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최진석의 노자 강의 요약

tlsdkssk 2013. 11. 11. 07:28

철학자 최진석교수의 노자강의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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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 철학과 최진석교수는 중국 북경대학교에서 장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최근 EBS 인문학 특강에서 독특한 노자 강의로 주목을 받았다.
최교수는 ‘인문적 사고’의 프레임으로 동양철학과 노자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그의 '동양철학'은 노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나 노자의 도덕경을 단순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노자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
그의 저서에는 "인간이 그리는 무늬" 가 있으, 여기서는 그의 유튜브 강의와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나의 소견도 덧붙여 본다. 그는 먼저 강력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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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자유로워졌습니까?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행복해졌습니까?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더 관용적인 사람이 되었습니까?
 여러분은 지식이 증가하고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서 가족이나 이웃들과 더 잘 지내게  
 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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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은 지금까지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바라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우리는 선뜻 후자라고 답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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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질문은 우리의 잠든 의식에서 정곡을 찌른다.
인간은 동물처럼 마구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데 이 때 인간이 그리는 무늬가 인문학이다. 이러한 인문(人文)은 '인간의 결', '인간의 동선'이라고도 표현이 된다.
(사실 산짐승도 아무 곳이나 마구 다니는 것이 아니라 늘 다니는 길로 다닌다)
인문학이나 철학은 세계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따져 보는 것이며, 그 관계 속에서 인간이 '나'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는 노자 강의 1강에서 '인문학은 통찰로 나아가는 길이다' 라고 하였다.
행복 하고 싶은 사람,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사람, 창의적인 사람,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인간이 추구하는 방향을 따라 가야 한다.
창의적이란? 인간이 추구하는 방향을 앞서 가는 것이다.
상상하기란? 인간이 추구하는 방향을 꿈꿔 보는 것이다.
여기 창의력과 상상력은 모두 힘이 필요하다.
통찰은 분석과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과 힘의 문제이다.
인문적 활동을 하려는 감각을 확보하기 위해 인문적이 되어야 하는데 우선 질문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인문적 통찰은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질문을 하려면 '우리'에서 '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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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하는 사람은 어떤 것들의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남녀의 연인관계에서도 애매한 경계를 허물고 선택을 취하면, 긴장감이 사라지고 더 이상 연애의 설레임을 만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연애뿐만 아니라 이념이나 사상, 기준에 있어서도 한쪽을 선택하지 않고 경계에 서 있어야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모호하고 불안하고 심지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경계의 모호함, 불안을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자유와 행복, 통찰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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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창의성은 낯선 것들을 견디어 내는 용기에서 나온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과 이념, 신념은 기준이 되는데, 그 기준은 억지로 만들어진 개념적 구조일 뿐이다. 그 기준이 행사되는 한 사회는 나 또는 너로 구분될 것이다.

진실로 사랑하는 여인은 키스를 할 때 눈을 질끈 감는다고 한다.

서로 보지 않음으로서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다.

눈으로 본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분하고 구별하는 것이다.

그는 특정한 신념과 이념을 가지고 있다면 인문적 통찰이 어렵다고 한다.

기준을 가졌다는 것은 구분을 하겠다는 것이다.
구분된 다음에는 한쪽을 배제할 것이다. 배제한 다음에는 한쪽을 억압할 것이다.
이렇게 어떤 체계를 숭배하는 이상 우리는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고 기준을 갖는 한, 한 쪽에 설 수 밖에 없다.


인문적 활동을 한다는 것은 머리에 이고 있는 지식과 믿음, 이념이나 관념들을 모두 내려놓고 그것을 밟고 우뚝 서는 것이다.
인문적 창의성은 용기와 관련되어 있는데, 경계에서 오는 두려움, 모호함, 불안을 견디는 것이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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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교수는 1999년 미국 타임지에 실린 헤드라인 기사를 인용한다.
It's True. Asians can't Think
진짜다. 아시아 사람들은 생각할 줄 모른다. -TIME 1999,5-
It is ingrained in the Asian psyche that correct answers always exist
and are to be found in books or from authorities.
동양인들의 마음에는 맞는 정답이 언제나 존재하고, 이것은 책이나 권위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세계와 관계할 때, 즉 생존을 펼쳐 나갈 때,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대답을 찾는 것이 아니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즉 문제 해결의 능력은 다른 곳(지식, 성인의 가르침)에서 오므로 그것을 정답으로 보고 그 곳에서 찾으려고만 한다면, 영원히 二流로 살 수 밖에 없다.

사실 현대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품과 발명품은 서양으로부터 왔다.
전기, 엔진,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전화와 스마트폰 등이 서양의 발명품이고, 근래 동양에서 먼저 발명한 물품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타임지 기사가 허무맹랑한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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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현대 기업에서 인문학 붐이 이는 이유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사람의 생각이 바뀌면, 생활패턴이 바뀌고 즉 인문(人文)이 바뀌고 새로운 수요가 생긴다. 이러한 인간이 그리는 무늬(人文)를 제일 먼저 수용하는 것은 기업이다.
상인(기업인)들은 자기의 의사 결정이 사업의 승패를 좌우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예민한 감각이 있다.
그들은 生과 死의 경계(境界)에 있기 때문에 고도의 예민함을 유지하므로 감각이 살아 있다.
생과 사의 경계에 있지 않은 사람은 예민함이 둔화된다.
그러나 기업 CEO들은 의사 결정이 빠르다.
모든 사태에 대해 감각적으로 대처한다.
어떤 사태에 대해 아는 능력을 통찰이라고 한다.
통찰(通察)은 지식, 강함, 욕망, 모호함, 두려움과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 '인문적 통찰'이라고 한다.
상인들은 항상 경계(기로岐路)에 있기 때문에 인문적 통찰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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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流로 산다는 것은 종속적인 삶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려면 생각을 해야 하고,
생각을 하려면 생각을 할 수 있는 주체적인 힘이 있어야 된다.
그들에게는 왜 주체적인 힘이 있는가?
그들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 않고 항상 양면의 경계에 있기 때문이다.
경계와 경계의 부단한 중첩(重疊), 이것이 흐름이다.
이런 경계에 자기를 맡긴다는 것은, 어떠한 신념이나 이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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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은 변하지 않아도 월급이 100% 나오고, 교수는 행동하지 않고 말만 해도 월급이 나온다고 한다. 심지어 정치인은 틀린 이야기를 해도 월급이 정상적으로 나온다.
그러나 기업은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행동하지 않으면 곧바로 도태되고 망하기 때문에 생존차원에서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양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도 이와 같은 말을 했는데, 가장 먼저 변하는 곳이 기업이고 나중에 변하는 곳이 공공부문과 공직자이며, 제일 마지막에 바뀌는 곳이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와 사법제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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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에게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학문적 활동의 결과물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정신을 고귀하고 완전하게 해 주는 학문이며, 인간에게 가치있는 유일한 연구이다”
  - 키케로(고대 로마의 문인, 철학자, 정치가, 최초로 인문학을 언급한 인물)-

인문학의 중심은 신神이 아닌 인간人間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인간성을 완벽하게 발휘하며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연구이다.
“인문주의, 인본주의 이런 말들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앨렌 벌록(영국의 역사가)-
앨렌 벌록은 '인문학은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 내릴 수 없다고 한다.
인문학은 어떤 내용으로 어떤 방법으로 특정(特定)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변變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왜 인간이 변하고 달라지는가? 인간을 둘러싼 세계가 변하고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계가 달라지기 때문에 인간이 해결해야 될 내용과 방법이 달라진다.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 존재의 지평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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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교수는 문학, 사학, 철학을 대표적인 인문학으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문학(文學)은 언어의 수사적 기법을 사용하고 감동을 자극하는 형식으로 인간이 그리는 무늬(동선)을 알게 해주려는 지적활동이다.   
사학(史學)은 사건의 시간적 계기를 재료로 삼아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알게 해주려는 지적활동이다.   
철학(哲學)은 명증(明證)한 범주와 개념로 세계를 포착하여 그것들의 관계 및 변화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인간이 그리는 동선(무늬)를 알게 해주려는 지적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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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교수는 그 시대마다 중심역할을 하는 학문이 다른데, 각각 단계가 있다고 한다.
초기사회일수록 후진국일수록 법학과 정치학이 주도적 역할을 하며, 산업화가 된 나라에서는 경제와 경영, 신문방송학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선진국으로 갈수록 인문학인 철학과 심리학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고 한다. 또 중국이나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를 꿈꾸는 국가에서는 고고학과 인류학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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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이나 이념이 ‘기준’이 된다.
그 기준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개념적 구조일 뿐이다.
‘너’를 가두고 있던 ‘우리’에서 탈출하라.
‘우리’는 나를 가두는‘울타리’일 뿐이다.
결국 너 자신으로 돌아가라. 거기에 행복과 자유의 통찰이 있다.
기준과 신념, 이념을 이탈하여 오직 너의 자발성으로 돌아가서, 자발성으로 속에서 삶을 향유하라.
이런 자발적 개인들이 모인 사회가 강하다.
이런 자발적 개인들이 모인 국가가 부강해 진다고 노자가 말하였다.


것은 2,500년 전 장자의 가르침이기도하며, 장자 이전에‘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돌아가라고 한 노자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노자의 무위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준에도 제어받지 않는 개인의 자발적 발휘를 말한다.

개별적 존재들이 '보편이라는 모자를 쓴 특정이념의 지배'를 벗어나 오로지 각자의 자발적 생명력에만 의지하여 약동하는 상태를 노자는 '무위'하고 표현하였다. 개인이 제 멋대로 하는 것이 주가 되면, 특정한 기준을 강요하는 지도자는 의미가 희박해지는데, 노자가 "최고수준의 통치단계는 통치자가 있다는 것만 겨우 알고 통치자를 부담으로 느끼지 않는 단계"라고 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도덕경 37장 "멋대로 하라. 그러면 안 되는 일 없다"라는 노자의 가르침은 현대인을 위한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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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노자 강의를 요약하고 보면, 서양의 철학자들이 주장한 내용과 통하는 면이 있다.
니체는 기존의 가치를 허물고 창의적으로 탄생하는 인간을 어린아이형 인간으로 규정했다. 즉, 인간의 정신변화는 먼저 전통의 가치를 존중하고 인내하는 낙타형 인간에서, 기존의 가치를 허물고 강탈하는 사자형 인간으로 진화하고, 변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어린아이형 인간으로 변신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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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싸르트르에게 인간은 아이-> 학생 ->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자기의 본질을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설계도 대로 산다면 인간이 아니라 사물에 불과하다.
반대로 끊임없이 스스로 설계도를 새로 그리면서 산다면 인간인 것이다. 자신의 본질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자기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인간이 싸르트르가 지향하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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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는 노장사상과 함께 이와 쌍벽을 이룬 공맹사상(공자와 맹자)이 또 있다.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맹자(孟子)는 사람의 본성은 선(善)하다는 성선설[性善說] 주장하였고 그 증거로 사람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사단(四端))을 제시했다.
맹자도 인간 본래의 선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수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후 1,400년이 지난 후 송대(宋代)의 철학자 정이천(程伊川)은 혼탁한 '기(氣)'로 더럽혀지지 않은 '성(性:본연의 성)'이야말로 천리(天理)라고 주장하는 성즉리(性卽理)를 주창하였다.
주자는(朱子)는 이를 주자학의 근본 명제(命題)로 그대로 계승하였고, 그는 성(性)과 정(情)을 구별한 연후에 그 성을 함양하기 위해 엄격한 도덕적·학문적 수양을 요구하였다.
주자학의 이런 학풍을 퇴계와 율곡 등 조선의 선비들이 계승하여 학문적으로 심화시켰고, 현실에서 행동하는 철학으로 엄격히 실천하였다. 이는 학문적 수양을 통해 인간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수행과정이었다.
결국 현대 철학이나 근대 서양철학, 중국이나 조선의 선비들의 가르침은 일맥 상통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정신세계는 중첩되거나 일치하지 않나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