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스크랩] 가네코의 부활(월간중앙 이상국 기자)

tlsdkssk 2011. 8. 15. 12:21

발굴특종 | 국치 100년의 기억-문경 ‘독립지사 박열기념관’ 첫 내부 취재
일제강점기 日王 암살 시도한 일본 여인
이상국 월간중앙 전문기자 [isomis1@joongang.co.kr]
“가네코 후미코 여사의 묘소가 어디에 있습니까?”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는 요즘 약도를 그린 종이를 내밀며 이렇게 묻는 일본인이 부쩍 늘었다. 그들은 한 여인에게 참배하기 위해 일본에서 이곳으로 왔다. 그렇다고 그녀와 연고가 있거나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가네코 후미코(1903~1926)는 1924년 일왕 폭살(爆殺)을 모의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로 감형되자 옥중에서 자살한 일본 여인이다. 그리고 그녀는 문경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의 첫 부인이기도 하다.

루바시카(러시아의 남자 겉옷)를 입은 박열과 그의 부인 가네코.

박열과 옥중 혼인… 문경 가네코 墓所와 기념공원에 일본인 참배 붐

日本, 대역죄인이 그립다?
한국의 정서로 보자면 식민지 시절에 그녀가 한 행위가 영웅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일본인들이 왜 자국의 왕을 죽이려 했던 대역사건의 범인 무덤 앞에 절하려고 먼 길을 달려왔을까?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도 있다. 제국주의 시절 가해국의 후예로서 양심이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질곡의 시대를 전투적으로 살았던 비극적인 여인에 대한 단순한 관심일까?

마침 올해는 일제에 의해 국권을 침탈당한 경술국치(1910.8.29) 100년이 되는 해다. 한·일 관계가 이제 얼룩진 100년의 시간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미래 100년을 설계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나고 있는 때에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상적인 문화코드라 할 만한 ‘가네코 후미코 신드롬’을 되새겨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가네코의 묘소는 박열기념관 오른쪽 기슭에 있다. 완공을 앞두고 있는 박열기념관의 내부를 처음으로 취재해 공개한다. 기념관에는 박열과 가네코의 사랑, 투쟁의 다양한 흔적이 마치 현재형처럼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우선 가네코 후미코의 유해가 문경에 오게 된 상황부터 살펴보자. 1926년 7월 23일 옥중 사망한 그녀는 도치기현 시모쓰가군 이에나가촌 갓센바에 있는 형무소 공동묘지에 묻혔다. 투쟁 동지들은 유골을 발굴해 수송작전을 펼친다. 후미코의 어머니가 옥중 혼인으로 시댁이 된 문경에 딸이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박열의 형 박정식과 형의 장남 박형래가 그녀의 뼈를 인수해 그 해 11월 5일 박열의 선산이 있는 문경시 문경읍 팔령리에 묻었다. 1973년 그녀의 사망 47년 기일(忌日)에 묘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2000년 박열의사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옮겨 오기 전 문경읍 팔령리의 가네코 묘지.
2003년 11월 팔령에 있던 가네코 후미코의 유해를 다시 박열 생가 뒤편 자리(현 위치)로 이장했다. 유해를 인수할때 참관했던 문경의 향토역사학자에 따르면 팔령의 묘소에는 유골함이 없었으며 뼛가루도 거의 구분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이후 파헤쳐졌을 가능성도 있고,또 처음부터 유골함 없이 그대로 묻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할 수 없이 묘지 속 진토(塵土)를 정성껏 걷어와 묘소를 조성했다고 귀띔했다.

현재 일본에는 ‘가네코 코스’가 유행하고 있다. 가네코가 복역한 이치가야형무소와 우쓰노미야형무소, 그녀의 출생지인 요코하마, 그녀가 살았던 야마나시현의 다바야마촌, 외가가 있는 소마구치, 그녀가 다녔던 영어학원 자리인 세이소쿠고등학교, 박열과 동거할 무렵의 이와사키 오뎅가게와 흑도회를 만들고 잡지를 출간하던 때의 도쿄 셋방들, 가네코가 한국에 들어와 7년간 살았던 충북 부강(청원군)과 그녀의 무덤이 있으며 박열의 고향이기도 한 경북 문경이 일본인들의 참배 장소다.

이상국 월간중앙 전문기자 [isomis1@joongang.co.kr]

박열의사기념관 전시관 1층 벽에 전시된 가네코 후미코 소개 글과 사진.

9월 2일 오후 3시 경북 문경시. 태풍 ‘곤파스’가 막 빠져나간 한반도는 아직도 찔끔거리는 여우비 속에서 청명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거의 완공 단계에 있는 박열의사기념관 한쪽에 자리 잡은 가네코 후미코 묘소 앞에는 인상적인 검은 리본을 매단 흰 국화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이 태풍 속에서도 일본인들이 가네코를 참배하러 찾아왔다가 놓고 갔다고 한다. 박열기념사업을 이끌고 있는 박성진(49) 예문관 대표는 “현재 가네코의 고향 마을인 야마나시현의 단체장이 문경시와 자매결연을 맺자고 러브콜을 보내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사람들이 왜 일왕 암살을 시도한 여인을 이토록 추모하느냐는 질문에 “그녀를 국가 중심의 가치 잣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비극과 에너지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문화코드로 읽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고 설명했다. “이 땅을 병탄한 가해국가의 국민이긴 하지만 당시 조선에 대해 긍정적인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었던 용기 있는 여인에 대한 자부심의 표출”이 아닐까 하는 의견도 덧붙였다.

문경시와 기념사업회는 일본의 이런 열풍을 포착했다. 한때 ‘아나키스트’로서 엇갈리는 평가도 없지 않았던 박열의 기념관을 만들고 가네코의 묘소를 정비한 것에는, 그의 역사적 업적을 분명히 하는 뜻 외에 일본 관광객들을 유치하려는 의욕도 숨어 있다. 아직 완공되지도 않은 기념관과 묘소에 일본인들의 행렬이 꾸준히 이어지자 기념사업회 측은 고무된 상태다. 일본의 가네코 순례지와 함께 연결해 답사 코스로 운영하면 각광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한다. 이 같은 지자체의 움직임은 한국과 일본이 공유한 보기 드문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관광산업으로 연결하는 의미 있는 사례기도 하다.

전시관 벽엔 박열·가네코 열애와 투쟁이 스토리텔링으로 펼쳐져


2 미리 들여다본 박열의사기념관
박열의사기념관은 2004년 10월 16일 기공식을 가졌다. 경상북도 기념물 148호인 박열 생가가 있는 문경 마성면 마천리 98번지 일대 4403평의 부지에 기념관과 사당(박열 의사 영정을 모실 예정)을 조성하고 있다.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로 연면적은 4000㎡ 규모다. 건물은 현재 거의 완공되었으나 전시실과 사당 등 내부 콘텐츠는 아직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원래 올해 10월 20일이 목표 완공일이었으나 늦어질 전망이다. 우선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길도 조성되어 있지 않아 입구를 찾는 데 애를 먹었다. 주차장 옆에는 바로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가 있어 거기부터 들렀다. 아직 전시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관리담당자들이 난색을 표했지만 내부 분위기만 보고 싶다고 요청해 입장이 허용되었다.

전시실 전체 벽면은 관람객의 동선을 고려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1층은 후미코 가네코를 위한 전시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녀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 후미코의 시 ‘어머니를 만나는 단가’ ‘박열을 그리는 단가’ ‘옥중 단가’가 전시되어 있었고, 그녀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소개되어 있었다. 출생과 무적자(無籍者) 성장, 조선 생활, 박열과 만남, 옥중 결혼, 사형 판결과 무기(無期) 감형 등이 사진과 함께 설명된다. 이곳 전시실의 특징은 인물과 행위의 ‘의미’와 ‘가치’를 돋을새김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가네코 후미코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재평가’ 등이 그런 전시물이다.

후미코와 마주 보고 있는 벽에 박열의 스토리가 펼쳐져 있다. 두 사람이 서로 응시하는 구조인지라 인상적이다. ‘박열의 생애’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고 <박열어록>이 보인다. 이곳에는 또 박열과 후미코를 변론해 ‘일본제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후세 다쓰지 변호사에 대한 얘기도 부각시키고 있어 눈길을 끈다. 박열의 호적부 사본도 보인다. 전시관 준비 담당자는 “아직 전시물이 채워지지 않았다”면서 “각종 유물과 자료를 들여와 벽 아래 전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층 전시실로 이동하는 계단 벽에는 박열과 후미코에 관한 기사를 실은 한국과 일본의 신문을 이용해 띠처럼 구성해놓아 올라가면서도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해놓았다. 2층에는 기념관 자료 기증자 명단과 기념사업회 임원 및 개인성금, 도움을 준 기관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혀두었다. 자료와 예산이 절실한 전시관의 ‘갈증’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곳에는 주로 광복 이후 박열의 행적을 밝혀놓았다.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고 재일거류민단을 창단하던 무렵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고, 납북 후 북한에서의 활동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 전시실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한국과 일본의 박열·가네코 유적을 ‘답사’하기 좋도록 설명해놓은 것이다. 또 일본 형무소 체험실도 인상적이다. 아직 체험 시설이 다 갖춰지지는 않았다.

사당은 아직 시설이 미비해 들어가보지 못했다. 박열의사기념관의 특징은 민족정신이나 독립투쟁을 강조하는 교과서적 느낌보다 한 사람의 파란만장한 삶을 되새기면서 역사와 인생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는 ‘스토리텔링’이 세심한 방식으로 펼쳐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박열의사기념관이지만 가네코 후미코 기념관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그녀에 대해서도 자세하고 성실하게 다뤘다. 이곳을 방문하면 후미코를 먼저 만나서 그녀를 통해 ‘박열’을 느끼고 바라본 다음, 박열 의사를 만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 같다. 제국주의 사회의 밑바닥에서 고통을 받으며 성장한 일본 여인이 마침내 만난 고결한 인격자이자 진지한 투쟁가 박열은 다른 모든 평가를 제쳐놓더라도 어떤 영화나 드라마도 넘지 못할 풍부한 ‘삶의 함의’를 지닌 인물이라는 것을 이 전시관을 통해 새삼 발견하게 된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청주에서 7년 생활… 박열의 詩에 반해 사랑


<흑도>. 1922년 7월 10일자 창간호.
3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삶과 기억들
가네코 후미코는 1900년 요코하마시에서 사에키 분이지와 가네코 기쿠노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어머니를 혐오하여 호적에 올리지 않아 무적자(無籍者)가 되었다. 아버지는 아내 기쿠노의 동생(후미코의 이모)과 결혼하고,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동거에 들어가는 상황 속에서 후미코는 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철저히 버림받은 아이로 성장했다. 가정폭력과 굶주림을 겪다가 외가(기쿠노의 친정)인 야마나시현에서 살게 됐다.

이후 1912년 아버지의 누이인 가메(후미코의 고모)가 시집간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의 이와시타가에 맡겨졌다. 그때 그녀는 외할아버지 가네코 도미타로의 다섯째 딸로 입적해서(가네코라는 성을 받았다)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녀는 부강공립심상소학교 4학년에 입학했다. 공부를 상당히 잘해서 성적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곳의 할머니는 후미코가 천박하다는 이유로 학대했다. 굶주림과 폭력을 못 견딘 후미코는 죽음을 생각했다.

둑 아래 쭈그리고 앉아 열두 시 반 급행열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던 열차는 이미 통과한 뒤였다. 후미코는 금강의 강변 중에서 여울이 급한 곳으로 갔다. 붉은 모슬린으로 만든 속치마에 돌을 싸서는 허리띠처럼 동여맸다. 그러고는 강물을 들여다봤다. 현기증이 일면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아직 사랑할 만한 것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할머니나 고모만이 나의 세계인 것은 아니다. 내가 죽고 나면 할머니나 고모는 나를 더욱 왜곡하여 욕할 것이다. 그럴 때 변명도 못하는 건 억울하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털고 일어서서 집으로 왔다.

그녀는 결국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1919년 4월에 한국에서 쫓겨나 일본 야마나시에 있는 외가로 갔다. 7년 간의 한국 생활은 그녀에게 지긋지긋한 기억으로 남았다. 외가에 온 이듬해 그녀는 가출해 도쿄로 갔다. 그때부터 신문 배달, 가루비누 장사, 가정부, 인쇄소 공원 일을 하며 고학했다. 박열과 만나게 되는 것은 1922년 2월경이었다. 그녀가 고지마치구에 있는 이와사키 오뎅집에서 종업원으로 일할 때였다. 후미코가 이 조선인 남자에게 매료된 것은 그의 시 ‘개새끼’(당시 일본 유학생들이 발간한 <조선청년>에 실림. 1934년 김기진이 발행한 <조선청년>과는 다른 잡지)를 읽고 나서였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후미코는 나중에 자서전과 재판정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뭔가 강한 힘을 느낄 수 있는 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나의 마음을 강하게 묶었다. 그 시를 다 읽었을 때 나는 정말 황홀할 정도였다. 내 가슴의 피가 뛰었다. 어떤 강렬한 감동이 나의 전 생명을 고양하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것을 이 시에서 발견한 기분이었다. 시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반역 기분이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시를 읽고 후미코는 박열에게 대시했고 두 사람은 1922년 늦봄 도쿄에 있는 신발가게 2층의 다다미방을 얻어 동거에 들어갔다. 동거에 즈음해 두 사람은 세 가지 약속을 했다.


감옥에서 유출된 박열·가네코의 ‘괴사진’. 대역죄인을 우대한다는 논란을 빚은 사진이다
- 동지로서 함께 살 것
- 내가 여성이라는 관념을 반드시 없앨 것
- 둘 중 하나가 사상적으로 타락해 권력자와 악수하는 일이 생길 경우에는 즉시 공동생활을 그만둘 것(주의(主義)를 위한 운동에 상호협력한다)

후미코는 ‘박열을 그리워하며’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웃을 틈도 없이
또다시 떠오르는 B의 모습
나는 열아홉 그는 스물하나
둘이 함께 살다니 조숙했다 할 수밖에
집을 나와 그를 만나
밤 늦도록 길을 걸은 적도 있었지
너무도 뜻이 높아
동지들에게마저 오해를 산 니힐리스트 B
적이든 우리편이든 웃을 테면 웃어라
xxxx(일제 검열에 지워짐)
기꺼이 사랑에 죽으리


이후 두 사람은 잡지 <흑도(黑濤)>와 <뻔뻔스런 조선인(후토이센징)>을 발행했다. <뻔뻔스런 조선인>은 광고주들이 이름 때문에 광고를 싣는 것을 꺼렸기에 다음해부터는 <신사회>로 바뀌었다. 이때 두 사람은 주거지를 도요타마군의 도미카야 1474번지로 옮겼다. 이곳을 불령사(不逞社·박열이 조직한 모임, 불령선인(不逞鮮人:수상쩍은 조선인)의 모임이란 의미) 모임의 장소로 썼다.

이 모임은 박열이 자신의 무정부주의를 일반 사람들에게 전파하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만든 조직이다. 이 무렵 박열은 중국에서 폭탄을 들여와 일제에 충격을 주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왕세자 결혼식이나 메이데이를 이용해 일제의 요인을 암살하는 방법에 대해 동지들과 논의했다.

1926년 대심원 공판 때의 박열과 가네코. 두 사람은 한복을 입고 있다.

간토(關東)대지진이 일어난 것은 1923년 9월 1일이었다. 재앙을 틈타 조선인이 방화와 살인을 저지른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유포되었고, 일제 경찰과 지방 관헌은 조선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도쿄에서 1798명을 비롯해 전체 6618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민심의 동요를 활용해 ‘불령선인’을 척결하려는 일제의 정치적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진이 나던 9월 1일 도미카야에 있는 박열과 가네코의 셋집은 무너지지도 불에 타지도 않았다.

그들은 없는 쌀을 몽땅 털어 밥을 끓여 먹고 있었다. 후미코는 그날의 풍경을 옥중편지에서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둑 아래 임신한 여인이 현악기를 타고 있었지요. 넓은 초원 저쪽엔 벼가 진홍빛으로 빛나고 있었죠. 달이 저녁놀의 태양처럼 둥실 떠오르고, 무섭도록 아름다운 황혼이었습니다.” 이틀 뒤 박열은 숲 속에 동지들과 있다가 체포됐다. 가택 수색을 받았으며 ‘불령선인사’ 표찰과 <뻔뻔스런 조선인>, 선전 전단, 조선인 명부를 빼앗겼다. 후미코가 집에 있었는데 경찰은 그녀도 함께 잡아갔다.

일본 경찰은 이날 박열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압수물품으로 사건이 폭로되자 그는 후미코를 보호하려고 차고 있던 칼을 꺼내서 할복 흉내를 내며 광태를 연출했다.”
두 사람은 불령사 동인(16명)에 포함되어 치안경찰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는데, 이듬해 1월 후미코가 예심신문에서 “왕족과 정치실권자에게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자신과 박열이 논의했으며 폭탄 입수 의뢰를 했다”는 그야말로 폭탄 발언을 함으로써 사건이 커졌다. 박열도 이렇게 말했다. “가네코가 그렇게 말했다면 나도 그 대상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일본의 왕과 왕세자를 가장 중요한 폭탄 투척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폭탄을 손에 넣고 난 다음 좋은 기회가 온다면 언제라도 그것을 사용할 것이고 이전에 진술했던 것이다.” 후미코는 이 점에 대해 쐐기를 박듯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과거에 대역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마땅한 사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현재도 여전히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그들이 투옥되어 있을 무렵 ‘괴사진(怪寫眞) 사건’이 일어났다. 박열과 후미코가 옥중에서 찍은 사진 하나가 유출되었다. 두 사람이 소파에서 껴안고 앉아 있고 후미코는 책을 읽고 있는 사진이다. 야당은 이 사진을 이용해 내각 사퇴를 촉구했다. 개전의 정이 없는 대역죄인을 우대했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재판소 관계자들은 두 사람을 회유하여 자백하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반박했다.

그 점을 설명하는 ‘괴문서’도 나돌았다. “하루의 취조를 마친 후 예심판사 다테마쓰는 왜 예심 법정에 박열과 후미코 두 사람만을 남겨놓은 채 변소에 간다는 핑계로 퇴장하여, 이 중대한 두 피고를 아무런 감시도 하지 않은 채 문만 잠그고서 약 30분 동안이나 내버려두었느냐는 점이다. 수인의 몸으로 감옥에 갇혀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있다가 감시의 눈에서 완전히 해방된 이 30분 사이에 인적 하나 없는 법정 안에서 그처럼 불령한 두 남녀가 무슨 짓을 했을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 후부터 박열과 후미코는 생리적인 어떤 기능이 조절되어 점차 유순해졌고 그들은 다테마쓰를 이해자이며 동정자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을 찍은 것은 박열이 다테마쓰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더 유력해 보인다. 박열은 “마지막 소원입니다. 어머니가 나를 보지 못한 지 오래 되었는데 우리 부부가 함께 사진을 찍어 판사의 손을 거쳐 조선에 계시는 어머니와 다른 두세 사람에게 보내 넌지시 결별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다테마쓰 자신이 일왕의 불상사를 막은 충성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놓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 사건으로 당시 다테마스 판사는 사직서를 냈다.

후미코는 1925년 여름부터 자서전 집필을 시작했고 이듬해 2월 <도쿄아사히신문>은 그녀가 자서전을 1000장 이상 썼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2월 26일에는 두 사람에 대한 대심원 제1회 공판이 있었다. 이날 재판정에서 박열은 한복을 입고 있었다. 또 후미코도 치마와 저고리를 입었다. 박열은 재판에 앞서 조선 예복을 착용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짐에 따라 조선인단체인 ‘3월회’와 옛 ‘흑우회’ 동지들이 하얀 비단으로 만든 조선옷을 빌려서 공급한 것이었다. 또 그는 재판장의 신문에 망설임 없이 조선어로 대답했다. 이 재판과 관련해 조선의 언론인 안재홍(1891~1965)은 ‘박열사건을 보고’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린시절의 가네코

“박열의 처인 가네코 후미코가 그 민족의 소속을 달리함에도 불구하고 철두철미 그녀가 애모하는 박열과 운명을 함께하려는 태도를 보건대, 이것이 곧 피압박민족인 조선인의 문제인 동시에 다시 민족의 경계선을 떠난 계급적 공명이 얼마나 진지하고 뜨거운 것인지를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 조선인의 장래와 함께 일본의 사회적 변동이 어떠할지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3월 23일 두 사람은 결혼신고서를 제출했다. 이틀 뒤인 25일은 대심원 판결 공판일이었다. 재판소에는 새벽 5시부터 경시청과 경찰서의 제복경관 및 사복경관 200명, 헌병 30명이 출동하여 경계를 서고 있었다. 법정 출입자의 검문이 삼엄했고 100여 명의 일반 방청인이 입정했다. 이날 후미코는 화살깃 모양의 무늬가 새겨진 비단 겹옷과 검은색 바탕에 붉은 무늬를 물들인 비단옷 차림이었고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차분한 모습이었다.

박열은 하얀 깃이 이중으로 달린 조선옷을 입었다. 재판장이 두 사람에게 기립을 명령했을 때 두 사람은 일어서지 않았다. 그는 형법 73조의 폭발물단속벌칙 제3조 위반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이때 두 사람의 반응도 화제를 불렀다. 후미코는 곧바로 일어서서 두 손을 번쩍 들고는 “만세”라고 외쳤다. 박열은 “마지막으로 재판장에게 한마디 하겠다”고 말했다. 이때 법관들은 서둘러 퇴정하고 있었다. 박열은 조선어로 “재판은 비열한 연극이다”라고 소리치고 “재판장, 수고 많았다”고 덧붙였다. 이날 후미코의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5분 정도의 짧은 만남이었다. 후미코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이 날의 일을 시로 썼다.

뜻밖에도 어머니가 고향에서 올라와
감옥에 있는 나를 방문했네
어머니는 잘못했다며 울고
나 또한 영문도 모른 채 눈물 삼킨다
어쩌다 만나지도 못했구나
6년 만에 눈여겨보는 어머니 얼굴



젊은시절의 가네코
그리고 열흘 뒤 일왕의 은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감형장(減刑狀)이 전달됐을 때 박열은 그것을 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후미코는 그것을 받자마자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형무소장은 기자들에게 “두 사람이 감사히 받았다”고 공표했고 나중에 나온 기록에는 “후미코가 대단히 고맙다며 경건한 태도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고 적혀 있었다. 그 뒤 박열은 지바형무소로, 후미코는 우쓰노미야형무소 도치기지소로 이감됐다. 감형이 내려진 뒤 먼저 단식으로 저항한 사람은 박열이었다. 4월 6일 이후 그는 밥을 먹지 않았다. 그는 몸이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고, 형무소에서는 단식 사실이 외부로 유출될까 고심하고 있었다. 지바형무소로 옮겨진 뒤에도 그는 계속 단식을 했고, 9일 뒤인 15일에 단식을 풀었다.

석 달여가 지난 7월 24일 새벽 2시35분, 후미코의 어머니 기쿠노는 자정에 온 전보를 그제야 받았다. “후미코사망급래요”. 도치기지소에서 온 것이었다. 그녀는 조선에 있는 박열의 집으로 유해 인수를 의뢰하고 싶다는 전보를 보냈다. 그녀는 닷새가 지난 29일 도쿄로 왔다.
후미코는 7월 23일경 붉은 마닐라삼줄을 이용해 창의 철봉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고 되어 있다. 삼줄 대신 허리띠를 이용했다는 얘기도 있다. 우쓰노미야형무소 소장 요시가와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살했다고요? 하아, 그런 얘기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얘기한다면 별 도리가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걸 신문에 싣는 것은 오히려 사회 선도라는 목적에 반합니다.”

후미코의 유품은 빗 3개, 현금, 만년필, 알티바세프의 <노동자 세리요프>, 다눈치오의 <죽음의 승리>, 슈티르너의 <자아경-유일자와 그 소유>가 있었다. 책들은 여러 곳이 찢겨져 있었다. 빽빽하게 써서 묶은 채 보관해오던 세 권의 수첩이 있었는데 당국이 검게 칠한 다음 찢어 버렸다고 한다. 유서는 보이지 않았다. 도치기형무소에 수용된 후 50일 사이에 그녀는 900장의 원고지와 잉크 두 병 그리고 만년필 두 자루를 사용한 흔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한 글자의 유서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곳에서 쓴 시가 남아 있었다.

이상국 월간중앙 전문기자 [isomis1@joongang.co.kr]

옥중에 있는 가네코를 찾아온 그녀의 어머니 기쿠노.

가죽수갑 차고 어두운 방에 처박힌 밥벌레
단 한 마디의 거짓말도 쓰지 않으리니
있는 것을 다만 있는 그대로 쓴 것뿐인데
감옥의 관리는 투덜대며 빼버리는구나
말하지 않는 게 그렇게 맘에 들지 않는다면
왜 사실을 없애버리지 않는단 말인가


자신이 죽은 뒤에 형무소 관리들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예견을 담은 듯한 시도 보인다.

손발은 비록 부자유스러워도
죽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죽음은 자유로운 것
하지만 손발이 묶여 있음에도 죽은 건
‘우리들의 과실이 아니다’고 말할 터인데
죽이고서도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
참으로 끔찍하구나


지바형무소는 박열에게 후미코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된 박열은 눈물을 흘리며 다시 일시 단식을 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폐결핵을 앓고 있었으며 자기 마음대로 하는 바람에 간수와 관계자들의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는 보도(도쿄아사히신문, 1926년 8월 1일자)가 나와 있었다. 그는 1935년 옥중에서 전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무성 경보국 <월보(月報)> 4월호에는 박열이 지바형무소 교무주임과 면접하는 자리에서 천황제를 긍정하고 “나 자신도 천황폐하의 적자이자 권속이니만큼 그 신분에 맞는 책임을 분담하는 영광을 주셨으면 한다”고 대단히 유쾌히 말하며 사상 전향을 표명했다고 주장한다.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사상휘보> 제16호(1938년 9월)에 의하면 박열은 내선일체론을 설명한 현명섭의 <조선인의 나아갈 길>(1938)을 읽고 “우리 조선인은 자기의 존립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하루속히 내지인과 합체하여 신민족을 형성하고 조속히 내선융화를 완성하여 일한병합의 결실을 거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35년 8월 9일자 도쿄니치니치에는 “박열에게 신문 잡지의 열람 및 구독이 금지되어 있고 종교와 과학에 관계된 단행본 한 부만이 허락되어 있을 뿐”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상 전향을 강요했을 당시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박열은 1936년 8월에 고스케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945년 8월 아키타형무소로 옮겼고 해방 이후 10월 27일 출옥했다. 출옥 직전 형무소를 찾은 야마가타신문 기자에게 박열은 “전향 이후 일본인으로 살아간다고 맹세한 이상, 사회가 받아주지 않아도 나는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출옥한 날(10월 27일) 그는 아키타사키가케신문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지금까지 내가 체험한 것을 활용, 조선인으로서 조선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일본을 적대적으로 대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11월 20일 야마가타시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그는 “천황제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일본의 전체주의와 제국주의가 다른 나라와 국민을 강압하려 하는 경우는 절대 반대하며 감히 말하건대 말살하고 말 것이다”라고 말했다.

1946년 2월 김구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박열 군의 성명서를 읽고 깊이 경의를 표해 마지않는다. 무엇보다도 군은 무정부주의자다. 군의 이상과 신조로 보아 인간의 자유의지와 개성을 절대 존중하는 군으로서 조국과 동포를 위해서는 각자의 주장을 버리고 오직 독립일로로 매진하고자 했으니 이것은 군의 애국 단성(丹誠)으로 단결을 고요(苦要)하는 충심에서 표명된 것이다.”

박열은 1947년 장의숙과 재혼했다. 결혼 후에도 그는 후미코의 기일(忌日)에는 하루 종일 집 안에서 정좌하고 묵상했다고 한다. 장의숙에게 그는 “당신도 함께 기도를 해주오. 참 불쌍한 여인이었어”라는 말만 하고는 하루 종일 침묵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그는 납북되었다. 반공주의자였던 그가 자발적으로 간 것 같지는 않다. 이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평양방송은 1974년 1월 17일에 77세로 그가 타계했다고 전했다.

1972년 일본에서는 가네코 후미코의 일대기를 그린 <여백의 봄>이 출간되었고, 이후 후미코 연구모임이 생기는 등 신드롬이 생겨났다. 박열은 1989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유족으로 아들 박영일(예비역 장성), 딸 박정희(일본 거주) 씨가 있다.

출처 : 동양문화이야기
글쓴이 : 예문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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