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치의 노래
나는 음치는 아니지만 단언하건데 노래치다.
음정은 정확한데 불행히도 음역이 짧아 높게도 안 올라가고 낮게도 안 내려간다.
일전 조카랑 영화를 보러 갔는데 시간이 맞질 않아 1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다가 이른 저녁을 먹고 노래방에 들러 30분만 뽑고 가자고
결정을 보았다.
조카는 짧은 시간동안 알뜰히 노래를 하려고 열심히 희망곡을 눌러대기 시작했다.
노래엔 취미도 흥미도 없는지라 처음엔
"난 한 곡도 안 부를테니 너 혼자 다 해라, 난 박수나 쳐줄게" 했지만
몇 년만에 온 노래방에서 한 곡조도 안 뽑는다는 건 왠지 내 목에 대한 결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나도 내 희망곡을 눌러두었다.
조카가 먼저 마이크를 들더니 감정을 잡으며 무슨 노랜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직 목이 트이질 않아 다소 껄끄러웠지만 감정이 살아 있어 제대로 부르면 꽤 잘 부를 것 같았다.
그녀는 연이어 세곡 정도를 뽑아내었고 나는 노래방 도우미마냥 템버린을 흔들어 주었다,
노래방에 가면 내 노래의 스타트는 예외없이 '살짜기 옵서예' 다.
그 노래를 처음 들은 건 중학교 때였다고 기억되는데, 금세 멜로디를 익히곤 혼자 흥얼대곤 하였다.
노래방이라는 것이 생겨 처음 그곳엘 갔을 때 함께 갔던 문우들이 내게 한 곡조 부르라고 몰아세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래방에 가면 별 흥도 안나고 주눅이 드는지라 슬쩍 발뺌을 했지만,
계속되는 권유에 어쩔 수 없이 책을 들추며 내가 할 수 있는 노래를 찾기 시작했다.
압력으로 긴장되선가 노래제목이 아무 것도 생각나질 않았다.
그러다 떠오른 것이 '살짜기 옵서예'
나는 노래방이란 곳을 좀처럼 가지 않는다.
잘 해야 2년에 한번 정도나 될까.
그러니 노래 실력이 늘 턱이 없어 언제나 그 모양 그 타령이다.
스타트로 부르는 노래도 이미 입력된 살짜기 옵서예인데,
남들은 내가 그 노래를 엄청 좋아하여 부르는 줄로만 안다.
뭐 싫을 건 없지만도...
조카가 몇 곡 뽑고 나자 내 예약 노래인 살짜기 옵서예 반주가 나왔다.
신경 쓸 사람이 없으니 멋대로 불러보리라 작심했건만 그넘의 짧은 음역은 여전히 구제불능.
조카는 제 노래 불러대고 싶은 욕심에 눈이 멀었는지 아줌마도 몰라보고 1절만 하라고 재촉을 한다.
살짜기 옵서예는 패키김이 처음 불렀기에 그런지 다음 노래도 패티김의 '이별'
그 다음 노래는 이선희의 인연(동녘)으로 정하고 해당 노래 넘버를 눌러두었다.
'이별'은 그럭저럭 넘어가고 연이어 '인연'을 부를 차례.
한데 이럴 수가! 반주는 나오는데 도무지 입술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저 좋아할 할 뿐이지 몇 번 불러보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한참을 버벅거리다 조금씩 반주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노래를 하기에 내 음역은 어림도 없었다.
안 올라가면 옥타브를 멋대로 낮추고 또 낮추어 불렀다.
듣다 못한 조카는 내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패스를 해버린다.
나는 킬킬대느라 조카의 무례한 행위가 불쾌하지도 않았다.
내가 듣기에도 내 노래는 너무 한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