들을 조합시키면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현상이 매주 반복되고 있다. '성대차력' 또는 '성대높이뛰기'다. '나는 성대다'라는 농담도 나온다.

묻고 싶다. 그게 가수들의 의지일까? 그동안 편안하고 정확한 팝 보컬의 대명사였던 김연우가 '나와 같다면'을 부를 때 목에 힘줄이 돋는 모습은 < 나는 가수다 > 에 스펙이 적용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탈락하지 않기 위해서, 본인의 스타일이 아닌 청중평가단이 선호하는 스타일로 노래하는 김연우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건 다양성보다는 또 하나의 획일성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자신에게 가장 잘맞는 창법이 아니라 청중평가단의 '인사기준'에 맞는 노래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 임재범은 이런 기준에 가장 적합한 가수였으며, 그래서 그는 노래 세 곡으로 대한민국을 평정할 수 있었다. 문제는, 모두가 임재범처럼 노래할 수도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이 기준을 거부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가장 잘 보여준 건 이소라였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무대에서 해바라기의 '행복을 주는 사람'을 불렀다. 그녀만의 감성을 담아 차분히, 담담히 불렀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룰에 따른 정당한 결과였으되,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까. 뒤이어 캐스팅된 장혜진과 조관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대폭발대신 자신들의 스타일을 보여줬던 그들은 첫 무대에서 낮은 순위를 기록했다. (3분안에 청중평가단을 '감동'시켜야 하는 상황에서는 필연일지도 모른다.) 제작진, 출연진, 시청자 모두 '순위는 중요한게 아니다'라 말한다.

하지만 그 중요하지 않은 순위, 그리고 탈락은 < 나는 가수다 > 의 토대를 구축하는 룰이다. 그 룰이 있기에 가수들은 자신의 만족 대신, 청중 평가단의 구미에 맞게 노래할 수 밖에 없다. < 나는 가수다 > 의 기획 의도중 하나는 다양한 음악을 선보이는 것이었다. 지금, 그 의도는 수행되고 있는가? 그렇다, 고는 하기 힘들다. 스펙이 인간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듯, 프로그램안에 스펙이 만들어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스펙에 맞춰 노래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한껏 보일 때 찬사뿐만 아니라 좋은 결과까지 얻을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할 때다. 그렇지 못할 때, 순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올림픽은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다'는 문구처럼 공허해질 것이다.

칼럼니스트 김작가 < 대중음악평론가 > noisep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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