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아날로그로 살기

tlsdkssk 2008. 12. 27. 21:36

아날로그로 살기

즐겨보는 TV프로가 있다. 토요일 10:00 ‘걸어서 세상 속으로’이다.

오늘은 런던 편인데, ‘내 삶의 오아시스’라는 제목이다. 왜일까? 한참을 봐도 모르겠다. 영국하면 로빈 훗과 사슴이 떠오르고, 출장 가서 본 테임스강과 국회의사당, 여왕을 지키는 의장사열대가 인상적이었는데, 골동품 예찬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지역을 이동할 때마다 보이는 공원만 예상대로이고, 사슴도 그렇긴 하다. 하지만 ‘오아시스라고?’

희귀한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이 많은 건 파리 근교의 ‘몽 마르뜨’언덕에서 행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거리의 화가들’을 연상케 한다.

LP판 예찬론자들이 앵커의 질문에 답한다. CD나 M3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음악의 서정이 LP의 고풍스러운 선율 속에 묻어 있단다. ‘서정’하면 琴兒선생이 떠오른다. ‘서정이 배어 있지 않는 글은 수필이 아니라’고 가르쳐 주셨지…

끝내 특이한 복장의 의장사열대는 나오지 않는다. 인도에 출장 갔을 때 공장을 지키는 경비원 3명이 영국에서 본 사열대 모습으로 우리 일행을 환영하는 ‘세리머니’를 해주었는데…

뜬금없이 ‘아이젠’이 생각난다. ‘일자산’ 회장인 권장군이 그걸 사면서 “弟씨 것도 사야지!” 하며 행님을 졸라서 샀단다. 형님은 “글마가 니를 더 챙기더라. 나는 생각도 못 했는데, 동기간보다 정이 더 많더구나!”하셨다.

그걸 받으며 내가 대꾸했다. “지난번 첫눈 왔을 때 키 작고 체구도 더 단단한 회장님이 미끄러져서 내가 놀렸는데… 요 정도 추위에 내복바지까지 입고, 골프 드라이버는 230m까지 날리더니, 쫄딱 미끄러지기는… 선배님도 참!”

“니도 내 나이 돼 봐라. 내복 입는 게 정상이다. 지랄 좀 떨지 마라!”

허긴 나는 내복 바지는 입지 않지만 상의는 켜켜이 껴입는다. 상채가 약한 걸까?

“아이젠을 이사 올 때 버렸나? 찾아봐야겠다.” 집사람의 말에 거실 밖 베란다를 뒤지는데, 별의 별 게 다 나온다. 나이지리아 지사 근무 시절 받은 상패 (‘감사패’-나이지리아와의 외교관계수립을 위한… 1980.2 외무부장관 박동진), -한인회에 지대한 협조를…1982.11 한인회장 이봉덕)

※ 귀국 후 근무하는데 이봉덕회장은 집으로 찾아와 돈다발을 주었음. 처음 받아본 ‘뇌물’이었지만 ‘事後 謝禮’라 받았음.

실, 색종이를 엮어서 수작업으로 만든 벽걸이는 여직원의 ‘작품’인데, ‘새천년, 새봄 2001,1,15이라고 적혀있다.

先考의 호리병 도자기, 先慈의 노인대학 공책, 쓰시던 손수건,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금주와 내주는 일자산행 쉬기로 했다. 3주만에 회장님 만나면 “이 아이젠은 지리산 종주하러 산 것인데, 3만량짜리 임다! 장군님이 이 정도는 돼야 체면이 서지요.” 해야겠다. 그러면 또 “찌랄 하네!!”하실 게다.

문둥이 사투리가 정겹다. ‘골동품인 사투리’가… 따끈따끈한 마룻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사색을 한다.

단기 4327년(1994년), 1월 17일 박은 책 ‘옛 詩情을 더듬어’를 서고에서 꺼내 여기저기 뒤진다. ‘가보’인 ‘川流不息(思)’을 휘호해주신 외숙께 답례로 선물하기 위해 샀고, 나도 한문학 공부하려고 비치해뒀지만 먼지만 앉아 있어 안쓰럽다.

창 밖에는 칼바람 소리가 나는데, 첫 쪽을 여니 <계원필경>의 저자로 알려진 최치원의 <秋夜雨中>이 있다.

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최치원 한문학의 비조임

 

<가을 밤 빗소리를 들으며>

가을바람도 쓸쓸이 읊조리나니 세상길에 참 벗 없음이여!

창밖엔 삼경의 비 등잔 앞엔 만리의 마음-

“와! 대박 건졌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詩란 이런 거구나! 여운이 좌알 좔 좌알 좔 남는다! 시 작법 공부하는 내게 대박이란 이런 거지!

※ 창작수필 문인회 회장을 역임하신 이일헌 회장님께 댁으로 오랜만에 전화 올렸더니 “요즘은 아날로그로 살아요! 핸폰은 비상시에만 사용, 지음에게도 알리지 않습니다. 서선생도 요렇게 살아보이소. 사는 맛이 납니다!”하시고,

윤 호는 E-mail주소가 없다. 테니스를 즐기고, 주말에는 시냇가에 지은 초막에서 텃밭 가꾸며 산다. 런던에 가족 데리고 출장 갔을 때 시내 관광 여기저기를 차로 자~알 시켜주었다.

2008.12.27 (200자 x 12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