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그 교도의 표정이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남편이 싫어” “남편이 미워”라고 할수록 멀어지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저만치 멀어지고 멀어져서 다음 생에는 절대 만나지 않으리라 여겼을 겁니다. 대종사의 진단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연은 일종의 선 긋기입니다. A라는 사람을 생각하면 나와 A 사이에 선을 한 번 긋는 겁니다. 두 번 생각하면 두 번 긋는 겁니다. 깊이 생각하면 선도 깊게 그어집니다. 많이 생각할수록 선도 굵어집니다. A를 좋아해도 긋는 거고, A를 미워해도 긋는 겁니다. 그렇게 쌓인 선의 두께가 인연의 두께입니다. 그래서 대종사는 남편을 미워할수록 인연의 밧줄을 당기고 당겨서 더 달라붙게 된다고 한 겁니다.
저는 소태산 대종사의 해법이 흥미롭습니다. “미워하지 말고 좋아해라”가 아니라 “오직 무심으로 대하라”고 했거든요. 미워하는 마음을 뒤집어 보세요. 거기에는 접착제가 발라져 있습니다. 좋아하는 마음도 뒷면은 끈적끈적합니다. 대종사는 마음을 자유롭게 쓰긴 쓰되 접착제는 바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심이니까요. 무심과 무관심은 다릅니다. 무관심은 마음을 아예 쓰지 않는 거죠. 무심은 마음을 쓰되 자국이 남지 않는 겁니다.
원불교뿐만 아닙니다.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이 접착제를 녹이려고 애를 씁니다. 불교에선 그걸 ‘참회’라 부르고, 그리스도교에선 ‘회개’라고 합니다. 예수도 이 접착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가난한 마음이 뭘까요. 접착제가 없는 마음입니다. 그럼 왜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일까요. 이미 답이 나왔습니다. 마음에 접착제가 없을 때 하늘나라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의 접착제만 떼내려 합니다. 그건 대종사 처방전의 반쪽만 적용하는 셈입니다. 좋아하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접착제가 발라진 모든 마음은 자국을 남깁니다. 그럼 무심이 되질 않습니다.
차동엽 신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의 산상수훈을 풀면서 “가난한 마음은 무언가를 소유하려 하지 않고 그냥 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접착제 없이 좋아하고, 접착제 없이 미워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게 누리는 거라고 하더군요.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