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스크랩] 자비심이 결핍된 깨달음은....

tlsdkssk 2005. 12. 14.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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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심이 결핍된 깨달음은 ...................
불교란 고타마 붓다가 6년간의 고행 끝에 진리를 발견하고 깨달음을 이룬 후
45년간의 긴 세월을 중생들을 위해서 앞장 서서 걸어 감으로써 탄생한 종교이다.

따라서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은 무엇보다 먼저 교조인 고타마 붓다의
80 생애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즉 붓다를 제대로 알아야 불교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붓다는 왜 출가를 했을까?
붓다는 왜 깨달음을 얻은 후 중생을 교화하고 설법하는데 45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 했을까?
붓다의 깨달은 마음은 어떤 것일까?... 등등

아주 기초적인 의문에서부터 시작하여 붓다의 깨달은 마음을 가질려는 마지막 단계까지
붓다라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한 인간의 생애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붓다도 제대로 보이질 않을 뿐더러 그 가르침 또한 제대로 알수가 없는 것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기도 하지만 자비의 종교이기도 하다.
깨달음만 주장하는 불교는 존재할 수 없지만  
자비만 주장하는 불교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왜나하면 깨달음이란 자비심이 가져다 주는 자연스럽고도 고결한 결과물이지만
자비심이 깃들지 않은 깨달음은 매우 위험하고도 잘못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 이며 또한 붓다가 45년간 외쳐온 진리와도 거리가 먼 것일수 있다.

불교도들은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타종교의 수많은 많은 성인들도 우주의 법칙과 세상의 진리에 대한
일정수준의 깨달음에 도달 했다고 하는 것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진리의 깨달음이란 한가지만 본다면 불교의 수행승들이나
타종교의 수행자들이나 별반 다를게 없다. 타종교의 수행자들이 남겨놓은
모범적인 행적과 보석같은 가르침들은
불교도들인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진한 감동과 인생의 어둠속의 등불이 될수 있다.

사랑이 없어도 결혼이 가능하듯
자비심이 없어도 진리의 깨달음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사랑이 없이 조건만 보고 결혼을 했거나
강제로 한 결혼이 결국 행복 하다고는 할수 없으며
결혼의 결과 또한 좋을리가 없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다.
억지로 사랑 해야지 마음 먹는다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길리도 없다.

자비심이 없이 출가를 하고 깨달음에 이를수는 있지만
깨달았다고 자연스럽게 자비심이 우러나거나
억지로 낼 수는 없는 것이다.

붓다가 발견한 진리는
붓다가 태어나 발견을 했던 안 했던 그 진리는 항상 존재해 있었고
또한 앞으로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의 수행자 뿐만 아니라 타종교인도 얼마든지 발견해 낼 수 있는
이 우주가 소멸하고 한줌의 먼지로 변한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진리 그 자체 일 뿐이다.

붓다가 무아라고 무상이라고 하면 진리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면
진리가 아니라는 법은 없다. 무아나 무상의 진리는 언제나 존재해 왔고
또 앞으로도 존해하는 것일 뿐 이다. 그리고 누구나 찾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불변의 진리일 뿐이다. 오랜세월 흙속에 묻혀 있고 잊혀져 있던
진리를 붓다가 발견하고 찾았을 뿐이다.

불교가 불교다운 것은 붓다가 진리의 빌견자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발견한 진리를 찾는 방법과 그 실천 방법속에 대자비라는 가장 순수하고도
고결하고 성스러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향기로운 향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정으로 삼보에 귀의하고
삼보가 왜 귀의처(피난처. 안식처)가 되는가를 제대로 알면
타종교 수행자들의 깨달음이
붓다의 깨달은 마음과 그리고 훌륭한 영적 가르침을 남긴 제자들의 깨달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쉽게 판별할 수 있다

그 판별의 기준점이 바로 붓다의 마음인 자비심, 자.비.희.사. 라는 네가지

성스럽고 고결한 사무량심, 동체대비사상(同體大悲思想), 자리이타(自利利他) 그리고 사홍서원인 것이다.

타종교의 깨달음에는 결코 붓다가 가르쳐 주신 이와 같은 불교의 궁극적인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
일체 중생을 깨닫게 하지 않고는 나의 깨달음도 완성될 수 없으며
또한 보살의 대비원력(大悲願力)인 동시에 자비(慈悲) 인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도 타종교에서는
찾아 보기 어렵다.

붓다는 왜 출가를 했을까?
그 이유는 생로병사를 중생의 고통을 보고 느낀 苦(고)를 싫어하는 염리심과
그리고 동물들이 먹고 먹히는 것을 보고 느낀 연민에 의한 자비심의 발로였던 것이지
결코 진리를 발견 하겠다거나 인생무상을 느끼거나 해서 성을 탈출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염리심과 자비의 마음이 없이 출가를 하거나 또는 수행을 하거나
또는 불교를 공부 한다면 이는 쉽게 잘못된 길로 갈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붓다의 마음 없이 출가한 잘못된 출가는 결국 잘못된 수행을 낳게 되고
궁극적으로 잘못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불교도들 또한 이러한 붓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아무리 경전을 읽고 삼천배 만배를 한들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 하지 못하면
결국은 잘못된 길 즉 붓다가 가르쳐 준 길로 가지않고 엉뚱한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찾아 수행하는 것은
곧 내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불심을 찾는 일이며
불심이란 바로 붓다의 마음이다
붓다의 마음이란 바로 중생에 대한 연민의 정인 자비심인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진리를 찾는 마음에는 자비가 처음부터 끝까지
스며들어 있어야 하며
진리의 궁극적인 도달점에 이르게 되면 진리를 보는 혜안과 함께
자비심도 완성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붓다는 깨달은 이후에 더 많은 일을 한 분이며 깨달음을 이룬 이후의 시간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보다 더 오래 이 세상에 머무신 분이다.
(29세 출가, 35세 깨달음, 45년 설법, 80세에 열반에 드심)

붓다께서는 훌륭하고 똑똑한 십대제자나 1250 제자들에게만 1-2년 정도 진리를 가르치고
그리고 설법 교육등은 십대제자들에게 모두 맡겨 두고
산속이나 경치 좋은 곳에서 구름과 바람을 벗삼으며 일생을 보넬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도 있었으며
그 어느 누구도 이러한 붓다의 일생에 손가락질을 하거나 욕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붓다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45년이란 긴세월을 맨발로 걸어서 인도 전역을 다니면서
苦(고)에 허덕이고
어둠속에서 보잘것 없는 삶을 살아가는 중생들을 보다 성숙한 단계로 끌어
올리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이다.

일체 중생이여
행복하라 편안하라 안락하라 ...
이것이 붓다의 삼대 서원이며 대자비심으로 그 서원을 몸소 실천하신 것이
그분의 45년 생애였던 것이다.

붓다의 마음이 없거나 대승의 보살심이 없는 수행이나 깨달음은 우리들 세속인이나
조금도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비심이 없이 깨달은 자들의 독선과 아집은
불교를 발전하게 하기는 커녕 우매한 중생들에게 불설과 비불설의 혼란만
가중 시키고 범부 중생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엄청난
폐악만 낳을 뿐이다.  

그러기에 자비심이 없는 깨달음은
깨달은 후에는 중생들을 찾아가기 보다는
찾아오는 중생들조차 제대로 만나 주질 않는 것이다

자비심이 없는 깨달음은 찾아오는 사람이 귀찮다고 멀리 멀리 산속에 혼자서
신변 잡기등을 중심으로 하잘것 없는 책이나 쓰면서 구름과 바람과 벗하며 사는 것이다

깨달은분들이 내세우는 수많은 주장들
내 것이 제일 좋다느니 내 길만이 유일하다느니
돈수니 점수니 논쟁이나 하고 간화선이니 염불이니 선종이니 교종이니
대승이니 소승이니 상대방을 폄훼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분들이 만든 열손가락으로도 다 셀 수 없는 많은 종단들...

그분들이 진정 붓다의 자비심과 함께 깨달음이 완성 되었다면
(붓다가 말씀하신 네단계 깨달음의 수준에서 보면 결코 지혜가 완성된 아라한의
경지는 아니다)
깨달음의 수준과는 상관없이
남은 일생을 전국 사찰과 마을을 돌면서
한여름의 소낙비 같은 시원한 법문과
친견하고파 목매는 중생들의 조그만 마음이라도 달래 주었을 것이다

우마차로 산간 곳곳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불법을 똑바로 세우기 위해서 평생을 보네신 수행승들
금세기 최고의 아라한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태국의
아짠문 스님의 자비심 넘치는 일생
티벳불교의 금강승들의 포교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등은
오늘날 우리 불교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스스로 반문케 해 주는
평범한 일례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말하자면 불교는 나 아닌 이웃에 대한 자비의 종교이지 결코 나 혼자만의 깨달음을 위해서
그리고 결코 그 깨달음은 혼자서 즐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종교는 아니다.
그러한 깨달음은 타종교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기에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이 깃들어 있는 불교가 타종교와 다른 것이다.

깨달음을 위해서 자비심을 팽개치는 것이 수행의 본질이 아니다
자비심이 없는 수행은 결코 佛道 (불도)가 아니다
깨달은 다음에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자비심과 보살행은 수행의 밑 바탕이며 처음과 끝인 것이다.

그러기에 자비관 수행은 붓다가 가르쳐 주신 명상의 주제중에서도 가장 수승하고 고귀한 것이기도 하다

보살도란 붓다의 원음과 정신으로 돌아가자며
대승불교가 표방한 정신적 실천적 불교의 이념이자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이다. 구들방에 앉아서 자신의 깨달음만 추구하는 부파불교를 비난하고
붓다가 남겨놓은 발자욱을 따라 올바른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제시한 것이
보살도인 것이다.

결코 수행의 방법을 논하거나 발전 시킨것이 대승불교가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대승경전은 아라한을 비판하면서 까지 대승의 보살도를 누누이 강조 했으며

결코 자비심없는 깨달음을 강조 했거나 또는 부처의 마음인 자비심 없는 불교도가
내생에 좋은곳에 태어난다고 말한 곳은 한군데도 없는 것이다.

공짜밥 얻으 먹으며 평생을 수행하고도 깨달음을 못 얻는 것 보다야
한번이라도 자리이타의 보살행을 행했다면 그것이 훨씬 더
붓다의 제자다운 행동이며
자비심이 없는 절름발이 지혜를 구하고 또 깨달은 척 하기 보다는
중생들의 삶속에서 苦를 함께 나누는 것이
진정으로 붓다가 원하고 말씀 하셨던 가르침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기에 오늘날 붓다의 정법이 살아 있는 남방 불교 국가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자비경을 암송하며
붓다의 마음인 자비를 하루도 빠짐없이 되새기는 것이다.

**** 가슴에 담겨지는 글이라서 주저없이 담아네
****실론섬 에서 도 보살이 계시니 ...()

출처 : 자비심이 결핍된 깨달음은....
글쓴이 : 향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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