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단 상 3 제

tlsdkssk 2008. 6. 21. 23:33

斷 想 三 題

一 . 단 골

청계산을 오르내리며 애용하는 목욕탕이 있다. 어느 날 이발사가 바뀌었는데 용모가 내가 잘 아는 사람과 너무나 닮아서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헤어 스타일이 멋졌는데 알고 보니 가발이어서 두 번째 놀랬고, 세 번째 놀란 건 바둑이 2급이라 해서였다.

"대머리구나!" 하면 "비료 줘서 머리가 자랐어요!"하며 유머도 곧잘 한다.

욕실에 들어와 등을 밀어 줄 때는 대머리가 너무나 우스워 한번 만져보자며 낄낄거렸다. 늦게 배워 7급인 나는 바둑 좀 가르쳐 달라며 한 판 두자고 했지만 다음에, 다음에 하며 응해주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는 책을 열심히 읽어서 무슨 책인가 보니 어려운 사상(思想) 서적이 아닌가. 수필집을 갖다 주었더니 읽고 독후감을 말하는데 상당한 수준이었다.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어 시간이 없으니 자격증 따고나면 바둑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등산을 쉬는 겨울에는 여기까지 올 것 없이 집 근처에서 이발하겠다고 하면 집에까지 쳐들어오겠단다. 수필집에 내 프로필이 나와 있어 주소와 핸드폰 번호까지 알고 있으니 도망갈 수도 없겠다며 봄이 되고 다시 겨울이 왔지만 계속 그 대머리에게 단골이 되었다.

한 번 좋으면 여간해서는 바꾸지 않는 성미인지라 바꿀 마음이 없으면서도 바둑 좀 배워볼까 해서 “동네 길 하나 건너면 이발소이니 다시는 안 오겠다.”고 하면서 놀려주었다. 이발할 때가 되면 전화를 해온다. “청대머리구나! 청계산 대머리!”하면서 받고, 웃으면서 차를 몰고 간다.

다음은 구정이 끼어 있으니 연휴 전날 오라고 날짜까지 정해준다. 오늘이 전화 올 날이니 무슨 말로 놀려줄까 생각하다가 ‘동네 이발소에 갔더니 오랜만에 오셨다며 이번엔 공짜로 깎아 주겠다고 해서,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했으니 깎았다. 염색은 안 했으니 염색만 하러 가겠다고 해야지’ 하며 웃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청대머리가 없다. 새 이발사에게 인계하고 가버렸단다. 어디로 갔느냐고 하니 미국에 이민 갔는지, 어디 갔는지 모른단다. 단골손님에게 알리지도 않고 가버렸다니 괘씸했다. 핸드폰 문자메시지에 이렇게 찍었다. ‘세상에 믿을 놈 없다더니 청대머리도 그렇구나. 구정연휴 전날 오시라며 날짜까지 정해주더니 없네.’ 보내려다가 생각하니 ‘손님 빼가지 않겠으니 후임에게 깎으시라.’는 것 같아 새 이발사에게 머리를 맡겼다.

한 번 거래해 보고 믿을 만하면 계속하고 좋지 않으면 바꾸지만, 일단 기회는 한 번 준다는 商道를 실천하라는 것 같아서였다. 청대머리에게 전화하고 찾아가야겠다.

2006년 설날

 

二 . 제 사

설날이 왔는데 장인께서는 올해는 제사를 모시지 않겠다고 하신다. 장모님이 편찮으셔서 않는단다. 돌아가신 조상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하며 지내는데, 후손이 아프면 조상님이 보시고 걱정을 하시기 때문이란다.

음식을 차려 놓으면 귀신이 먹는다고 하는 제사를 나는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기일에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바친다. “조상님의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하고 기도한다.

내가 신앙을 갖고 있는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금하지 않는다.

즐겨보는 TV 프로 중에 KBS의 ‘여섯시 내 교향’이 있다. 방방곡곡을 다니며 고향 소식들을 담아 정겨운 이야기들을 전하는데 오늘은 제사음식을 차리는 장면이 나왔다. 상 위에 정성껏 음식을 놓는다. 제상위에 대추, 밤, 감을 한가운데 제일 좋은 자리에 놓는데, 대추는 씨가 큰 것 하나이고, 밤은 밤톨이 3군데로 나누어져 있고, 감은 씨가 6개여서 왕과 3정승 6판서를 상징하기 때문이란다. 이조시대 당파싸움에서는 제사상에 물고기를 동쪽에 놓느냐 서쪽에 놓느냐(魚東肉西, 魚西肉東)를 두고 동인, 서인으로 갈라져 싸웠다고 한다. 유교를 믿는 선조들이 그런 걸 두고 파벌을 형성했다니 웃음이 나왔지만, 오늘 상 차리는 후손들의 마음을 보면서 조상님들을 이해할 것 같다. 冠婚喪祭는 人倫之大事라 하지 않았던가.

음식상을 차려 놓고 절하는 것은 조상님께 감사하면서 잘 먹겠다는 것이지, 조상들이 잡수시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제사를 금하지 않는 성당의 교리가 이해가 간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 서양에서는 ‘추수감사제‘를 지내지 않는가.

죽으면 육신은 흙이 되지만, 영혼은 불사불멸함을 조상님들이 알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새해 설날 “복 많이 받으십시오.”하면서 인사 나누고, 제사 모시며 조상님께 감사하는 우리의 민속이 자랑스럽다.

해가 바뀌면 시산제(始山祭)를 한다. 상 위에 삶은 돼지머리 올려놓고 입에 돈을 물리며 한 해 동안 산행 사고 없이 잘되기를 빌며 절을 한다. 해마다 시산제에 참석해서 돼지 입에 돈은 물렸지만 절은 하지 않았다. 올 해 관악산에서 시산제 할 때는 절을 할까보다. 큰 몸으로 말없이 앉아있는 대자연의 산에게 “자연을 경외합니다! 한 해 동안 경외하는 자세로 오르내리겠습니다. 무사히 산행하기를 기원합니다!”하며 큰 절을 올려야겠다.

2007년 설날 아침

 

三 . 장 고 (長 考)

나는 바둑을 못 둔다. 고교 졸업 후 바로 시작한 친구들은 잘 두는데 몇 점씩 깔고 두어도 늘 그 모양이어서 “이젠 안 두겠다.재미없어서.”했더니 친구 왈, 30대에 시작하면 늘지 않는다며 두뇌의 발달은 20대까지란다.

병원에서 예약하고 기다리는데 바둑잡지가 있어 이런 것도 있나 하며 보니 만화가 실려 있다. ‘만방 아저씨‘라는 제목이다. 내용은 이랬다.

A “던져! 아무리 쳐다봐야 죽은 자슥 부랄 만지는 거야.” B “더러바아서….도저히 살 길이 없나.”하며, 푸하~ 담배연기를 내 뿜는다. B “원장님 이 대마 교통사고로 죽은 거지요? 그것도 난폭 운전자한테, 횡단보도에서.” 하니, 원장님 왈 “내가 볼 땐 이 대마 암으로 죽었어!” B “네?” A “암 중에서도 폐암 맞죠?” 원장 “그래, 바둑 한 판 두는데 담배꽁초가 12개 나왔어. 人生長考 좀 해봐.”

나는 바둑을 안 둔다. 장고를 해 봐야 늘지 않는다니, 혼자서 신문에 碁報실린 것 보며 해설 읽어가며 놓아 본다.

인생살이에서는 장고를 해야 할 때도 있지만, 승부에 집착할 필요 없이 그냥 즐기는 자세도 필요할 것 같다.

2008년 2월 200자 x 16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