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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엔도 슈사쿠의 『침묵』

tlsdkssk 2015. 2. 19. 19:04

 

 

  일본이 자랑하는 현대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대표 작품. 배경은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시기.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던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 신부의 선교와 곧 이은 배교(背敎) 소식, 그 배교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잠복한 제자 신부가 겪는 고난과 갈등.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참히 죽어 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침묵만 하고 계신 하나님!

 

  신학적으로 해결하기 난해한 문제,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문제를 신앙을 부인해야만 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고민하는 인물들의 내면 묘사를 통해 조용하지만 가슴 뜨겁게 그리고 있다.

 

  책 속으로

 

  “일본인들은 인간을 미화하거나 확대시킨 것을 신이라 부르고 있어. 인간과 동일한 존재를 신이라 부르지.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하나님은 아니야.”

  “당신이 이십 년 동안 이 나라에서 깨달은 것이 그것뿐입니까?”

  “그것뿐이야.”

  페레이라는 쓸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문에 내게 선교의 의미가 없어지게 된 거야. 이곳까지 어렵게 가져온 묘목이 이 일본이라는 늪지대에서 어느 틈엔지 썩어 갔어.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깨닫지도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지.” (p.235)

 

  “내가 여기서 보내던 밤에는 다섯 사람이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있었어. 다섯 개의 소리가 서로 뒤섞여서 귀를 때렸어. 관리는 이렇게 말했지. 당신이 배교하면 저 사람들을 곧 구덩이에서 꺼내 밧줄도 풀어 주고, 약도 주겠다고 말이야. 나는 대답했지. 저 사람들은 왜 배교하지 않느냐고. 관리는 웃으면서 가르쳐주었어. 그들은 이미 몇 번이나 배교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네가 배교하지 않는 한 저 농민들을 구할 수 없다고.”

 

  “당신이 기도를 했어야 하는 건데.”

  신부가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물론 기도했지. 나는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었어. 하지만 기도도 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했지. 저 사람들의 귀 뒤에는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그 구멍과 코와 입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지. 그 고통을 나는 내 몸으로 맛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어. 기도는 결코 그 고통을 덜어주지 못해.”(p. 235)

 

  “자네는 그들보다 자기 자신이 더 소중하겠지. 적어도 자기 자신의 구원이 중요한 것일 테지. 자네가 배교하겠다고 말하면 저 사람들은 구덩이에서 나올 수가 있어. 고통에서 구원받는 거지. 그런데도 자네는 배교하려고 하지 않고 있어. 자네는 그들을 위해 교회를 배반하는 일이 두렵기 때문이야. 나처럼 교회의 오점이 되는 일이 두렵기 때문이지.” (p.264)

 

  추천평

 

 『침묵』에는 엔도 특유의 재능인 인상적인 발단, 대담한 역사적 상황 설정, 신학으로 해결하기 난해한 문제, 거리낌 없는 성격 묘사 등이 잘 나타난다. 절제된 고전 기법으로 묘사된 등장인물들의 시련, 일본 문화와 지극히 서양적인 종교 양식의 미묘한 대립 등이 엔도가 이 책에서 그려낸 업적이다.

  ㅡ퍼블리셔스 위클리

 

  이 작품의 기조(基調)는 그렇게 잔인한 박해에서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신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반문하는 데 있다. 어째서 이러한 시련을 견뎌야 하는지 물어도 하나님은 대답이 없으시다. 하나님이 대답하시지 않는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예지(叡智)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서이지만, 엔도 씨의 작품은 그 점에 얽힌 또 다른 문화사적인 해답을 제시한 문제작이다.

  ㅡ가와카미 테츠타로우

 

 

  독후감 1)

 

  신의 자리, 인간의 자리

 

  캐러웨이 | 2014-10-15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7828832

 

  신실한 크리스천도 아닌 내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좋아하는 것은 딜레마에 처한 인물을 성실하면서도 당혹스럽게 다루는 방식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로드리고는 자신의 스승이자 일본에 선교사로 33년간이나 체류한 신부 페레이라가 고문을 받고 배교했다는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신부다. 일본 관헌에 의해 붙들린 로드리고는 성화를 밟지 않으면 자기뿐 아니라, 일본의 신자들도 죽게 되는 상황에 몰린다. “너는 그들을 위해 죽으려고 이 나라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은 너 때문에 저 사람들이 죽어 간단 말이야.”(212쪽)라는 일본인의 말이 드러내듯이 엔도 슈사쿠는 예수가 십자가를 져야만 했던 상황보다 더 어려운 상황으로 로드리고를 몰고 간다.

 

  이 소설을 읽으며 ‘고통의 문제’라는 거창한 신학적 주제에 위축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은 기독교 소설이기 이전에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질문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다. 어떤 인간은 종교에 의지하여 그 약함을 극복하기도 하지만 끝내 그 약함을 안고, 그것을 인정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작가는 고통이란 신앙의 힘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경솔하게 말하지 않는다. 신앙만 있으면 세상에서 강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결론 내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장렬히 순교하는 대신에 배교한 로드리고를 비추는 작가의 시선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다. 엔도 슈사쿠는 신부로서 혐오스러운 배교행위를 한 로드리고를 통해 치명적인 약함이 있는 자들도 현실에서 신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그와 같은 전개는 독자들, 특히 크리스천 독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신앙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던 소설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배교행위에 대해 자기합리화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로드리고의 감상으로 끝맺는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나면 “이렇게 끝나도 되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실제로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배교를 선택한 로드리고의 행동은 냉정하게 보면 신앙적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로드리고는 배교하는 순간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267쪽)라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지만, 이는 작가가 배교를 종용한 이노우에란 자의 말을 통해서 반문하듯이 자신을 속인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은 그러한 지점까지 건드리지만 로드리고의 배교가 인간을 위한 또 다른 의미의 순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다. 그것은 작가가 로드리고를 지칭하는 주어로서 기능하던 ‘신부’라는 3인칭을 ‘나’라는 1인칭으로 바꾸면서 소설을 끝맺는 방식을 상기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침묵』은 특정한 신학적 메시지에 경도되기를 포기함으로써 독자가 깨달아야 할 지점을 일일이 지시하지 않는 미덕을 지닌 작품이다. 좋은 문학작품이란 독자에게 표지판을 세워 가야할 길을 직접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해석이 가능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이라는 거대한 신학적 주제에 압도되기 쉬운 종교소설들 중에서, 이처럼 인간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으면서 치열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소설을 읽는 것은 정말 가슴 떨리는 일이다.

 

  독후감 2)

 

  밀도 있고 치열한 소설

 

  수퍼 껌정드레스 | 2014-06-22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7720211

 

  3월초에 선물받은 책인데 4월 중순에 읽고, 6월말인 지금 기록을 남긴다. 소설의 배경은 17세기 일본. 에도막부의 쇄국정책과 가톨릭탄압이 있던 시절이다. 페레이라 신부를 추적하는 이야기가 한 축, 로드리고 신부가 배교하는 과정이 또 다른 한 축이다. 두 이야기의 축은 두 인물이 만나면서 이노우에와의 대화, 배교를 거듭하는 기치지로의 절규가 등장하는 마지막 부분까지 밀도 있게 ‘침묵’을 추적해 나아간다. 설마하며 의심했던 ‘침묵’이 끝내 ‘침묵’으로 끝나는 과정을 인물 심리묘사를 통해 치열하게 그려낸다.

 

  이 소설이 종교문학으로서 갖는 의의는 모르겠다. 솔직히, 별 관심도 없다. 다만, 소설적으로 참 밀도 있고 치열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는 점에서, 주인공과 독자들의 기대를 배반하며 작가의 주제의식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난 이 소설을 읽으며 소름이 돋았다. 아래 인용부분처럼, 작가는 주인공 로드리고를 내세워 독자에게 끈질기게 묻고 또 묻는다. 마침내 신에게 따질 때까지.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들 비참한 농민들에게, 이 일본인들에게 박해와 고문이라는 시련을 주시는지요? 아니, 기치지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조금 더 다른 무서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본문 86쪽에서 인용)

 

  지금 당신에게 이렇게 보고하고 있는 일본 신도의 순교는 그와 같은 혁혁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비참하고 이렇게 쓰라린 것이었습니다. 아아, 바다에는 비가 쉴 새 없이 계속 내립니다. 그리고 바다는 그들을 죽인 다음 더욱 무서우리만치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 93쪽)

 

  이 바다의 무서운 적막함 위에서 저는 하나님의 침묵을 느꼈습니다. 비애에 빠진 인간들의 소리에 하나님이 아무런 응답도 없이 다만 말없이 침묵하고 계시는 듯한 그런 느낌을……(95쪽)

 

  당신은 언제까지나 침묵을 지키셨지만, 당신이 언제까지나 침묵하실 수는 없으실 것이다. (163쪽)

 

  이것이 순교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왜 당신은 침묵하고 있는가? (186쪽)

 

  종교문학을 떠나, 한번쯤 읽어볼만한 작품이다. 에도막부의 종교 탄압과 일본인들에게 기독교가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유를 서술한 부분도 흥미롭다.

 

  이 책은 세월호 참사 하루 전에 읽기 시작했다. 이왕 펴든 책이라, 뉴스를 순간순간 검색하면서 계속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바다와 신의 침묵…… 읽으면서 좀 힘들었다. 하지만 난 순교나 사건사고가 있을 때 신을 부르며 신의 즉각적 응답이 없다고 절망하거나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을 보면 의아하다. 인간들이 벌이고 있는 죄업을 왜 신에게 묻고 절망하는지? 걍, 신의 침묵에 절망할 시간에 약한 자들끼리 손잡고 연대하여 세상을 바꾸러 나서는 것이 옳지 않을까.

 

 

 

   엔도 슈사쿠 부부의 대화

 

  -엔도 : 그런데 수수께끼의 인물이 무슨 생각으로 후미에를 보여주었는지 지금도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스즈키 히데코 :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한데 얽혀서 『침묵』이라는 작품의 결정체가 된 것이군요. 다만 같은 후미에라도 나무로 된 것이었다면 그 인상이 달랐을지도 모르죠.

 

  -엔도 : 그래요. 종이였기 때문에 발가락의 흔적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죠. 사느냐 죽느냐의 경계에 놓인 인간의 마음이나 망설임 같은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거예요.

 

  -스즈키 히데코 : 그것을 보신 선생님도 사느냐 죽느냐의 경계에 계셨구요…….

 

  -엔도 : 옛날에는 폐 수술이 거의 그리스도인이 당하던 고문같이 고통스러웠거든요.

 

  -스즈키 히데코 :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엔도 : 손이나 발 같으면 수술하고 나서 당분간 쓰지 않을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숨을 쉬지 않고 견딜 수는 없잖아요? 방금 수술한 폐를 가지고 다음 순간부터 호흡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날마다 이렇게 피를 흘려도 괜찮은지 불안할 정도로 피가 나왔어요. 방금 수술해서 상처가 난 곳을 혹사해 가며 호흡을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스즈키 히데코 : 그러니까 마치 그리스도인이 당하던 고문 같다고 하는 것이지요.

 

  -엔도 : 네. 말 그대로 고문 같았어요. 남편은 당연히 자기 병의 고통에서 그리스도인이 당하던 고문을 연상했을 것이고, 그런 심경을 꼭 작품으로 쓰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 시점에서 후미에를 보게 된 것은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셈이죠.

 

  -스즈키 히데코 : 사람들에게 지옥의 고통을 준 후미에가 선생님께는 살아야겠다는 힘을 준 것이군요.

 

  -엔도 : 그래요. 틀림없이 살아야겠다는 힘을 주었어요.

 

  -스즈키 히데코 : 그 후미에 앞에서 손에 땀이 나도록 번민하다 죽어 간 사람들이 자기의 한을 써 달라고 보낸 메시지였을지도 모르겠군요.

 

 

출처 : 이승하 : 화가 뭉크와 함께 이후
글쓴이 : 이승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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