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스크랩] 가을의 敍情"입니다

tlsdkssk 2005. 11. 2. 10:49
 꽃 출처 : www.hope-21.co.

 

閨情 : 규정
李玉峰
有約郞何晩 : 유약낭하만 - 약속도 하셨건만 님은 왜 이리 늦으시나.
庭梅欲謝時 : 정매욕사시 - 뜰의 매화는 이제 지려고 하는데.
忽聞枝上鵲 : 홀문지상작 - 문득 나뭇가지 위의 까치소리 듣고는
虛畵鏡中眉 : 허화경중미 - 헛되이 거울보며 눈썹을 그리네.
매화가 지기 전에 돌아온다는 약속을 한 고운 님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이 잘 표현된 시입니다. 
반가운 손님이 오는 징조라는 까치소리를 듣고는 
아닌줄 알면서도 혹시나하며 화장을 하는 마음...
님"은 아시기나 헌지... ... ... ^^??
허준구의 新한시기행"참조 하여,
옥봉이씨:玉峰李氏"  대하여 올립니다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옥봉.
군수를 지낸 이봉지(李逢之)의 서녀이다. 
신분이 미천한 때문에 조원(趙瑗)의 소실이 되었다.
15세에 출가하여 40세 전에 임진왜란을 만나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옛 관습으로 보면 급제하기 전에 부실(副室)을 두는 예는 극히 드물었는데, 
조원도 급제 후에 옥봉을 맞아들였다면, 
계년(笄年)이 15세이므로 죽은 나이는 대략 35세 안팎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원이 문과에 급제한 것이 1572년(선조 5)이고, 
임진왜란은 이보다 20년 후인 1592년에 일어났다. 
옥봉이 남긴 시는 모두 32편으로, 
1704년(숙종 30)에 조원의 현손인 정만(正萬)의 손에 의하여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끝에 부록으로 편입되어 오늘날까지 전하게 되었다.
옥봉의 시는 거의 대부분 이별을 주제로 읊은 시들이다.
이 가운데 〈규정 閨情〉, 
그리고 남편에게 보낸 〈증운강 贈雲江〉 등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재치와 기교가 섬광처럼 교직(交織)되어 있다.
허균(許筠)은 《학산초담 鶴山樵談》에서 
그녀의 시가 매우 밝고 강건하여 
자못 부인의 화장기 나는 말이 아니라 하였고, 
《성수시화 惺叟詩話》에서도 그녀의 시는 
맑고 건장하여 화장기가 없다고 하여, 
시경이 여성답지 않고 높음을 극구 칭찬하였다.
또, 신흠(申欽)은 
“근래 규수의 작품 중 승지 조원의 첩 이씨가 제일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홍만종(洪萬宗)도 《시평보유 詩評補遺》에서 
〈춘일즉사시 春日卽事詩〉가 만당의 조격(調格)이 있다고 칭찬하였고, 
《소화시평 小華詩評》에서는 
“(사람들이)조원의 첩 옥봉이씨를 조선제일의 여류시인이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허난설헌(許蘭雪軒)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여류시인으로 
이미 당대에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
夢魂:꿈속의 넋 
近來安否問如何 : 근래안부문여하 - 안부를 묻습니다.. 어떠하시나요? 
月到紗窓妾恨多 : 월도사창첩한다 -  달 비친 사창(紗窓)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若使夢魂行有跡 : 약사몽혼행유적 -  꿈 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門前石路半成沙 : 문전석로반성사 -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걸. 
위시는 옥봉 이씨께서
남편 조원"에게 보냈던 시라합니다... ... ^^
자아~
다음은 옥봉이시의 삶을 느껴 보시길
사랑에 꺾인 애달픈 詩心... ... ...입니다
조선 인조 때. 승지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조원을 아느냐"는 물음에 조희일이 부친이라 대답하니,
원로대신은 서가에서 "이옥봉 시집"이라 쓰인 책 한 권을 꺼내보였다. 
조희일은 깜짝 놀라. 
이옥봉은 아버지 조원의 소실로 생사를 모른 지 40여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옥봉의 시집이 어떻게 해서 머나먼 명나라 땅에 있게 되었는지 
조희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로대신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40년 전쯤 중국 동해안에 
괴이한 주검이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나 흉측한 몰골이라 아무도 건지려 하지 않아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로 떠돈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시켜 건져보니 
온몸을 종이로 수백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 시체였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벗겨 냈더니 
바깥쪽 종이는 백지였으나 
안쪽의 종이에는 빽빽이 시가 적혀 있고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씌어 있었다. 
읽어 본즉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들이라 
자신이 거둬 책을 만들었다고 했다.
온몸을 시로 감고 죽은 여인 이옥봉.
이옥봉은 조선 명종 때 충청도에서 왕족의 후예 이봉지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옥봉은 
신분의 굴레로 첩살이 밖에 못함을 알게 되자 
결혼에 대한 꿈을 버리고 서울로 갔다. 
옥봉은 장안의 내로라 하는 명사들과 어울리며 
단종 복위운동에 뛰어들었고, 
곧 시귀나 짓는 선비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옥봉은 조원이란 선비를 사랑하여 첩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첩살이가 싫어 결혼을 거부했던 그였지만 
사랑 앞에서는 약해진 모양이다. 한데, 
조 원은 옥봉을 받아들이는 대신 
앞으로는 절대 시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라 했다. 
여염의 여인이 시를 짓는 건 지아비의 얼굴을 깎아내리는 일이 라면서. 
옥봉은 맹세했다. 
자신의 시는 외로움과 허망함의 발로였으니...^^ 
지아비를 얻으면 시를 쓰지 않아도 좋으리...^^ 라고.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조원과 친분이 두터운 파주목사에게 손을 좀 써달라 했다.
사정을 들어본즉 아전들의 토색질이 분명했다. 
옥봉은 파주목사에게 시 한수를 써 보냈고, 
산지기는 무사히 풀려났다. 
그러나 이 일로 옥봉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원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여자와는 살 수 없다"며 내친 것이다.
뚝섬 근처에 방 한칸을 얻어 지내며 옥봉은 
조원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으나 허사였다.
조원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10년 가까이 시혼을 억눌러오다가 
산지기를 위해 한수 지어준 일로 쫓겨나다니. 
옥봉으로서는 야속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으리라. 
옥봉은 애통한 마음을 담아 시를 읊고 또읊었다.
더이상 참을 까닭도 없었으니까.
平生離恨成身病 : 평생리한성신병 - 평생 이별의 한이 병이 되어 
酒不能療藥不治 : 주불능료약불치 -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하네
衾裏泣如氷下水 : 금리읍여빙하수 - 이불 속 눈물이야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과 같아
日夜長流人不知 : 일야장류인불지 - 밤낮을 흘러도 그 뉘가 알아주나
(해설 글 출처 : 한겨레 21. 1997. 7. 17 / 박은봉/ 역사연구가 )
조원을 단념한 옥봉은 
평소 가보고 싶었던 중국으로 가 
마음껏 시심을 펴보려 했나 봅니다. ....
그러나 여인네 몸으로 어찌 타국의 삶....이...
...
... 
그리 만...만...했겠는지요... ...
자신의 시로 
몸을 감고 낯선 바다에 뛰어들었나 봅..니다. 
잘 읽고 느끼셨나요?
[음악정원] 님^^
겉 멋 들어 옮기는 저는 넘 슬프고
애잔하여... 밤을 두고 울었습니다...
사랑을 위해 시를 포기했지만...
그사랑이 굴레가 되어 무주고혼"되어도...
님을 포기못함""이 여인네 마음"" 아닐런지요...
종국에는 시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 여인의 삶이 
너무도 쓸쓸합니다.


oom.()


파일링크 : 04 Ayer Me Dijo Un Ave.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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