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스크랩] 법정스님이 함석헌 선생님께 드리는 추모의 글
tlsdkssk
2012. 8. 16. 05:49
[1989년 4월호 '씨알의 소리'] 법정스님이 함석헌 선생님께 드린 추모 글
"사람 목숨 허무해라 물거품일세
80년 한 평생이 봄날의 꿈이어라.
인연 다해 이 몸뚱이 버리는 이 날
한덩이 붉은 해가 서산으로 진다."
고려말 태고화상(太古和尙)의 임종의 노래다.
다른 사람들로는 몇생을 산다 할지라도
그 만큼 살 수 없는 알차고 빛난 생을 누렸으면서도
한 평생이 봄날의 꿈 같다고 하니,
생명의 덧없음이 우리에게까지 다가서는 것 같다.
사람은 가고 기억만 남는가?
함 선생님께서 어느덧 고인이 되셔서 그 기억을 더듬으려고 하니,
새삼스레 삶의 허무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도 언젠가는 자기 삶의 그림자를 이끌고
태초 생명의 그 바다로 돌아 갈 것이지만,
함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종로에 있던 사상계사(思想界社)에서였다.
사장인 장준하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가,
때마침 나보다 한 걸음 늦게
사무실로 들어오시는 함 선생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 때가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던
6. 3사태가 있던 그 해 봄이었다.
그 날 동국대학교에 가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하셨는데 꼬장꼬장한 모습이었다.
그 무렵 나는 해인사 퇴설당선원에서 정진하던 때였다.
두 번째는 함 선생님께서 미 국무성 초청으로 도미하기 직전,
<뜻으로 본 韓國歷史> 를 다시 손질하기 위해
해인사의 한 암자(金仙庵)에 들어와 계실 때였다.
이 무렵에는 자주 뵙고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한 번은 해인사 큰방인 궁현당(窮玄堂)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전 대중이 말씀을 듣게 된 자리를 갖기도 했었다.
주제는 한국의 종교가 나아갈 길에 대해서였는데,
그 어떤 종파를 가릴 것 없이 매서운 채찍질을 해주었다.
젊은 스님들한테는 적잖은 일깨움이 되어 주었었다.
70년대에 들어서 서울 봉은사 다래헌(茶萊軒) 시절,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와 '씨알의 소리' 일로
거의 주일마다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었다.
그 때 '씨알의 소리' 편집회의는 주로 면목동(중곡동?)
전세방에서 살던 장준하 선생님댁과 신촌의 김동길 박사댁과
내 거처인 봉은사 다래헌으로 옮겨 다니면서 열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정보기관에서 뒤따라 다녔기 때문에
편집위원들의 신경은 자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봉은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날의 모임에 누구누구가 참석했다고
담당 형사가 전화로 상부에 보고 중인 장면을 목격한 나는,
홧김에 그 전화기를 빼앗아
그의 면전에서 돌에 박살을 내버렸었다.
그 때의 우리들은 피차가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이런 모임이 아니고도
함 선생님께서는 이따금 우리 다래헌에 들르셨다.
차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샘물을 길어다 차를 달여 마시면서
마하트마 간디며 칼릴 지브란이며
노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미국에 가셨을 때인데,
함 선생님을 태우고 가던 택시 운전사가
함 선생님 얼굴을 빤히 보더니
칼릴 지브란을 닮았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함선생님께서
<예언자> 를 한국어로 번역했다고 했더니
아주 반기면서 정식으로 악수를 청하더라고 하셨다.
함 선생님께서 주관하시는
퀘이커모임을 우리 다래헌에서 연 적도 있었다.
나도 그 때 한 곁에 앉아 참석하면서
번다한 종교적인 의식이 없고,
마치 참선과 같은 퀘이커 모임을 처음 알게 되었었다.
그 무렵 함 선생님은 노인답지 않게
아름다움 앞에 천진스런 면모를 자주 드러내셨다.
뜰에 피어 있는 꽃을 보면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눈 여겨 살피면서
꽃에 대한 해박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원효로 집에 그 손바닥만한 뜰과 온실에 여러 가지 화초를
손수 가꾸셨던 걸 보아도
꽃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알 수 있다.
한번은 꽃삽과 호미를 가지고 와서 다래헌 곁에
무성하게 자라오르는 머위를 옮겨 가기도 하셨다.
머위 이파리의 쌉쌉한 그 맛을 좋아하셨다.
초파일 때 만든 연꽃등을 우리 방에 달아두었는데,
한번은 그걸 유심히 쳐다보시면서
'거 참 곱다, 거 참 잘 만들었다' 는 말씀을 연거퍼 하셨다.
가시는 길에 떼어서 드렸더니 어린애처럼 아주 좋아라 하셨다.
1975년 가을 내가 거처를 조계산 불일암으로 옮겨오게 되자,
내 산거(山居)에 한 번 오시고 싶다는 서신을 보내왔었다.
오셔서 쉬어가시라는 회신을 이내 보내드렸더니,
15~16인 되는 장자모임 회원들과 함께 오시게 되었다.
회원들은 아랫절(송광사)에 묵도록하고
함 선생님은 나랑 같이
우리 불일암에 올라와 하룻밤 주무시게 되었다.
그 때 많은 말씀 중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도 젊다면 산 속에 들어와 중이나 되었으면 좋겠소."
그 때 어떤 심경에서 하신 말씀인지는 몰라도
아주 침통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그 무렵 안팎으로 몹시 지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도 중이나 되었으면.........' 하시던
그 때의 그 말씀이 함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한동안 그림자처럼 뒤따르곤했다.
그리고 나는 이 때 함 선생님께
두고 두고 죄송한 마음의 빚을 지게 되었다.
다 알다시피 함 선생님은 하루 한끼밖에 안 자셨다.
그것도 저녁을............
그 때는 내가 불일암으로 옮겨온 지 얼마 안 되어,
양식은 있었지만
20명 가까운 사람들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그릇과 수저가 절에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는 더욱 그랬다.
함께 온 회원들에게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밥 대신 감자를 삶아 먹으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다들 좋다고 해서 감자를 한솥 삶았었다.
젊은 사람들은 별식이라 좋았겠지만,
하루 한끼 밖에 안 드시는 노인이
감자로 끼니를 대신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일이었다.
겨우 두 갠가 드시고는 더 안 드셨다.
이 때 일이 두고두고 나를 후회하게 했다.
따로 밥을 지어드려야 했었는데,
융통성이 없이 꼭 막힌 나는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한가지, 나는 함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예를 드리지 못한 허물을 지었다.
그 때가 안거중인데다
영결식날 하필 절에서 예정된 행사가 있어,
인편에만 조문을 대신케 하고 참석치 못하고 말았다.
고인과 유가족께 죄송하고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함석헌 선생님과 같은 큰 어른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었던
인연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한 개인의 삶이란 그 자신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계된 세계를 통해서 거듭거듭 형성된다.
이런 사실을 상기할 때,
함 선생님을 어렵고 험난한 우리시대의 큰 스승으로
우리들 가슴 속에서 오래오래 삶을 함께 하리라 믿는다.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가장 행복한 공부' 無量光明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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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가장 행복한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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