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봄비
오랜만에 중랑천을 찾았다.
걷기에도 심심하고 별 운치는 없는 길이지만
길이 한없이 뚫려 있으니 쭉쭉 속도 내어 걷기엔 제격이다.
오후엔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부지런히 조금만 걷다 올 생각이었다.
한데 천변의 파릇한 풀들과 야드레하게 올라온 쑥들을 보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쑥개떡, 쑥국, 쑥버무리....
갑자기 쑥을 넣은 음식이 연이어 떠오르며
쑥을 뜯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울내기라 나물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쑥만은 확실히 안다.
쑥을 캘 아무 도구도 없었지만 맨손으로 쑥을 뜯기 시작헀다.
손 안에 든 쑥이 한줌쯤 되었을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 봄비!
우산이 없으니 쑥만 아니었다면 서둘러 발길을 돌렸을 터.
그러나 쑥에 미련이 남아 비를 맞으며 조금 더 뜯었다.
남편과 한끼 국 끓여먹을만큼은 되어야 하겠기에.
집으로 돌아오니 봄비는 춘설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다.
문득 신중현의 <봄비>가 떠올랐다.
컴퓨터를 열고 검색칸에 신중현의 봄비를 써넣었다.
혹시나 했는데 이내 여러 가수 버전의 봄비들이 주르륵 나오질 않는가.
이런 고마울 데가....
아, 좋마운 세상이여!
도깨비 방망이 같은 컴퓨러여!
알라딘의 마술 램프여!
내가 기억하는 봄비는 김추자와 장현이 부른 봄비였는데,
오늘 보니 장사익도 봄비를 불렀다.
신중현에 의해 처음 봄비를 불렀다는 박인수라는 가수의 노래도 뛰어나지만,
창법이 다분히 흑인적이어서 그런가 소리꾼 장사익의 봄비가 내 취향엔 더 맞았다.
또한 여 가수들이 부른 것보다 남자 가수들이 부른 봄비가 더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신중현은 봄비를 가지고 어찌 그리 사람의 심금을 격하게 울리는 곡을 만들었는지.
그의 천재성을 새삼 알겠다.
70년대 발표된 곡임에도 시대를 넘어 들어도 전혀 음악성이 낡거나 뒤지지 않고
여전한 명곡으로 가슴을 울린다.
봄비는 본디 격정적으로 내리지 않는다.
봄비는 대체로 촉촉하고도 은근히 내리는 경우가 많은데, 신중현의 봄비는 그렇질 않다.
장대비나 소나기처럼 사람의 가슴을 치고 때린다.
아니, 가슴을 후비어 파 빗물 아닌 핏물이 고이게 한다.
나는 장사익의 봄비를 들으며 몇번인가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내치꼿는 피아노 반주 소리와 가슴 저미듯 파고 드는 장사익의 절규.
나는 그 봄비에 젖고 또 젖었다.
붉디 붉게 젖었다.