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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점선의 그림

tlsdkssk 2006. 6. 21. 15:51

 

 

몸이 아픈 것, 병이 든다는 것도 때로는 어떤 새로운 계기가 되기도 한다.

너무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많은 그림을 그려서 오른쪽 어깨에 탈이났다.
사람들이 오십견이라고 했다. 아무 일도 못하고 징징 울고, 왼팔로 책 같은 것을 들고 읽었다.
어쩔 줄 몰라 하고, 슬퍼만 하다가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때 문득 컴퓨터가 떠올랐다.
두 팔을 책상 위에 올린 채 어깨는 안 써도 손목과 손가락의 힘만으로도 컴퓨터 작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말을 아들에게 하자 대단히 좋아했다.
아들이 엄마를 생각하며 싱글벙글 웃으며 노트북을 사왔다.
아들의 도움으로 마우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보더니 아들이 놀라 소리쳤다.
"와 화가라는게 이런 거구나!" 컴퓨터를 전공한 아들이 진짜 화가가 작업한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초보적인 툴로도 이런 그림이 나올 수 있다니!" 하면서
아들은 더 좋은 것을 설치해 줘야겠다고 말했다.
포토샵 프로그램을 설치해 신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그림을 그릴때는 펜 마우스를 워낙 긁어대어
사방 10㎝의 손바닥만한 그림판,태블릿에 구멍이 나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그래도 쉬지 않고 펜 마우스를 긁어대다 걱정이 되어서 작업 도중 태블릿을 들고 수없이 들여다봤다.
그렇게 문질러댓지만 신기하게도 흠집 하나 없었다.
게다가 손바닥만한 태블릿에 펜 마우스로 작업을 하며 손목만 움직여도 다양한 크기의 그림이 완성되니 아픈 중에도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이런 현대 문명이 있게 한 과학자들에게 감사한다.
한소재의 그림들이 자꾸 반복된다. 왜냐하면 스스로 감행하고 싶었던 성실하고 혹독한 과정이기 때문에, 나는 고양이 같은 하나의 대상을 접하면, 이렇게 저렇게 수없이 되풀이해서 그리게 된다.
마티스가 '루마니아의 블라우스'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여러장의 비슷한 그림을 그린 게
고등학교 때의 미술교과서의나왔다. 나도 그 처럼 성실하게 한 주제를 여러 각도에서 그려보는 연습을 끝없이 해야겠다고 얼마나 다짐했던가.
……………………………………… 중 략 ………………………………………………………
나는 해가뜨자마자 일어나서 맨 먼저 컴퓨터를 켜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알기 전에는 해만 지면 잤는데, 어떤 때는 그림 그리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새벽 세시까지도 앉아서 그렸다. 그래도 피곤한 줄도 몰랐다.
나는 언제나 '지금 이 그림'에 만족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수많은 고양이를 그리고 수많은 말을 그리고 꽃을 그리고 더 많은 내면을 그리고…….
그렇게 그리면서도 나는 분명 더 많이 그리고 싶어할 것이다.
이 그림들은 팔로 그림을 못 그려서 컴퓨터로 그려졌고 , 굉장히 개인적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준다기 보다는 컴퓨터라는 매체를 통해서 내 자신에게로 몰입해가는
성실하고 진솔한 하나의 과정이다. 이 과정들이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말 위에서 죽다

나는 달리는 말 위에서 죽었다. 죽은 채 땅으로 떨어졌다. 이것이 나의 전생이다
 한 번도 아니고 수십 번 나는 그렇게 죽었다. 나는 매번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죽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무술을 단련하고 첫번째 전투에 나가서 적을 향해 돌진하다가 죽었다.
왜냐하면 나는 매우 용감했기 때문에 .그리고 물불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화살이 날아오든 칼이 날아오든 오로지 적을 향해 달려나가다 죽었다.
한 번도 두번째 전투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내 영혼에 스무 살 너머의 기억은 없다.
지금처럼 오래 살아보는 것은 내 여러 생애 중 처음이다.
현세에서 나는 여자로 태어났고, 내가 성인이 된 후로는 우리나라에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오십이 넘도록 살아 있다. 기적이다. 그래서 나는 몸을 아낄 줄 모른다. 그림을 그릴때도 그렇다. 적당히 작업을 하고 난 후에는 적당히 쉬어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한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병이 날 때까지 몸을 쓴다. 병이 나면 징징 울면서 그제서야 왜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한다.
 병이 난 후에서야 몸을 너무 많이 썼다는 것을 깨닫는다.
전생에 내가 단 한번이라도, 조금이라도 늙어 보았으면 몸을 아껴 쓸 줄 알았을 텐데.
후생에 나는 평화롭게 잘 살 것 같다. 다음 생에는 친구들처럼 체육관에도 다니고
헬스도 하고 러닝머신도 타고 보약도 먹고 맨손체조도 하고…….
나는 말 위에서 죽었다. 말 잔등이 내 죽음의 침상이다. 내 최후의 기억은 말 잔등에서 멈춘다
그래서 나는 말을 그린다. 왜 말을 그리는 줄도 모르면서 말을 그린다.
 아무리 아무리 그려도 말을 그리면 행복하다.
아무리 아무리 말을 많이 그려도 또 다른 말을 그리게 된다.

나는 말 위에서 죽었다. 내가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죽어가는 나를 태운 채 말은 달리고 있었다. 그때 말과 나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 말이 내 자신 인지 내가 말인지……. 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났다. 화가가 되었다. 말을 그린다. 화가  김점선
 
김점선 | KIM JOM SON
1946년생
이화여자대학교 졸업
홍익대학교 대학원 졸업

주요개인전
2003   스타타워갤러리 초대개인전
2002   갤러리 가모 개인전
2001   갤러리 현대예술관 개인전
2001   갤러리 그림 개인전
2000   갤러리 조 초대 개인전
1999   갤러리 서종 초대 개인전
1998   갤러리 서종 개관 기념전
1998   두인화랑 초대 개인전
1997   두인화랑 초대 개인전
1996   낙산갤러리 초대 개인전
1995   갤러리 마루 초대 한집 한그림 걸기전
1994   청화랑 초대 개인전
1993   수목화랑 초대 개인전
1992   갤러리 마루 초대 개인전
1991   맥화랑 초대 개인전
1990   갤러리 마루 초대 개인전
1990   예화랑 초대 개인전
1988   부산 Gallery 초대개인전
1988   미화랑 초대개인전
1988   공간미술관 초대개인전
1987~8   82년 연속 평론가 협회가 선정한 미술부뭄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 선정
1987   현대미술관 초대 개인전
1986   동숭동 토탈미술관 초대 개인전
1985   동서화랑 초대개인전
1984   조선화랑 초대개인전
1975   앙데팡당전
1972   제8회 파리 비엔낭레 출품 후보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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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그리겠다는것, 잘 보이겠다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와질 때만이 그림이 시작될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 자신의 의지로 살아야 하는 때가 되었을 때,
나는 죽음 밖에는 떠오르는 말이 없는, 낙오자가 되어 있었다.
머릿속에는 잡념과 잡지식 만이 썩은 지푸라기처럼 쑤셔 박혀 있는
아웃사이더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한숨을 쉬면서 등록금을 줬다.
큰소리 치고 들어간 대학원에서 한 학기만에 제적당했다.

통역 일을 했다. 행복하지 않았다.
돈을 많이 받았지만 모으지 않았다. 다시 죽음과 마주섰다.
나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 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림!
그림을 시작했다. 하루종일 그렸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림 그리는 일뿐인 것처럼
그렇게 살았다. 행복했다.

제대로 된 길을 찾은 기쁨을 느꼈다.
다시 회화 전공으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때 내 나이는 27살이고 지금부터 31년 전 일이다.
아버지는 나를 금치산자 취급을 했다.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만큼, 나는 헝클어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열심히 그림 그리고 학교 다니는데 그것만으로는 예술가가 안 된다고 했다.
결혼을 해서 인생의 쓴맛을 이겨내고 나서야 진정한 예술가가 된다고 했다.
맞는 소리 같아서 결혼했다. 집 나온 청년과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은 채 결혼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의 행동에 경악했다. 아이도 생겼다.
매우 가난했다. 우리가 굶는다고 해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내가 일부러 굶는 줄 알았다. 재미나 멋으로.

그럴 때 사는 길은 극도로 아끼는 것이다.
어쩌다 5만원 주고 그림 한 점을 팔면 정부미만 사고 반찬 사는 데는
돈을 한푼도 안 썼다. 동네에서 얻은 된장에 산에서 캐온 풀은 넣고 끓여서 먹었다.
그림 그릴 캔버스도 돈을 아끼려고 광목을 사다가 합판에 붙여서 그렸다.

그런 그림을 모아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림이 꽤 팔렸다.
일년 먹을 쌀을 사고 물감과 광목을 살만할 돈이 생겼다.
작업실이 따로 있을 리가 없다. 지붕에서 물이 새는 좁은 셋방에서 살았다.
그 시절에 그린 그림은 제일 큰 게 30호를 넘지 않는다.
100호 짜리 캔버스에 그림 그리는 게 꿈이었다.

비만 오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고인 물을 버리느라고 밤을 새야 했다,
그럴 때 멍히 물을 바라보느니 그림 그리면서 밤을 샜다.
내가 살던 마을의 산과 들에 대해서 환하다.
어디에 무슨 나물이 있는지 언제 어떤 먹을 만한 풀이 나는지를.
그 마을에서 산을 식량창고로 생각하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그림 그리다가도 하루에 한시간 쯤 은 산을 헤메면서 반찬감을 구해야 했다.
그렇게 살면서도 해마다 거르지 않고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꼭 일년을 버틸 만큼씩의 돈을 벌었다.
내 행동은 변함이 없는데 차츰 그림이 더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100호 캔버스를 100개나 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해마다 전시회를 연다.
전시회는 내가 먹고살 돈을 버는 길이면서 또한 그림을 보여주는 기회이다.
그림은 경건한 예배다.
자신의 영혼을 만나기 위한 순례다.
내 영혼은 하늘이 내게 내린 숙제다. 평생 풀어나가야 할 대상이다.
내 영혼 속에는 가깝게는 나와 나의 부모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멀리는 구석기시대의 내 조상의 경험까지도 흔적으로 남아있다.

나는 내 영혼의 시각화에 몰두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그린다.
 
 김점선의 작품세계 - 김점선은 단순화된 형태와 강렬한 색채로 자연물을 표현하는 작가이다. 소설가 박완서의 말처럼 김점선의 그림은 “대상이 풍기는 아리까리한 위선을 걷어내고 직통으로 본질을 포착하기 때문에 사실적인 그림보다 훨씬 더 모란은 모란답고,백일홍은 백일홍 외에 다른 아무 것도 될 수가 없다. ”거짓없고 위선 부 줄 모르는 작가의 맑고 투명한 사고는 특유의 대담함을 통해 유쾌하게 전해진다. 파격적이지만, 너무나 재미있고, 꾸밈이 없는데도 예쁘고,색채도 구성도 맘대로 인 듯 하지만 차분한 그림. 어린시절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던 때의 마음처럼 정겹다. 김점선의 그림의 소재는 동물, 나무,꽃 등 자연물이 주를 이루는데, 이 소재들은 작가의 기억과 경험속에서 새롭게 태어나, 모두 포용하고 무조건적으로 주는 자연의 모성을 닮는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은 극도로 과장되거나 변형되어 있는데, 이는 작가의 주관이나 특별한 감정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데포르마숑(Deformation)이라 불리는 이러한 기법은 대상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에 의해 고의로 왜곡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 보다, 작가가 그림에 담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전달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근대이후 대부분의 경향에서 이러한 데포르마숑적 기법을 찾아볼 수 있다. 김점선의 그림은 근작에 이르러 한층 더 간결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느낌인데, 그럼에도 대상 특유의 본질을 잘 담아내고 있어서 작가의 화풍이 한 층 더 성숙되었음을 보여준다, “잘 그리겠다는것, 잘 보이겠다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와질 때만이 그림이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하는 김점선의 그림은 대담하고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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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김점선의 그림
글쓴이 : 수레국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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