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한자락

나라면 브람스를

tlsdkssk 2010. 4. 19. 07:37

고등학교시절 <르네쌍스>라는 고전음악감상실엘 자주 갔었다.

공부는 안 하고 그런데 드나든다고 엄마에게 꾸중을 들어가면서도

나는 그곳에 중독이 되어 있었다.

주말마다 르네상스 입장권을 사기 위해 엄마에게 거짓말을 해가며

사지도 않은 참고서 값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쿵쿵 쾅쾅 심장을 터뜨릴 듯 울리는 베토벤의 5번 씸포니며

나의 우수와 딱 맞아떨어지는 차이코프스키의 멜랑코리한 피아노 협주곡이며

소름 돋도록 마력적인 마리아 칼라스의 오페라 아리아에 매료되어 간 것이지만

꼭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이제사 말이지만 내가 그곳을 그토록 열심히 드나 든 이유 중엔

그곳엔 오빠 뻘의 많은 대학생들이 있었고

그들이 나를 관심있게 지켜주고 찬사를 보내고 지지해준 것이 음악감상 못지 않은 이유가 되었을 것 같다.

뿐인가 내 또래의 개성 넘치는 경기고등학교 애들도 상당수 있었다.

물론 여대생도 있었고 다른 고교생들도 있었겠지만, 나의 관심사는 오직 잘난 KS마크들 뿐이었다.

나는 바야흐로 사춘기,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무르익을 무렵이었던 것이다.

한데도 그 시절의 나는 내가 오직 음악을 듣기 위해 가는 것으로 여겼다.

 

당시 나를 아껴주던 대학생 중에 K라는 오빠가 있었다.

그는 훈계하기를 좋아하여 나는 그를 '교감선생님'이라 불렀는데,

하루는 그가 클라라 슈만과 브람스의 못 이룬 사랑 얘기며

클라라가 슈만에게 얼마나 좋은 아내였는지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 놓았다.

나는 그들이 참으로 아름다운 삼각관계를 이루고 살았구나 싶었다.

 

일전 신문에 보니 클라라 와 슈만에 대한 얘기가 실려 있었다.

내용인즉 영리하고 똑똑했던 클라라는 슈만을 만나 엄청 불행한 삶을 살았고,

세인들이 그들의 사랑을 아름답게 말하는 건 죄다 클라라의 자작극 덕분이라는  것이다.

슈만은 바람둥이였고 천재피아니스트였던 아내 클라라에게 근원적인 열등감을 갖고 있었단다.

슈만은 그 아내를 너무나 힘들어한 나머지 우울증으로 괴로워 하고 강물에 뛰어 들었다가

결국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고 한다.

젊은 브람스가 클라라를 그토록 사랑했건만 클라라는 그의 후원자로만 지냈다.

그 옛날 교감에게 클라라와 브람스의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당연히 클라라가 브람스와 결혼하지 않은 게

그녀가 죽은 남편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이었는 줄 알았다.

신문의 필자는, 자신이 난봉꾼에게 속아 불행한 결혼을 했다는 과오를 인정하기 보다

슈만을 위대한 작곡가로 만들어 허상의 순애보를 만들어 내는 편이

클라라에겐 더 쉬었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며 '과잉정당화'라는 말을 썼다.

하지만 만약 클라라가 브람스의 구애를 받아들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클라라는 소름끼치도록 영리한 여자였나 보다.

간혹 그런 부류의 인간을 본다.

남에게 드러내는 자신의 모습은 더없이 완벽하고 이상적이나

그들의 속은 문드러지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나라면 브람스를 선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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