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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초의선사의 차 사상(茶思想)

tlsdkssk 2005. 11. 14. 20:05

초의선사의 차사상(茶思想)

 선사의 차사상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으리라. 먼저 동다송(東茶頌)을 통해 본 선사의 다도관(茶道觀)과 다신전(茶神傳)을 통해 본 차생활과 그리고 다시(茶詩)를 통해 본 차정신일 것이다.

 동다송은 초의선사가 차를 알고자 해서 묻는 해거도인 홍현주(海居道人 洪顯周)에게 지어서 보낸 차의 전문서이다.

 동다(東茶)라는 말은 동국(東國) 또는 해동(海東)이라는 뜻으로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차를 말한다. 이 차를 게송(偈頌)으로 읊었다고 해서 동다송이라고 했다.

 이 동다송의 대의(大意)를 요약해 보면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첫째로 차는 인간에게 너무나도 좋은 약과 같은 것이니 차를 마시도록 해라. 둘째로 우리나라 차는 중국차에 비교해서 약효나 맛에 있어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육안차(六安茶)의 맛이나 몽산차(蒙山茶)의 약효를 함께 겸비하고 있다. 셋째로 차에는 현묘(玄妙)하고 지극(至極)한 경지가 있어 다도(茶道)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초의선사의 다도관(茶道觀)이란 무엇인가. 선사는 그의 동다송 제29송에서 말하기를, 다도란 신(神) 체(體) 건(健) 영(靈)을 함께 얻는 것이라고 했다. ‘평해서 말하기를 채다(採茶)는 그 묘(妙)를 다해야 하고, 조다(造茶)는 그 정성(精誠)을 다해야 하고, 물(水)은 그 진(眞)을 얻어야 하고, 포법(泡法)은 중정(中正)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체(體)와 신(神)이 서로 고르고 건(健)과 영(靈)이 서로 함께 하는 것을 일컬어 다도(茶道)에 이르렀다고 한다.(評曰 採盡其妙 造盡其精 水得其眞 泡得其中 體與神相和 健與靈相倂 至此而茶道盡矣)'

 선사의 다도관을 알고자 한다면 문(門) 행(行) 득(得)의 길을 거쳐야 한다.  대저 문이 있어서 들고 행(行)해서 얻는(得) 법이다. 4문(四門)이 있으니 채(採) 조(造) 수(水) 화(火)가 그것이며, 행에는 4행(四行)이 있으니 묘(妙) 정(精) 근(根) 중(中)이 그것이며, 득에는 4득(四得)이 있으니 신(神) 체(體) 건(健) 영(靈)이 그것이다.

 4문의 채란 채다(採茶)를 말하며 조란 조다(造茶)를 말하며, 수란 수품(水品)을 말하며 화란 화후(火候)를 말한다. 4행의 묘는 채다의 현묘(玄妙)함을 말하며 정은 조다의 정성(精誠)스러움을 말하며, 근은 수품의 근본(根本)을 말하며, 중은 화후의 중화(中和)를 말한다.

 4득은 진다(眞茶)와 진수(眞水)를 얻어야만이 얻을 수 있는데,  차(茶)는 물(水)의 신(神:정신)이요 물은 차의 체(體:몸)이니, 진수(眞水)가 아니면 그 신(神)이 나타나지 않으며 진다(眞茶)가 아니면 그 체(體)를 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체와 신이 비록 온전하다 하더라도 오히려 중정(中正)을 잃으면 안된다. 중정을 잃지 않으면 건(健)과 영(靈)을 함께 얻는다. 신(神:정신)과 체(體:몸)는 기(機:기틀)와 용(用:작용)과 같고, 건(健:건전)과 영(靈:신령)은 이(理:이치)와 묘(妙:현묘)와 같다. 그러므로 신(神:정신)이 건(健:건전)하면 기(機:기틀)가 이(理:이치)하고, 신(神)이 영(靈:신령)하면 기(機)가 묘(妙:현묘)하고, 체(體:몸)가 건(健)하면 용(用:작용)이 이(理)하고, 체(體)가 영(靈)하면 용(用)이 묘(妙)하다.

신(神)과 체(體)는 기(機)와 용(用)과 같아서 불이(不二)해야만 건(健)과 영(靈)을 얻는다. 건(健)과 영(靈)이 불이(不二)하면 묘리(妙理)하고, 묘리하면 묘경(妙境)하고, 묘경하면 묘각(妙覺)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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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다(採茶)란 차를 따는 일을 말한다. 차나무에서 차잎을 따는 것은 그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너무 빠르면 맛이 온전하지 못하고 늦으면 싱그러움이 흩어진다.  곡우(穀雨:4월20일)와 입하(立夏:5월5일) 사이가 적기인데 일창일기(一槍一旗) 이기(二旗)의 잎이 푸른빛이 나거나 쭈글쭈글하거나 돌돌 말린 것이 좋다.

 차잎을 딸 때 밤새 구름이 끼지 않고 이슬이 흠뻑 내린 후에 딴 것이 좋으며, 비온 후나 구름이 끼었을 때는 따지 않는다. 그리고 계곡이나 암석 사이에서 자란 것이 좋다.  이처럼 채다는 현묘함을 다 해야만 된다.

 그 현묘(玄妙)함를 다해서 채취한 차잎을 가지고 조다(造茶)를 하는데 솥이 매우 뜨거워졌을 때 급히 차잎을 넣어 덖어야 한다.  차가 익어서도 안되며 태워서도 안된다. 차가 익으면 빛깔이 검고 타면 노랗고 흰 반점이 생긴다.  이렇게 적당한 열기로 대여섯 번 정도 덖으면 차가 잘 건조된다.

 불은 연기가 나지 않아야 되며 불의 기운이 고르게 되어야만 한다. 양질의 차잎과 고르고 순수한 불과 만드는 사람의 정성스런 마음이 합쳐져서 진다(眞茶)가 나오는 것이다.

수품(水品)은 차를 끓일 물을 말하는데, 산마루에서 나는 석간수가 좋고 우물물이 다음이며 강물은 나쁘다.  물에는 8덕(八德)이 있으니, 가볍고(경:輕) 맑고(청:淸) 시원하고(냉:冷) 부드럽고(연:軟) 아름답고(미:美) 냄새가 나지 않고(부취:不臭) 비위에 맞고(조적:調適) 탈이 나지 않는 것(무환:無患)이 그것이다.

 물은 그 근본(根本)을 구하지 않으면 상하거나 오염되기가 쉬워서 고여 있는 우물물이나 강물은 쓰지 않는다. 바로 그 근원지에서 솟아나는 샘물이어야 한다. 이 샘물을 구하여 체성이 튼튼한 불로 끓이면 좋은 탕수(湯水)가 된다. 만약 대나무나 썩은 나무가지나 낙엽같은 연료는 불의 체성이 허약하여 탕(湯) 또한 체성이 약해진다. 이런 탕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연기가 나지 않고 체성이 튼튼한 불을 구하여 가볍게 빨리 끓여야 한다.

 이때 문(文)이 지나치면 수성(水性)이 유약하게 되고 수성이 유약하면 차가 뒤지고 쳐지며, 무(武)가 지나치면 화성(火性)이 극렬해져서 차를 위해 물이 억제되며 성근 기가 위로 뜬다. 이것을 문무화후(文武火候)라고 하는데 지나치면 모두 중화(中和)를 얻지 못한다.  그 적절함을 다하여 중화를 얻어야 진수(眞水)가 나오는 법이다.

진수와 진다를 얻었을 때 비로소 중용(中庸)의 덕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진다와 진수가 아니면 신과 체를 규명할 길이 없고, 신과 체를 규명하지 못하면 건과 영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다와 진수를 얻어서 신과 체를 규명하고 신과 체가 불이(不二)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포법(泡法:차 울궈내는 법)을 하는데 포법은 중정(中正)을 지켜야만 한다 그 요체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차가 많아도 안되고 물이 많아도 안된다. 차가 많으면 빛깔이 노랗고 빨가며, 맛은 쓰고 떫으며 향내도 좋지 않다.  반대로 차가 적고 물이 많으면 맛이 온전하지 않고 빛깔도 엷고 향내도 미숙하게 된다.  적당한 양의 차와 물을 넣어야 한다.

 둘째로 다관에서 차를 울구는 시간이다. 너무 빨리 따라내면 맛이 미숙하고 향내도 약하며 빛깔이 엷고 좋지 않다. 반대로 너무 오래 울구면 빛깔도 탁하고 맛도 쓰고 떫으며 향내도 지나치게 된다. 알맞게 울궈야 한다.

 세째 차를 잔에 골고루 나누어 따를 때, 너무 급히 서둘러 따르는 것을 급주(急主)라 하고, 게으르고 완만하게 따르는 것을 완주(緩注)라고 한다. 완주나 급주를 해서는 안된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따라야 한다.

이와 같이 적당한 양의 차를 넣어 알맞게 울궈서 적당한 시간에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서 마시는 것이다. 이것을 중정법(中正法)이라고 한다. 중정법을 잘 지키는 길은 마음 속에 중용(中庸)의 덕을 품되 그 팔이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적의함을 다하면 중정을 얻게 된다.

 중정을 얻게 되면 자연히 신과 체를 규명하게 되고 신과 체를 얻으면 건과 영을 얻게 되는데, 신과 체가 불이하고 건과 영이 불이하면 기용(機用)이 불이하고 기용이 불이하면 묘리(妙理)가 불이하고 묘리가 불이하면 이치가 현묘한 경지에 들어 뜻한 바를 얻게 되는 것이다.  생각으로 헤아릴일이 아니로다. 오직 체득하는 데 그 진체(眞諦)가 있으니 진정으로 구해볼 일이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다도관(茶道觀)을 완성한 선사의 차생활과 정신은 어떠했는가. 선사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번거로움은 피하고 자유스럽고 검소하며 편안하게 즐기는 방법을 취했다. 그러나 좋은 차와 좋은 물, 잘 끓여서 중정을 잃지 않은 차를 원했다. 그렇다.  진다와 진수, 그리고 중정을 잃지 않은 차, 이것이면 족한 것이다. 이 외에 더 구할 것이 있다면 거들먹거리는 사람이나 행세하려는 사람일 것이다.

여기에서 선사의 제자인 허소치(許小痴)가 말하는 초의선사의 차생활을 들어보기로 하자.  

 『바로 그 노장님(초의)이 내 평생을 그르치게 만들어 놓았다고나 할까요. 아주 젊은시절 내가 초의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멀리 돌아다닐 생각을 했겠으며 오늘날까지 이처럼 고고하고 담적하게 살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을미년(1835년)에 나는 대흥사에 가서 초의선사를 뵈었습니다. 선사가 거처하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소나무가 울창하고 대나무가 무성한 곳에 두어 칸 초가를 얽어 그 속에서 살았지요. 수양버들은 처마를 스치고 작은 꽃들은 뜰에 가득하여 함께 어울려 뜰 복판에 파둔 상하 두 연못 속에 비치어 아롱졌습니다. 추녀 밑에는 크고 작은 차 절구를 마련해두고 있었습니다.  선사의 자작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못을 파니 허공 중에 밝은 달이 담궈지고
간짓대를 이어 구름샘을 얻었네.
눈앞을 가리는 나뭇가지를 잘라내니
석양 하늘에 아름다운 산이 저리도 많구나.

  이와 같은 시구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선사의 그 청고하고 담아한 경지는 세속인들이 입으로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양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새벽이나 달 뜬 저녁이면 선사는 고요에 잠긴 채 시를 읊으면서 흥얼거렸습니다.

향불을 피워 향내가 은은히 퍼질 때에 차를 반쯤 마시다 문득 일어나 뜰을 거닐면서 스스로 취흥에 젖어들곤 했습니다. 정적에 잠긴 작은 난간에 기대어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새들과 상대하고 깊숙한 오솔길을 따라 손님이 찾아올까봐 살며시 숨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초암에 있는 선사의 서가에는 서책들이 가득했었는데 그 모두가 다 연화와 패엽(貝葉)이었습니다. 상자 속에 가득찬 구슬 같은 두루마리는 법서와 명화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초암(일지암)에서 바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배우며 시를 읊고 경을 읽으니 참으로 적당한 곳을 만난 셈이었습니다.

더구나 매일매일 선사와의 대화는 모두 물욕 밖의 고상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비록 평범한 세속의 사람이지만 어찌 선사의 광채를 받아 그 빛에 물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빛을 받고서 어찌 세속의 티끌과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노장님이 나를 그르치게 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소치의 말처럼 물욕 밖에서 청고하고 담아하게 살다간 선사의 차생활은 한폭의 신선도와 같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한생을 걸림없이 살다가신 선사의 차정신은 무엇인가. 선사는 그의 다론(茶論)에서 말씀 하시기를 '8덕(八德)을 겸비한 진수(眞水)를 얻어 진다(眞茶)와 어울려 체(體)와 신(神)을 규명하고 거칠고 더러운 것을 없애고 나면 대도(大道)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옛부터 성현님네가 즐겨 마시게 되었고 그 성품은 군자를 닮아 사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악하지 않은 차, 이 차는 묘한 근원을 가지고 있어 그 근원에 집착하지 않으면 바라밀(婆羅密)의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바라밀이란 일체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걸림이 없으므로서 자유자재한 경지에 이른것을 말한다. 차를 마시면서 신과 체를 규명하여 건과 영을 얻어 집착함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바라밀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현묘(玄妙)한 경지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차(茶)이다.

선사는 이와 같이 바라밀에 이르는 길에서 모든 법이 불이(不二)하니 선(禪)과 차(茶)도 불이하고 제법(諸法)이 일여(一如)하다고 했다. 그래서 선사는 차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았다. 이같은 선사의 차정신은 '모든 법이 둘이 아니니 선과 차도 한 경지니라(諸法不二 禪茶一如)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불이사상(不二思想)은 모든 면에 나타나 선과 차가 둘이 아니고 시(詩)와 선이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고, 차와 시가 둘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선의 여가에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고 차를 마시며 글씨를 썼으니 세인들은 시.서.화(詩書畵) 3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이처럼 선사는 차를 마시다가 흥얼흥얼 시를 읊조리기도 하고 때로는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 세상사를 잃어버리기도 하며, 정적에 잠긴 난간에 기대어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기도 하며, 깊숙한 오솔길을 따라 송림에 걸린 달을 보기도 하고, 향을 사루어 은은히 퍼질 때 차 한잔 달여놓고 무심히 앉아 있으니, 선사의 청고하고 담적한 차생활은 참으로 쉽고 편안하다.

 이러한 선사의 사상은 다산(茶山)과 추사(秋史)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니 추사가 선사께 보낸글귀 가운데 이런 사상을 내포한 글이 많이 있다. 명선(茗禪)과 선탑다연(禪榻茶烟) 그리고 정좌 처다반향초  묘용시수류화개(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가 그것이다. 이는 모두 선다일여(禪茶一如)의 경지를 천명한 것이다.

여기에 선사의 게송 한 구절을 소개한다.

대도(大道)는 지극히 깊고도 넓어
가 없는 바다와 같고
중생이 큰 은혜에 의지함은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는 것과 같네.
오묘한 이치는 밝고 역역한 것이라.
억지로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는 것.
어찌 감히 불근(不根)으로써
일찍이 해조음(海潮音)을 듣고서
황망히 군자의 방에 들어가
함께 진리를 말할 수 있으랴.
달빛도 차가운 눈 오는 밤에
고요히 쉬니 온갖 인연이 침노하네
그대는 아는가 무생(無生)의 이치를,
옛날이 곧 오늘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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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선사 생애와 사상에서)

출처 : 초의선사의 차 사상(茶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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