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짱이
올해 우리나라는 1월에 강추위가 찾아왔고, 8월 강수량은 1048㎜로 1908년 기상관측 이래 가장 많았다. 8월 강수일도 18.7일로 이틀에 한번 이상 비가 내린 셈이다. 그래서 열대야가 거의 없는 여름을 보냈지만 예상 못한 9월 늦더위로 전국이 정전사태로 큰 혼란과 피해를 겪었다.
이런 변화무쌍함 가운데 벌써 가을 한가운데에 와 있다. 곤충들은 가을이 온다는 소식을 소리로 알려준다. 가을의 전령사 베짱이, 방울벌레, 여치, 귀뚜라미, 쌕새기 등 풀벌레들이 내는 소리는 선선하고 깨끗한 가을 공기 매질을 타고 잘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을에 활동하는 곤충들은 우는 소리를 흉내내 이름이 붙인 경우가 많다.
이 중 베짱이 이름은 `쓰윽-쌕, 쓰윽-쌕' 우는 소리가 마치 베를 짜는 소리와 비슷해 유래되었다고 한다. 가난한 시절 우리 여인들은 의복을 해결하기 위해, 낮에 밭일과 길쌈을 하느라 지쳐 졸려도 밤에 틈틈이 베틀에 앉아서 열심히 북을 움직여 베를 짜 삼베옷을 만들어 입었다. 베는 우리 민족의 부지런함과 정성스런 삶이 묻어 있는 옷의 재료이다.
그런데 이런 이름 유래를 가진 베짱이가 오늘날 내일을 준비 안하고 놀기만 좋아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억울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는 베짱이의 행동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근거했다기보다 어릴 때 읽었던 이솝우화 `개미와 베짱이'에서 묘사된 베짱이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동화에서 베짱이는 다가오는 추운 겨울을 대비해 식량을 준비하지 않고 여름 내내 나무그늘 아래서 놀면서 노래만 한다. 반대로 개미는 겨울을 편안하게 보내기 위해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부지런히 일을 하는 곤충으로 표현됐다. 이런 이미지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저축 장려를 위한 포스터나 우표 주인공으로 개미가 자주 등장했다.
실제로 개미 집단 가운데 훨씬 많은 개체가 일을 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노는 개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역할이 있는지 몰라도 각자 역할이 분업화된 사회생활을 하기 때문에 놀아도 다른 개미들이 일한 덕에 살아갈 수 있다. 그렇지만 독립생활을 하는 베짱이는 생존과 개체 번식을 위해 천적, 먹이, 번식 등 모든 문제를 혼자서 해결해야 해 더 힘든 생활사를 겪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베짱이는 실베짱이에 속하는 8종을 포함해 모두 9종이 알려져 있다. 베짱이의 발목마디를 위에서 봤을 때 첫째 발목마디 양 옆으로 홈이 없고, 가슴 아래 면에는 가시 같은 돌기도 없는 것이 여치와 차이다. 여치는 앞날개나 뒷날개 길이가 비슷하지만 베짱이는 뒷날개가 앞날개보다 길다.
성충들은 주로 8~9월에 평지 풀밭이나 숲 가장자리 덤불에서 단독 생활을 하면서 풀잎이나 나뭇잎을 먹지만 어떤 종은 다른 곤충들을 잡아먹는 육식생활을 하기도 한다. 알 상태로 추운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다시 알에서 깨어나 유충 및 성충 단계를 겪는다. 짝짓기 시기가 되면 대부분 수컷이 소리로 자기 짝을 유인하면 암컷이 자신의 종과 짝을 소리로 판단하고 찾아온다.
소리를 내는 메뚜기류는 날개와 다리를 비벼서 소리를 내지만 베짱이나 여치들은 앞날개 2개를 서로 비벼서 소리를 낸다. 앞날개 기부에 소리를 내는 울음판이 있기 때문이다. 청각기관은 앞다리 종아리마디 밑 부분에 있다. 짝짓기를 마친 암컷은 산란관을 나뭇잎이나 나무줄기 속에 깊이 넣어 알을 낳는다. 다음 세대 생명 전달의 임무를 수행한 성충들은 죽음을 맞이하며, 개미나 다른 육식성 동물의 먹이가 되거나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생태계 에너지 순환에 기여한다. 우리가 가을정취를 만끽하면서 정겹게 듣는 베짱이 소리는 사실 지구상에 자신의 개체 유전자를 지속적으로 퍼뜨리기 위한 생존의 처절한 절규일지도 모른다.
국립중앙과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