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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대를 앞서 간 70년전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tlsdkssk 2006. 12. 12. 17:26


** 시대를 앞서 간 70년전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1935년 .. 34살의 청년 사업가 월트 디즈니(1901 ~ 1966)는 세계 최초로

만화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꿈을 꾸었다.

 


디즈니는  그림형제의 동화 '백설공주'를 만화화하기로 결정한다.

 

이 작품은 테크닉컬러사에 의해..컬러로 제작되었다.  당시까지만해도 컬러는 영화보단

애니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1933년 최초의 컬러애니 '꽃과 나무'를 제작한 디즈니는

이후 제작한 애니는 모두 컬러로 만들었다.

 


제작진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디즈니..  그러나 이후 작품부터는 많은 직원들이

노조를 탄압하고 작품의 다양성을 제한하는 디즈니에 대항해

사직하거나 새로운 영화사를 세웠다.

디즈니 역시 파업을 하는 직원은 모조리 해고하는 단호함을 보여준다.


이 분이 거울..

 



백설공주에 제작에 대해.. 제작진들은 물론 형 로이까지 반대했지만..

월트의 고집을 꺾을수는 없었다.


당시까지의 애니는 거의 대부분 1~20분짜리로.. 영화상영전 양념으로 틀어주는

존재였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는 최초로 영화와 같은 값을 내고 정식개봉하는

애니메이션이었다.


백설공주의 목소리는 18살이었던 에드리아나 카셀로티가 맡았다.


2년간의 제작기간동안 제작비는 애초의 예상을 몇배로 뛰어넘었고..

이 작품은 '천문학적인 제작비 때문에 결국 재앙이 될 것이다.'라는 예측되었다.


이 작품의 감독은 '데이비드 핸드'였다. 월트 디즈니는 제작과정을 총지휘하는 제작자였다.

데이비드 핸드는 그 후로도 수많은 작품을 감독했지만.. 그의 이름은 디즈니에 의해

묻혀버리고 만다.


이 작품의 제작을 위해 디즈니사는 단편애니의 제작을 자제했고 그로인해 수입이

급감하여 경영난에 빠진다.

 

'나보다 은행이 잠을 못잤다.' (월트 디즈니)


백설공주와 동물들이 그대로 물에 비친다. 당시로선 최첨단 기법이었다.


디즈니는 인물의 크기와 그림자까지 정확히 측정해서 그림을 그렸다.


 

디즈니가 제작과정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생동감 넘치는 표현을 배우기 위해 화가들을 다시 학교로 보낸 것이었다.

이게 동물학대가 아니고 뭔가..


아무런 대가없이도 성실히 일하는 동물들..

노조를 탄압하고 50년대 매카시즘의 '빨갱이' 색출에 앞장섰던 디즈니..

별 상관없으려나..

 


그래도 이들은 즐겁다.. 
 


백설공주를 위해.. 작곡된 노래는 총 25곡이었지만 8곡만 사용되었다.

뮤지컬 형식은 이후 60년간 디즈니 극장판 애니의 공식이 되었다.


일곱 난쟁이들은 각각의 개성이 잘 표현되었다.


백설공주는 당대의 인기 아역배우 '셜리 템플'을 모델로 하여 그려졌다.



공주를 달갑지않게 여기는 '심술'..  그는 나중에 공주가 사과를 먹고 쓰러질때

가장 먼저 달려간다.


1920년대.. 유니버설과의 불평등 계약으로 '오스왈드'라는 토끼 캐릭터를 뺏긴 경험이 있는

디즈니는 이후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한 저작권과 사업수완을 보여준다.

 

디즈니의 극장판 애니는 절대 TV로 방영되지 않는데.. 비디오 판매와 재개봉을 고려한

전략이다.  


2년간 디즈니의 화가들은 수백만장의 그림을 그렸다.

그 중 '난쟁이들이 백설공주의 침대를 만드는 장면'과 '난쟁이들이 백설공주가

만든 스프를 먹는 장면'은 너무 길다는 이유로 삭제되었다.



마녀는 여러모로 이 작품에서 가장 잘 그린 캐릭터다.


 

백설공주를 살려준 사냥꾼은 이런 험한 꼴을 당하고 만다..


1937년.. 디즈니는 당시에는 존재감이 희미한 매체였던 텔레비전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영화는 언젠가 TV에게 먹혀버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주가 부르는 이 주제가는 지금까지도 디즈니의 성가처럼 남아있다.


동물들은 백설공주를 위해 착취당한다싶이 봉사한다. 이것은 1950년작 '신데렐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독일에서 상영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디즈니애니의 매니아였던

아돌프 히틀러는 몰래 수입한 필름을 혼자 관람했고..

심지어 직접 제작을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졸작으로 끝났다.


디즈니는 백설공주와 같은 정교한 기법으로 1942년 밤비와 피노키오 등 극장판 애니를

계속 제작했으나 2차 세계 대전때문에 흥행에는 실패했다.

오히려 대충 만든 '아기 코끼리 덤보'가 수입에 도움이 되었다. 이후 디즈니는 50년대까지

장편의 제작을 중단했다.

 

당시의 포스터 ..

 


극장주들은 '관객들이 만화를 보기위해 80분동안 앉아있을까...' 의문을 품었지만

전례없는 흥행은 그 걱정이 기우임을 입증했다.


영국에서는 이 작품이 지금도 역대 흥행기록 2위로 남아있다.

국내에는 1994년이 되서야 비디오로 소개되었다.


1937년 12월 21일.. 헐리우드에서 시사회가 열렸다.

어른들에게는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은 관객들의 눈물과 함께 씻겨졌다.

 

흥행수익은 800만 달러를 넘어섰다. 당시 달러의 가치는 지금의 14배였다.


이 작품은 1938년 최고의 흥행작이 되었고.. 이 기록은 1년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에 의해 깨지게 된다.

 

 

아카데미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이유로 이 작품을 작품상후보로 선정하는것을 거부했다.

1939년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월트 디즈니는 공로상을 수상했고, 당대의 스타

셜리템플로부터 오스카트로피와 7개의 작은 오스카를 수여받았다.

그는 개인으로는 아카데미 최다 수상 기록 보유자(31개)이기도 하다.


백설공주의 성공비결에 월트 디즈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어린이였었다는 사실입니다.'



[ 출처 : 미디어다음 ]

2006. 11 . 21 / SUNMOON
출처 : 시대를 앞서 간 70년전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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