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태 (상지대 교수)
1. 고도성장에 따른 생태위기를 극복해야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고도성장을 통해 한국 사회는 크게 바뀌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가난한 농업사회에서 부유한 공업사회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환은 무엇보다 산업구조와 국민소득의 변화에 관한 통계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농업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던 산업구조가 공업이 우위를 차지하는 산업구조로 빠르게 바뀌었고, 1960년에 60달러 수준이었던 일인당 국민소득이 1990년에는 7000달러 수준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도성장에 따라 생활의 변화가 빠르게 이루어졌다. 먹고, 입고, 사는 모든 것에서 공산품의 비중이 크게 늘어나고, 나아가 그 양의 다양화와 질의 고급화가 빠르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또한 고도성장의 영향은 단순히 의식주의 변화에 그치지 않았다. 예컨대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여가생활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배경으로 ‘80년대는 한국인들의 생활사적 측면에서 획기적인 선을 그을 수 있을 만큼 중대한 변화를 경험한 시기’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고도성장은 민주화의 물질적 기초를 마련하기도 했다. 박정희는 철권통치를 통해 고도성장의 길을 열었지만, 고도성장은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한 물질적 원천을 만들었다. 고도성장에 따라 경제규모가 커지고 중산층이 크게 늘어났다. 그 결과 사회 전체적으로 이해관계의 다변화가 이루어졌다. 고도성장에 따라 물질적으로 사회의 분화가 촉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경제의 성장과 사회의 분화는 자유주의의 확대로 이어졌다. 철권통치의 사회구조가 고도성장과 함께 내적으로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고도성장의 변증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도성장의 결과로 고도성장을 이룬 사회체계 자체를 바꿀 필요와 능력이 생긴 것이다. 고도성장은 풍요롭고 편리한 생활을 이룩한 물질적 변화였으며, 이념적 자유주의운동을 현실적 자유주의운동으로 바꿔놓은 물질적 기반이었다.
박정희의 암살에 따른 민주화의 가능성은 전두환의 반동으로 처절하게 유린되었으나, 그것은 고도성장에 따른 자유주의의 확대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고도성장은 독재에 의한 일방적 통치와 이해관계의 조절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를 만들었다. 고도성장은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정치적 운동의 물질적 원천이었다.
이제 이러한 ‘고도성장의 변증법’이라는 관점에서 고도성장의 한계와 생태적 전환의 과제에 관해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고도성장은 무엇보다 수출지향적 공업화의 산물이었다. 경제성장이라는 면에서 그것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댓가를 요구했다. 그 핵심에 노동자의 착취와 자연의 착취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불행히도 아직 이 문제는 크게 개선되지 않은 상태이다.
오늘날 우리는 고도성장의 성과를 최대한 활용해서 그 폐해를 최대한 줄여야 하는 사회적 과제를 안고 있다. 노동자의 착취와 자연의 착취를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이에 따라 고도성장도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우리는 ‘사회양극화’로 이어지는 노동의 착취를 넘어서 복지사회를 이루어야 하며, 또한 위험천만한 ‘생태위기’로 나타나고 있는 자연의 착취를 넘어서 생태사회를 이루어야 한다.
생태위기는 공업화에 따른 자원의 고갈과 자연의 오염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물질적 기초가 안전하게 재생산될 수 없고 우리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게 된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생태위기에 대한 적극적 대응은 사회의 존립과 인류의 생존을 위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2. 자연파괴없는 성장이 지속가능한 성장
자본 쪽은 사실상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경제성장을 지속하는 길만이 생태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2005년 10월에 상공회의소의 지속가능경영원은 ‘국민소득과 환경 질 간 상관관계에 대한 국제비교분석’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주요내용은 ‘환경쿠즈네츠가설’(Environmental Kuznets Curve Hypothesis), 즉 “소득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환경투자 및 기술개발이 촉진되어 경제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환경오염 문제가 개선된다”는 가설을 실증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환경규제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완화하는 것이 환경오염 문제를 개선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성장 후분배론의 환경판’이라고 부를 수 있을 이 주장의 문제는 고도성장의 역사 자체가 충분히 입증해 준다. 세계 10위의 경제력과 세계 122위의 환경지수 사이의 괴리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또한 한국의 환경쿠즈네츠 가설을 실증한 연구들은 U자형 곡선이 아니라 N자형 곡선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경제성장에 따른 극심한 자연파괴로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일부 개선되었으나, 여전히 경제주의가 지배하는 속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다시 심각한 자연파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자연파괴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경우도 생태주의의 확산에 따라 비로소 자연파괴의 문제가 개선될 수 있었다.
고도성장의 결과와 관련된 논의는 크게 네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양적인 면에서 고도성장을 지속해야 한다(또는 할 수 있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 다음에 질적인 면에서 자연파괴-노동착취형 경제를 유지해야 한다(또는 할 수 있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앞의 환경쿠즈네츠가설에 관한 주장에서 잘 드러나듯이, 자본 쪽은 여전히 자연파괴-노동착취형 고도성장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지속불가능한 길이다. 우리는 세계경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조정당하기 전에 적극적으로 자연보호-복지사회형 안정성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인권을 존중하는 경제성장의 길만이 올바른 의미에서 ‘경제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자연보호는 복지사회의 본질적 내용이 되었으며, 이제 자연보호를 통한 인권의 존중은 ‘경제발전’의 핵심으로 다루어야 한다.
자연의 파괴와 오염이라는 문제는 심각한 건강의 악화와 막대한 비용의 발생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이런 맥락에서도 고도성장의 종료와 함께 양적으로 안정성장의 과제가 제기되는 동시에 질적으로 자연파괴형 경제의 악순환구조를 혁신해야 하는 과제가 제기된다. 이것은 사실 기존의 경제구조와 산업 전체를 혁신해야 하는 거대한 과제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긴급한 과제이기도 하다. 그 핵심은 자연을 파괴해서 돈을 버는 산업은 없애고, 자연을 보존해서 돈을 버는 산업을 키우는 것으로 간추릴 수 있다. 여기서 나아가 자연파괴형 경제에 의한 고도성장이 빚어낸 사회체계와 자연관의 생태적 전환을 추구해야 한다.
여러 국제연구에 따르면, 한국은 중국을 제외한 모든 경쟁대상국보다 환경규제가 미약하며, 환경규제의 일관성과 공정성에서도 비교대상국들보다 순위가 낮다. 이러한 연구들은 한국의 고도성장이 자연의 착취를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이른바 ‘요소투입형 경제’라는 것은 사실상 ‘자연파괴형 경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제 이런 경제를 넘어서 생태적 안정성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문제에 대한 제도적 이해와 접근이 대단히 중요하다. 반생태적 세력이 막대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강고하게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태적 전환은 이러한 이해관계의 해체를 통한 새로운 사회체계의 형성을 뜻한다.
3. 반생태적 대량생산-대량소비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생태적 전환은 무엇보다 경제의 생태적 전환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공업은 물론이고 농업과 서비스업에서도 생태적 전환은 긴급한 과제이다. 오늘날 농업은 기계와 화학비료에 크게 의존하는 ‘공업적 농업’이며, 서비스업도 대체로 전기와 물 등의 귀중한 자원을 대량으로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생태적 전환은 ‘전체 경제의 생태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생태적 전환은 궁극적으로 ‘문명의 전환’이라는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하는 길은 점진적이어야 한다. 오래 전에 ‘성장의 한계’에서 지적했듯이 급격한 변동은 마치 차를 과속으로 몰다가 급제동을 걸었을 때처럼, 커다란 사회적 혼란과 위험을 야기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산업과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하부구조의 생태적 전환을 통해 경제의 생태적 전환을 유도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공급하기 위한 하부구조는 그 좋은 대상이다. 오늘날 산업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전기를 대량생산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방식은 대단히 반생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생태적 산업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전기의 반생태적 대량생산-소비방식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주민운동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핵발전소나 핵폐기장 때문에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지역주민들이 생존권과 행복권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전기의 대량생산-소비방식을 대표하는 것은 핵발전이다. 2000년말 기준으로 한국은 세계 7번째 핵발전국이다. 핵발전의 순위는 경제규모의 순위보다도 더 높다. 2005년 현재 고리, 영광, 울진, 월성 등 4개 부지에 20기(1,572만kw용량)의 핵발전소가 가동되고 있으며, 2000년 현재 전체 발전설비의 28.3%, 전체 전력사용량의 40.9%를 핵발전이 차지했고, 2015년까지 8기(960만kW)의 핵발전소를 더 건설할 계획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먼저 주목할 점은 핵발전소가 들어서 있는 4개 부지가 모두 유신독재 시대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한국의 핵발전은 사람들이 핵발전의 위험성에 대해 잘 모르고 있으며, 감히 ‘나랏일’에 반대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의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이제 그런 시절은 끝났다.
한국 정부가 핵발전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까닭은 핵산업의 존재를 빼고는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한국은 핵발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핵산업이 과잉성장한 나라이다. 한국의 핵산업은 산업자원부와 과학기술부라는 거대한 정부기구들을 정점으로 해서 여러 국회의원들과 모든 재벌기업과 많은 학교들이 얽혀 있는 거대한 구조로 되어 있다.
정부와 기업을 연결하는 핵심기구는 한국전력, 한국수력원자력, 원자력문화재단이다. 핵발전을 둘러싸고 어마어마한 이해관계의 복합체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핵발전의 생태적 전환은 단순히 발전방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핵산업체계의 생태적 전환을 추구하는 것이다. 핵발전의 생태적 전환이 어려운 것은 사실 이 때문이다.
이처럼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고도성장의 길을 활짝 연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고도성장을 추진하면서 특정한 사회체계를 만들었다. 이것을 우리는 ‘박정희체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체계는 대단히 다양한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국가기구만 하더라도 군대나 경찰로 대표되는 폭력기구뿐만 아니라 강력한 개발을 통해 고도성장을 이끈 개발기구가 있다. 재벌을 중심으로 한 민간의 경제주체들, 토지투기와 학벌경쟁의 구조, 성장주의에 대한 맹신과 자연의 파괴를 발전으로 여기는 파괴적 자연관도 박정희체계의 주요요소이다.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체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4. 환경지수 갖춘 경제대국을 지향해야
생태적 성장은 필요와 능력의 두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삶의 질’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생태적 성장은 언제나 필요하다. 자연을 파괴하고 이루어지는 성장은 그 자체로 잘못인 것이다. 자연의 수용능력이 한도에 이르게 되면, 이러한 잘못된 성장 자체가 한계에 이르게 된다.
한국은 이미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다. 그러나 환경지수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척박한 반생태국가인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한국은 이미 갖추고 있다. 양극화로 대변되는 심각한 불평등 상태와 보수 기득권세력의 발호 때문에 이런 경제적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태적 성장은 심각한 반생태적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지속적 경제성장과 안정적 고용확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제 우리의 능력을 제대로 최대한 활용해야 할 때가 되었다.
재벌을 중심으로 한 보수 기득권세력은 미국형과 남미형의 이분법으로 사람들을 협박한다. 그러나 미국형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다. 우리는 미국형이 아니라 서구형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의 미래는 생태적 복지사회에 있다. 이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반생태적이고 반복지적인 보수 기득권세력의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다. 고도성장을 통해 우리가 이룬 거대한 능력으로 생태적 복지사회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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